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2016년 한국

26 강화도 4 전등사 사적 제136호.

천천히 chunchunhi 2017. 2. 5. 09:44


26 강화도 4 전등사 사적 제136.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도 많이 변해 있었다.

고찰은 고찰이로되 더 이상 고찰은 아니로다!”라고 하면 좀 헛갈리는 말이 되려는가?

이제는 더 이상 고즈넉한 산사가 아닌 전등사에서 옛날에는 없던 죽림 다원에서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나누어 지는 대화 속에 되 살아나는 인생 여정!

참 멀리도 돌아 왔나 보다.

 

381(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고려 충열왕 때 정화공주가 옥등을 시주한데서 전등사로 이름을 고친, 현존하는 사찰 중 창건연대가 가장 오래 된 절인 셈이다.  이 땅에 불교가 전래 된 것이 고구려 소수림왕 대인 서기 372년이라고 하니까. 

그러나 현재 그 옥등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누군가가 비장하고 있으려는지….

 

그 뒤 1337년과 1341년에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였다.

1605(선조 38)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 버렸고, 1613(광해군 5)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해서 1625(인조 3)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1678(숙종 4)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으며,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다.

1719년 이 절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史庫藏本)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韓永福)이 이 절에 전래되어 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宮內府)에 바치고, 중수비 200()을 받아 절에 내렸다.

 

현재 대웅보전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석가·아미타·약사 여래의 삼불과 1916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한 『법화경 法華經』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그 외에도 보물 179호인 약사전과 393호인 전등사 철종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5호인 전등사 법화경판등 17점의 지정 문화재가 있는 고찰이다.

사찰 경내에는 70여 년 이래로 은행이 한 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한민족 문화 대백과사전에서)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裸女像)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와 눈이 맞아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단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추녀(醜女)의 나체로 만들어 추녀(순 한글로 기둥 위에 끝이 위로 들린 크고 긴 서까래. 그런데 못생긴 여자와 발음이 똑같다. 왜일까?)를 들고 있게 하였단다.

그 곳에서 매일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했다고 전한단다.

그런데….우얄꼬? 오늘은 집사람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 보여 줄 수가 없쟌나….! 

결국 추녀(醜女)가 추녀(순 우리말이다)를 받치고 있나보다?!  ㅎㅎㅎ


전등사 대웅보전 네 귀퉁이의 연꽃좌대에 쪼그리고 앉아 무거운 기와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조각상

 

전등사 

      - 고 은

강화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옛날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온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 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시인 고은 선생은 효봉스님의 제자로 출가를 하였고 해인사에서 4.19를 거쳐 속리산 법주사 주지로 임명을 받고 법주사를 전등사 주지와 교환하여 전등사 주지를 역임(1967)하셨다 한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50년이 넘어 그 때 그 계단 앞에 함께 앉아 본 친구들.



대웅보전은 그대로인데 사진만 낡았나보다. 허허허


철종. 강화도령이었던 조선 25대 왕의 이름이 아니라 보물 393호인 전등사에 있는 철로 만든 종이다.

새로 들어선 건물들의 단청이 새롭다.









더 이상 은행이 안 열리는 은행나무

옛날에는 여기서 배를 타야만 뭍으로 나갈 수가 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