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2016년 한국

24 강화도 2 덕진진(德津鎭)

천천히 chunchunhi 2017. 2. 3. 07:23


24 강화도 2 덕진진(德津鎭)

 

이조시대,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해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 가장 강력한 포대이며 강화해협을 지키는 외성의 요충지이다.

숙종 5(1679)에 축조된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는 강화 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이름이 높았다.

19세기에 들어서며 세계의 열강들은 식민지를 넓히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돌아 다닐 때 영국과 스페인 그리고 포르트갈에 의해 이미 많은 지역들이 그네들의 식민지가 되었기에 신흥강국이 된 불란서와 미국은 아직 아무 에게도 속국이 되지 않은 한국에 눈독을 드리며 직접대기 시작하였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조선에서는 쇄국정책으로 이네들을 막기 급급하여 처음에는 어느 정도 성공하는가 싶었지만 결국 현대 무기와 재래무기와의 싸움에서 재래무기가 버틸 수가 없게 되였었지.

그 때 일어난 외침 중에 좀 큰 사건으로 병인양요(1866)가 있었는데, 이 때에는 양현수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같은 해인1866년 황해도에서는 제너럴 셔먼호사건이 일어 났다.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과의 교역을 위해 황해도 황주목 삼전면 송산리에 정박했다.

쇄국정책을 펼치던 조선측은 제너럴 셔먼호에 퇴거를 경고했으나, 그들은 약탈을 자행하고 대동강 상류 만경대 부근에 정박했다. 그들을 막기 위해 배에 접근했던 이현익·박치영·유순원이 붙잡혔고, 조선측은 석방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섭 실패에 격분한 평양군민이 활과 소총을 난사하고 돌을 던지자, 제너럴 셔먼호는 뱃머리를 돌렸다. 이때 조선측은 이현익을 구출했으나 유순원·박치영은 살해되었다. 22일 조선은 화공·포격을 실시하였고, 24일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버렸다. 소위 셔먼호 사건이다.

 

미국 국무부는 조선과의 통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군함을 거느리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1871년 조선측과의 교섭책임을 주청 특명전권공사 F. F. 로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에게 조선원정을 지시했다. 로와 로저스는 상하이(上海)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이르러 휘하의 함대를 집결시킨 뒤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 대포 85,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그해 4 23일 로저스는 공격작전을 지시하여 450명의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했으며 이튿날 아침 미국 해병대는 전진하여 덕진진을 공격·점령하고 이어 광성보로 육박해왔다.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는데, 수륙 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이 격전에서 조선측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53명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劉禮俊) 24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은 전사자 3,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도 퇴각할 것이라 생각해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 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이러한 조선측의 반응은 패전한 조선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상하던 미국측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미국측은 다시 교섭을 요구했으나, 조선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로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또한 대규모 군사행동은 본국으로부터 받은 훈령 외의 일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으로부터 철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해 5 15일 조선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논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되었을 경우에는 구조·보호해 달라고 요청한 후, 다음날 전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했고 배외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일이 신미양요인 것이며 이후 조선인의 쇄국 및 배외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1976, 신미양요 때 무너진 성곽과 돈대(외적의 침입을 사전에 방지하고 적의 동태를 관찰할 목적으로 해안 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 시설물), 포대 등을 복원하고 대포도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현재 덕진진에 가면 남장포대를 볼 수 있는데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해상에서 적에 노출되지 않은 반월형 천연 요새를 확인할 수 있다. 사적 제 226호이다.


덕진진 성문


단청도 새롭다.




성곽에서 바라 본 염하(鹽河)라고 불리는 바다.  아마도 조수 간만의 차이로 섬 사이를 휘도는 물결이 강 같아서인가 보다.




50년 전에는 이런 것이 없었는데....






남장포대



공원처럼 깨긋하게 잘  보수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