신문 연재-토론토지역/크리스챤 월드 성경 안밖의 세상

59 얍복강 2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천천히 chunchunhi 2013. 4. 28. 00:17

59 얍복강 2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에서의 생각은 그랬을 것이다.

'그래 니가 형 해! 그런다고 뭐가 달라 지겠어? 형인 내가 동생으로 둔갑할 리야 없으니까"

허나 에서는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의 속담을 몰랐었나보다.

 

나중에 알게 된 에서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 어머니 리부가의 도움으로 아버지 집을 떠나는 야곱, 아마도 집을 떠나면서도 아버지에게 큰절 한번 제대로 못하여 마당에 꿇어 앉아 울던 홍길동의 심정하고 비슷하였을까?

 

어린 나이에 먼 길을 떠나려니 그 두려움 또한 컷으리라.

먼 길을 걷다 보니, 돌을 베고서도 잠을 잘 수 있도록 피곤한 몸은 또한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였겠지

뒤 쫒아 올지도 모르는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과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지 모르는 앞길, 자기를 어떻게 대하여 줄지를 알 수 없는 외삼촌..

이 모든 두려움과 어려움을 이겨 나가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생각, 소위 "Positive Thinking"이 절실히 필요하였으리라.

그래서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의 꿈을 장황히 기록한 것이 아닐까?

 

외삼춘의 집에 식객이 되어 눈치밥을 먹는 것도 잠시, 사람의 마음이 어디 그런가? 아무리 외조카라고 해도 공밥이 하루 이틀이지

그래서 계약을 체결하였다.

야곱이 첫눈에 반한 두째 딸을 주기로 하고 7년을 일을 하라고.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7이라는 수가 어느 무엇으로도 나누어지지 않는 가장 큰 수로, 꽤 오랜 세월의 대명사였던지도 모르겠다.

하여턴 그 오랜 세월을,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한 일념으로 열심히 일을 해서 외삼춘의 재산을 많이 불려 주었건만, 정작 자신에게 돌아 온 것은 마음에 별로 없는 첫째딸이 아닌가

그 배신감과 그 되어진 일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능력에서 오는 허탈감과 소외감에 이를 악물었으리라. "어디 두고 보자." 하며

 

그 후로도 보낸 세월이 14년이 지났으니 , 결국 20년이 넘는 객지 생활에 두명의 정실부인과 또 그네들을 따라 온 종을 후실(?)로 맞아 12명의 아들들과 몇명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딸들을 두며 큰 가정을 이루게 되었었다.

또 억척같은 생활로 남 부럽지 않은 부도 이루어지게 되자, 생각나는 것이 고향이요, 어머니일 것이다.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란 말이다.

 

이민생활 20년을 청산하고 외지에서 얻은 부인들과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향길에 올랐다.

금의환향이리라.

허나 고향이 가까워 지면서 반비례로 늘어나는 두려움.

자기를 죽이려 하던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 졌으리라.

그 두려움에 자기의 모든 식솔들을 앞세워 보내고(이것도 마음에 들지가 안는 일 중의 하나다. 치사하게 여자와 자녀들을 먼저 보내 다니위험한 일에는 여자를 먼저 보내어 탐지케 하려는 소위 Lady First의 시초는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이것만으로는 안심이 안되어 재물로 뇌물을 보내면서까지, 인간적인 꾀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후에 이제 내일이면 강을 건너 고향으로 갈 수 있는 밤, 강가에 앉아 지난 세월을 되 돌아보는 야곱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좀 더 잘 살아 보려 몸을 안 돌보고 일을 하였더니 재물은 모았으나

이젠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도록 병약해진 몸, 고향으로 돌아 가고 싶기는 한데

아직도 형의 마음이 어떻게 좀 풀렸는지 조차 모르는 두려움에 강가에 앉아 있는 야곱을 상상해 보았다.

 

달빛마저 교교히 흐르는 밤의 강변!

엄습하는 두려움과 되 돌이킬 수 없는 삶의 회한!

이제는 더 어쩔 수가 없는 막바지에서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몸부림 칠 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그 옛날,

형을 피해 도망가던 길에 벧엘에 단을 쌓으면서 하나님께 드린 약속이 생각났을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자신을 깨 닳았을지도 모르지.

간절히 기도하였으리라.

그런 어려움에 당면하지 못한 사람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로 간절히..

그 장면이 얍복강가에서 있었던 씨름의 기록이 아니었을까?

혼자 공상하여 보았다.

 

여기까지는 공상으로도 좋은 데, 그 다음의 야곱, 아니지, 이젠 이스라엘이 된 야곱의 행실이 또 마음에 안든다.

 

참회도 잠간, 그 오랜 세월동안 괘씸하도록 미워 하던 마음마저 다 버리고, 사랑으로 동생을 받아 드리려 하였던 형, 에서를 또 뒤 따라 가겠노라며 속이고는 다시 얍복강을 되 건너 숙곳이라는 지방에다가 진을 치고 산 것을 보면, 그 고향이 그리워서, 또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고향으로 돌아 가려한다는 그 말 또한 과히 진실되지 못한것 같다.

허기사 하나님만을 믿겠다며 서원까지 하고서도, 부인이 훔쳐온 드라빔을 믿게 내 버려 두기도 한 그 야곱이기도 하니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숙곳에서 살면서 건강을 추스른 후에는 지금의 이스라엘이 강점하고 있는 지방으로 이주해 가서 하나의 큰 부족을 이루어, 후에 형 에서의 부족과 서로 대적하도록 성장한 이스라엘 부족,

그 대적이 결국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때부터 붙여진 이름 이스라엘이 오늘도 세계의 뉴스의 중심에서 계속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니 이런 지극히 인간적인(?)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면서까지 축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참 마음은 과연 무었이었을까?

 

결국 나약하여 겁이 많고,

자기 밖에는 모르도록 욕심많고,

그 욕심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 하나님께 서원도 하였다가 변절하기도 잘하는 우리 인간이지만

그래도 우리를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시려고

모세를 보내어 대언케 하시었으나 그것으로 강팍한 우리를 돌아 오게 할 수 없자,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시었고, 그 마저 우리들이 죽여 버리자,

이제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성령을 보내어 우리를 그 품으로 돌아 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가이없는 사랑의 마음인 모양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사람들이 살던 땅이건만,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안보이고, 모슬렘의 사원들만이 지는 햇빛을 받아 그 둥근 지붕을 번쩍이는 그 지역을 뻐스는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를 우리들의 교회가 있는 우리들의 집으로 보내 주기 위해서.

 

나는 언제나 그 가이없는 사랑에 보답하며 살아 가는 사람으로 변해질 수가 있을까?

 

 

 

 

 

야곱의 부인들이 들고 온 우상 "드라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