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1993년 2월 13일 새벽기도설교
누가복음 16장 10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자는 큰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자는 큰것에도 불의하니라.
목사님께서는 부친상을 당하셔서 어제 NEW YORK에서 장례식을 마치 신 후 지금 토론토로 오시는 중이시고,
또 이곳에서는 곽호일장노님의 누님이 고혈압으로 쓰러지셔서 어제저녘에는 영결예배를 드리고 오늘 아침에 하관을 준비중에 있는, 우울한 소식만이 전해지는 암울한 한 주일이었읍니다.
세상 만사에 다 그 때가 있는 것처럼
낳을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또한 있음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지만,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삶이 죽음뒤에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육을 입은 우리들이기에,
또 정을 갖인 우리들이기에 우리의 부모 형제가 죽음을 당했을때 애통해하고, 친구가 죽음을 당했을 때 슬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은 한정된 삶을 갖고 있음에 반하여
우리의 죽음뒤어 오는 영원한 삶에는 시간적인 제약이 없는,
영원 바로 그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고,
기도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잠의 유혹을 물리치고
주님 전에 나와 간구하며 매달리는 것은
우리의 육을 입은 삶의 평안과 풍요로움만을 바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죽음 뒤에 오는 영생에서 복락을 누리고자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고 배워왔고 또 믿고 있읍니다.
그러니 교인인 우리 모두에게 영생은 따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움없이, 아니 오히려 축복으로 받아 들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생에도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처럼 천사들에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는 영생이 있는가하면 음부에서 고통중에 아브라함의 품을 바라보아야하는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5절에서, 에베소서 2장 8절 9절에서 말씀하신것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요,은혜를 인하여 믿음에서 온다고 하였읍니다.
허나 빌립보서를 보면 그 전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행동에 큰 비중을 두고 있읍니다.
이것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 곳이 고린도 후서 5장 10절말씀으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하셨읍니다.
이런 말씀들로 볼때 아브라함의 품에서 살 수 있는 영생이란, 즉 우리가 말하는 고통과 사망이 없는 평화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믿음을 갖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한 행위, 즉 우리가 육을 입고 있는 동안의 행동결과에 따른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0절로부터 31절에 이르기 까지의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는 것과같이, 또 누가복음 6장 20절로부터 26절에 이르기 까지의 4복과 4화에 대한 교훈을 통해서 그 영원한 삶을 어떻게 살아갈수 있는가는 바로 지금 우리가 육을 입고 살고있는 생활의 결과대로 살아간다고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주위에서의 많은 죽음을 보고,
또 우리 자신에게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보면서,
아니 우리에게 하루 하루 가까워 오고 있는 영원한 삶에서의 평안함을 누리기 위하여서는 우리의 짧은 삶이나마 조금 더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겠고,
그러기 위하여서는 우리들의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지금의 나를 재 조명하면서 앞으로의 나아갈 길을 새롭게 모색해야겠기에
"나는 어떻게 살고있나"하는 주제로 오늘아침 여러분과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로부터 30절에 이르기 까지 여러분이 다 잘 아시는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이 다섯달란트로 열 달란트를 만든 종을 두 달란트로 네 달란트를 만든 종보다 더 칭찬을 하셨읍니까?
아님니다. 둘 다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였던 것입니다.
허나 28절에보면 한 달란트를 빼았아 열 달란트를 갖인 자에게 주어버렸읍니다.
기독교의 박애정신으로보면 오히려 있는 자의 것을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테인데도 왜 이 예화에서는 없는자의 것을 빼앗아 있는 자에게 주었읍니까?
두사람은 능력에 따라 주어진대로 성실히 일을하여 그 소산을 얻었지만
한 탈란트를 받은 사람은 이를 땅에 묻어두고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사람은 스스로 생각에
"나에게도 한 열탈란트를 주었더라면 난 30달란트를 만들수 있었을 텐데
겨우 한 달란트밖에 안맡기니 도대체 나를 뭘루보는거야, 기분나쁘게.
그래 내가 겨우 한 달란트짜리란 말이야?
김 새서 일 안해!" 하면서 땅에 묻어놓았었는지도 모르겠읍니다.
자기의 능력을 스스로 과대평가한 채 주어진 일에는 충성을 하지 않고
원망과 핑계만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첫째로 하여야 할 일은 주어진 일에 주어진 대로 충성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을 개발해기 위하여 쉬지말고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은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를 수가 있읍니다.
어떤 사람은 열 달란트르 받고 어떤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은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본분은 때와 장소와 여건에 따라서 다르게 마련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5절에서부터 12절에이르기가지의 말씀처럼
"직임은 여러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성령의 나타나심은 유익하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셨읍니다.
같은 성령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지헤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이에게는 병고치는 능력을,
어떤이에게는 능력을 행함을 주셨다고 하셨읍니다.
이 능력에 따라서 우리들이 사회에서 일을 하며 그 소산으로 가정을 꾸려가고, 또 교회에 봉사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싶은 일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한번 보세요.
머리카락에서부터 발톱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필요없는 것이 없읍니다. 그러면서도 그 각 기관이 하는 일은 다 다름니다.
그런데 발이 "왜 나만 매일 냄새나는 신발속에 들어가 온 몸을 지탱해 주는 수고를 해야 돼? 나도 손처럼 한번 편해보봐야 겠어.
매일 씻고 닦은 후 향기나는 로숀도 좀 발라보고,
손톱처럼 예쁘게 매니큐어도 좀 해보고 싶단 말이야"하면서 데모를 합니다.
그 데모가 성공을 해서 손하고 발이 바꾸어 달아졌읍니다.
갑작이 발이 된 손은 온 몸을 균형있게 지탱해 줄 수가 없으니 기우뚱거리다가는 넘어집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 어디를 제일 많이 씁니까?
얼마전에 저의 집사람도 넘어지면서 손을 먼저 짚었기에 팔 뼈가 뿌러저 지금도 고생을 하고 있읍니다마는 제일 먼저 닿는 곳이 바로 손입니다.
손이 된 발이 아퍼합니다.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손가락이 된 발가락이 젓가락질을 제대로 할 수가 있읍니까 아니면 숫가락질을 제대로 할 수가 있읍니까?
그러니 먹지를 못하지요, 또 의사를 표현하기위해 글을 쓰려니 쓴들 읽을 수가 없읍니다.
왜 우리 속담에 글씨가 엉망일 때 꼭 발가락으로 쓴것 같다고 하지 않읍니까?
이러니 몸이 전체가 허약해지고 말게 되지요.
제 이야기가 아니라 고린도전서 12장 15절서부터 쓰여진 사도바울의 말씀을 조금 바꾼 것입니다.
이렇듯이 우리 개개인도 그 처한 상황에 따라서 그에게 주어진 본분이 다르되 그 본분이 때에따라서는 나의 희망과는 다들수도 있다는, 그러나 그 모두가 다 뜻이 있어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본분에 항상 충실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어린 자식이었을 때,학생일 때에는 우리의 본분이 공부를하고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지만, 결혼할 나이가 되면 부모를 떠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우리들의 본분이었읍니다.
가정을 이루고서는자녀들을 키울 때 지식보다는 지혜를 심어주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이자 본분인 반면, 부인은 가정의 화평을 위해서남편을 도와 노력해야 하고 남편은 성실히 수고하여 그 소산으로 가정을 풍요롭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 그 본분인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장한 우리의 자녀들이 자라서 우리의 품을 떠난 후에는 우리의 본분이 그네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변하여 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각각 처한대로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채 본분 이외의 일을 할 때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자녀들의 교육은 학교와 사회에 혹은 교회에 맞긴 채 부모님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미명으로 욕심을 위장한 채 밤 낯없이 장사에 매달린 결과 자녀들은 방황하며 문제속에 빠지게 된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볼 수가 있읍니다.성경에서 말씀한 대로 남편은 성실히 수고하여 그 소산으로 가정을 꾸려 나가라고 했는 데 육신의 욕심이 좀 심해져서 남편만이 아니라 부인마저도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 소위 맞벌이 부부가 됩니다. 갖이 일을 했으니 같이 피곤하겠고, 또 경제적인 돌립의 가능성도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 남편에게 순종보다는 남편과 더불어 대등해지려고 말이 많아지고, 그 강도가 더해가니부부간에 신뢰가 없어지며 부부싸움이 잦아지게 되고 그러다가는 서로 원수가 되어 이혼마저도 불사하는 요즈음의 세태입니다. 시어머니가 되어서도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을 위하는 마음이 너무 지나쳐서 아들의 또 딸의 가정일에 일일히 참견을 하며 그네들의 생활을 그네들이 어린 아이었을 때처럼 참견을하게되니 고부간에 갈등이 생기고 가정에 불화가오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교인으로서의 본분이 있고, 집사로 피택되면 집사로서의 본분이 있으며,
장노가되면 또 그에 상응하는 본분이 있고 권사로 추대되면 또 그에 따른 본분이 있듯이 목사님에게는 또 목사님대로의 본분이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본분에 충실하게되면 화평속에 부흥발전하는 교회가 될 것이고, 본분을 망각한 채 하고 싶은 일만하려고 할 때에는 소리가 나고, 문제가 생기고 그래서 갈라지고 하는 것이 우리 주위에서 늘 이루어진 일들이었읍니다.
본분에 충실하다는 것은 얼마만큼 행하는가하고는 또 조금 다릅니다.
다섯 탈란트를 받은 사람이 다섯탈란트를 더 만들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4탈란트만을 더 만든 채 두 탈란트를 받은 사람이 자신의 최선을 다 해서 두 탈란트를 더 만든 것을 보고" 나는네 탈란트나 만들었는데 저자는 기껏 수고해서 겨우 두 탈란트밖에 못만들어? 어휴 바보!"하며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조롱한다면, 그가 분명 두 탈란트를 더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충성을 다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실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또 한 탈란트밖에 더 만들 능력이 없으면서도 두탈란트를 만들겠다고 애를 쓰는 것도 본분에 충실한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가르켜 주신 주님의 말씀대로 항상 겸허한 마음으로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것이 본분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도서의 말씀처럼(9장 11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 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것처럼(고전9장 24절)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나 자신하고의 싸움이고 나 자신하고의 비교인 것입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누구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얼마전에 신문에서 읽은 글귀중에 이런 말이 이었읍니다.
불교의 잡아함경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던데
한 수도자가 눈병을 앓고 있었읍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연꽃의 향기를 맡으면 눈병이 낫는다고 말해 주었읍니다.
그래서 그는 눈병을 치료하고자 연꽃이 핀 연못가에 바람을 마주하고 앉아 꽃 향기를 맡고 있었읍니다.
그때 연못을 지키던 신이 나와
"너는 곷의 향기를 훔치는 도독놈이다"라며 심하게 힐난을 하였읍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려니까 한 건장한 남자가 와서 주위를 살필것도 없이 연못 속으로 저벅저벅 들어가더니 마구 연뿌리를 캐어 무겁게 지고 가는 것이었읍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연못의 신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연꽃의 향기를 맡았다는 이유로 도독놈소리를 들은 이 수도자가 억울한 생각이 들어 연못의 신에게 따졌읍니다.
"나는 연 뿌리를 캐지 않고 향기만 쏘였는데도 도독이라고 꾸짖더니 어째서 저 사람에게는 아무 소리도 않하는 겁니까?"
그랬더니 연못의 신이 대답하기를
"희고 개끗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조그마한 티끌이 묻어도 표가나지만 검고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먹물을 들어 부어도 표가 나지 않는 법이요"라고 대답하여 주었읍니다.
이것이 비록 불교의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힌 옷을 입고있는 사람들입니다.
입기를 끝낸 사람도 있는가하면 이제 막 입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주어진 본분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힌 옷에 묻은 티끌이 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검은 옷위에 부어진 먹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대학 입학시험을 대리로 쳐서 부정 합격시킨 일로 떠들썩하더군요.
부모는 부모대로 그 본분을 망각한 채 돈으로 자식의 장래를 사려 했고,
자식은 자식대로 그 본분을 망각한 채 부모에게 의존한 결과인것이 아니겠읍니까?
우리의 삶이란, 우리의 영원한 삶이란 누가 대신 살아주고, 누가 대신 행동해 주는 것이 아님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으로서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지만 과연 어떤 영생의 삶을 사는가는 전적으로 우리 각자 각자에게 달린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영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 해서 우리의 영생을 준비하고 있을 까요?
그 대답은 남이 인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가슴속에,
우리들의 믿음속에 있을 것이요,
그 믿음을 위해서 우리는 또 간절하게 예수님께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마저도 제대로 주체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맡은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항상 가억하며" 조금 더 할 수 있는 데 내가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아닌지, 혹은 분수보다 너무 많은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닌지 항상 자신을 성찰하는 속에 승리하는 생활을 하면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우리들의 죽음을, 아니 그 죽음 뒤에 있을 영생에서 함께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영락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겠읍니다.
우리 함께 각자각자가 다 자신을 되 돌아보며 개인기도의 시간을 갖기로 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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