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2016년 한국

22 다산 정약용 유적지

천천히 chunchunhi 2017. 1. 30. 12:06


22  다산 정약용 유적지

 

두물머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산 정약용 유적지 마을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한강 부근에 위치한 마을로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묘가 있고, 실학박물관도 있어, 문화체험마을로 조성되어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길가에는 정약용이 직접 설계한 거중기를 포함하여 그의 일대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정약용 기념관이 있고 그의 묘역 아래로는 그의 생가인 여유당이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홍수로 유실된 것을 복원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목민심서라는 책을 쓴 다산 정약용에 대하여 건성으로 지나 쳤지만 이 기회에 조금 더 알아 보기로 하자.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의 벼슬을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기로 소문이 났으며,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을 편찬했다고 하니 가히 천재급이다.

22세에 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해 교우관계를 넓혔으며 재학 당시 이미 정조에게 인정을 받았고, 28세에 마지막 과거시험인 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갔단다.

다산 정약용의 업적 중에서 대표적으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수원 화성을 건축한 것이다. 공사기간을 10년 잡았지만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거중기를 발명하여 28개월로 줄일 수 있었단다. 그 거중기의 모형이 길가에 세워져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어떤 빌미만 있으면 상대를 권좌에서 밀어 내기만 하니, 정순왕후가 권력을 잡았을 때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라는 명목으로 인해 지방으로 귀양을 갔지만 오히려 귀향지에서 그는 관리의 부정, 조정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지방 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 시로 쓰기도 하며 여러 권의 책으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무려 5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책을 지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로 추앙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듯 정치에 관해서 뿐만이 아니라 문학발전에도 힘썼으며 과학, 의학 등 많은 분야에 힘쓴 정약용은 요즈음에 와서는 동양의 다빈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란다.

 

정약용의 대표작이라고 불리우는 목민심서는 정약용이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전라도 강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중에 집필하여 1818(순조 18)에 완성된 것이다.  그 나이 57세 되던 해에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하며 수령이 지켜야 할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으로 모두 48 16책으로 된 필사본이다. 그가 학문적으로 가장 원숙 해가던 때에 이루어진 저술이고, 민생과 관련된 그의 많은 저서 중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단다.

조선이 낳은 천재이지만 정치의 희생이 되어서 쓰이지 못하고 유배생활을 해야했던 다산 정약용!

참으로 우리는 이런 일들을 많이 되풀이 하는 역사를 가진 민족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내가 잘 몰라서 그렇지 욕심이 있는 사람 사는 세상에, 그리고 정권이란 이름의 정치가 있는 곳에는 다 대동소이한 일들이 아닐까?

자신과 비슷한 수준일 때에는 교류를 하고, 조금 못하면 무시하고, 조금 더 잘나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래서 모함하고, 아주 월등할 때에는 아부하던지 존경하는 인간들의 속성이 있는 한….

지은 지가 얼마 안 된 것 같은, 잘 진열이 되고 깨끗한 정약용 실학박물관을 돌아 보는 마음이 참 착찹해 지고 있었다.



수원 화성과 배다리를 놓을 때 사용 되었던 거중기







이 곳은 박물관이 아니고 기념관이다.


생가










묘소  정약용의 묘가 이 둔덕 위에 있다.


묘소 아래 통나무 의자들

정약용의 묘

아래가 저만큼 보이도록 높다.




여기서 부터가 박물관 안에 전시된 물품들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