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서유럽 대가리

60 베네치아 3 - 카니발의 도시

천천히 chunchunhi 2019. 12. 7. 01:09

60 베네치아 3 - 카니발의 도시  

 

카니발(carnival)을 우리 말로는 사육제라고 번역하고 한자로는 이렇게 쓴다. 謝肉祭

고기를 바쳐 감사를 표현하는 제사라는 의미를 내포한 글자들이다.

모든 원시 종교의식에서 신에게 바치는 제사에서 인간들의 진정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애써 키웠거나 잡은 동물, 심지어는 사랑하던 자녀들까지도 제물로 바치었던 것을 성경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 그런 후에 그 제물을 제주가, 아니면 참석한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즐기었던 행사가 제사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을 둔다.”는 속담이 생긴 연유가?

그런데, 영어의 어원은 라틴어의 'carne(고기)' ' levare(격리)' 을 합친 말로 '고기를 사양하는 잔치' 란 뜻이란다.

그럼 사육제(謝肉祭)를 사육제(辭肉祭)라고 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많은 로마 가톨릭 국가에서 펼쳐지는 그리스도교 전통 축제 중에 부활절 이전의 40일을 사순절이라고 하는데, 이 기간 동안 신자들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며, 절제하고 금욕하는 생활 속에 부활의 경건한 의미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고기를 먹지 않았단다.

그래서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고기와 술을 맘껏 마시면서 축제를 하였었는데 이것을 카니발이라고 하였단다.

제사 후의 잔치를 제사기간 전에 하면서 영양보충도 하도록 사람들은 약아졌나 보다.

 

1162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주변에 있던 아퀼레이아(Aquileia)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쟁에서 진 아퀼레이아의 대주교가 바친 황소 1마리와 돼지 12마리를 귀족들과 관중 앞에서 도살하며 전쟁 승리를 축하했다.

이 풍습이 매년 이어져 이후 베네치아 카니발의 주요 행사인 ‘황소 목 자르기(Taglio della testa al toro)’로 발전하던 중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동안에는 금지 되었었으나 이탈리아로 귀속된 후 다시 부활한 베네치아의 사육제(Carnevale di Venezia)는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 전 날까지 10일 동안 열리는데, 가면과 더불어 화려한 의상 때문에 가면 축제라고도 한다.

1930년대 무솔리니(Mussolini)가 집권하며 카니발은 또다시 엄격히 금지되었다가 1979년에 다시 시작되어 오늘에는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 프랑스의 “니스 카니발”과 함께 세계3대 사육제로 꼽힌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는 축제를 '허락된 일탈(逸脫)'이라 표현하며 성과 역할의 전복을 일시적이나마 가능하게 한다고 하였다. 특히 가면 축제는 사람들이 가면 속에 자신을 숨기고 평소에 할 수 없는 행동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는 점이 모두에게 즐거움을 준다고 하였다.

가난하고 착취당하던 피지배층의 구분이 명확하였던 유럽 중세 시기였기에, 사육제 기간 동안에는 가면을 사용하여 신분과 성별, 사회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니 잠시 동안이라도 계급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함께 어울리면서 흥분과 기쁨을 만끽하며 심리적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을 터이니 무슨 일인들 못 일어났겠는가! 더구나 취중에….

베니스에서 처음 마스크를 착용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베니스에서 가면 사용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1268 5월의 법령에서, “가면을 쓴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계란을 던져 시의회가 가면 착용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런 배경으로 시작된 카니발이 시대에 따라 광란의 축제로 변하면서 부유한 도시에서가면을 쓴 Carnival로 유명한 베네치아이고 보니 성 풍속 또한 꽤나 문란하였었던 것 같다.

베네치아에서 희극배우인 아버지와 구두수선공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난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Giovanni Giacomo Casanova 1725-1798)도 이곳 출신이다.

그는 젊은 시절 성 치프리아누스 신학교에 다니던 중 추문을 일으켜 쫓겨나게 되자 유럽을 전전하며 화려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던 중, 베네치아로 돌아오자 고발되어 베네치아 공화국의 프리지오니 누오베 감옥에 구속되었다. 총독 관저인 팔라초 두칼레(도제의 궁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이 감옥은 한번 들어 가면 언제 나올지 기약이 없는 다리라는 악명이 있어 탄식의 다리라 고들 부른다. 378 개에 달하는 베네치아 다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다리다.

이런 탄식의 다리를 여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건너와 다시 자유의 몸이 되어 유럽을 방랑하며 여성들을 유혹하던 카사노바!

끝이지 않는 추문과 그에 따른 결투를 피해 도망 다니다 말년에 보헤미아의 둑스 성에서 발트슈타인 백작의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 죽은 카사노바는 보통 남성 이상의 탁월한 능력을 여러가지 보유하고 있었단다.

그는 화학, 의학, 역사, 철학, 문학에 정통했고, 점성술, 연금술, 마술에도 솜씨를 지녔으며,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영어와 스페인어도 조금은 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무용, 펜싱, 승마, 카드놀이에 빼어난 솜씨를 지닌 데다가 듣고 읽고 말한 것은 물론이고 한번 만난 얼굴도 반드시 기억하는 천재였다고 한다.

이렇듯 다방면에 걸쳐 정통했으나 어떤 직업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유럽 여러 나라들을 넘나들며 주로 '여자사냥'과 도박으로 투옥, 추방이 거듭되는 삶을 통해 살았던 비운의 자유주의자였단다.

카사노바는 정력만큼 저술도 다채로워, 이따금 시와 평론을 쓰고 〈일리아드 Iliad〉를 번역했으며(1775), 베네치아의 귀족사회를 풍자하는 소책자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저술은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는 자서전으로, 그가 죽은 뒤에 12권의 〈생갈의 J. 카사노바 회고록 Mémoires de J. Casanova de Seingalt〉으로 처음 출판되었으며 원래의 원고에 바탕을 둔 〈나의 인생 이야기 Histoire de ma vie〉라는 결정판은 1960~62년에야 출판되었다.

카사노바가나의 인생 이야기를 통하여 밝힌 100명 이상의 여인들과 쾌락을 즐긴 정력도 대단하지만 40여권의 책을 저술한 저술가이기도 하니 이 아니 대단한 남성이 아닌가!  이를 두고 여복을 타고 났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여난을?”

혹자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카사노바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여졌다고도 하지만 돈 조반니는 스페인의 극작가인 티르소 데 몰리나가 1630년 경에 쓴 비극 '세비야의 호색가(El burlador de Sevilla, 1630)' 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따라서, 카사노바(Giovanni Giacomo Casanova 1725-1798)의 이름에 지오반니가 있기는 하지만 1630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이니 돈 조반니가” “지오반니 카사노바는 아닌 것 같다.




사육제로 유명한 베네치아의 화려한 가면들과 의상.

(이 사진은 빌려온 사진이다.)

가면 노점. 광장의 가면과는 그 가격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사진이 없던 당시 그림으로 남겨진 얼굴을 보면….?

어떻게 그 많은 여인들을 유혹 하였을까?




부인을 옆에 앉히고 탄식의 다리밑을 건너는 남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팔라초 두칼레(도제의 궁전) 이 뒤로 탄식의 다리로 이어진 프리지오니 누오베 감옥”이 있다.


[김성종] [4:49 PM] https://m.youtube.com/watch?feature=youtu.be&v=YS9DZRGNcl8


[김성종] [4:49 PM] https://m.youtube.com/watch?v=tK2DPh00KSY&feature=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