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뛰어 내리더라06.09.09
(9월 9일 새벽기도회에서)
요;21: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지난 주간의 광야의 만나는 요한복음 의 마지막 장, 21장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며 묵상하는 시간들이었읍니다.
4복음서가 다 이 일들을 기록하고 있만 서로 조금씩 다르게 기록이 되어 졌읍니다.
마태복음에서는 28장 16절로 20절에 아주 간단하게 언급이 되었읍니다(마 28:16-19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에서는 엠마오로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16:12-13에 간단히 기록되었고, 누가복음에서는 이 엠마오로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좀 더 상세히 24:13-33에 이르도록 기록이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21장, 전장을 통해서 부활 후에 찿아 오신 예수님의 사건을 기록하며 우리들의 각성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3년간을 함께 다니며 그 가르치심을 듣고, 그 많은 이적들을 보면서도 제자들의 바램은 그 능력의 예수님과 함께 로마의 압제를 벗어나서 굶주림과 헐벗음이 없고, 억압과 압제가 없는 나라를 이루는 그 사역에서
왕되신 주님의 좌우에 앉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귀히 되어 존경받고 싶은 심정들이었읍니다.
그런데 그 바램이 무참히 깨어 졌읍니다.
동족인 대 제사장에게 끌려 다니다니며 수모를 받다가는 로마의 집정관에게 끌려가 결국은 죽고 말았읍니다.
3년간,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다니던 그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었지요.
그 동안 꿈 꾸어 오던 일들은 하나도 안 이루어진 채
모시던 주님은 죽으셨지요, 앞날에 대한 희망이 없어졌읍니다.
갈 길을 잃어버렸읍니다.
그래서 허탈한 마음에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생업에 종사를 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생업이라야 배운 재주가 고기 잡는 것 밖에 없으니 디베랴라고 불리우는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고기를 잡는 일 밖에는 할 수가 없었읍니다.
마음도 허전한데 밤을 새워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마저 잡히지가 않읍니다.
심신이 쇠약해졌고, 사는 일마저 힘들어 지쳐 있을 때 였읍니다.
자포자기의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그럴 때에 주님이 오시어서 말씀을 하셨지요.
”그물을 오른쪽에 던지라”고
어떤 일이 일어 났읍니까?
밤새 못잡던 고기가 그물에 가득 찼읍니다.
이 놀라운 일을 보고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먼저 주님이심을 알아보고 “주사라” 하니 베드로가 어떻게 하였읍니까?
오늘 읽은 본문 말씀대로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것 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렸읍니다.
베드로는 그 전에도 물 위로 걸어가다가 빠진 적이 있지요.
마태복음 14장28절로 30절에 보시면 물 위로 걸어 오시는 주님을 보고 물에 뛰어 들었다가 허우적거릴 때 주님이 와서 구해 준 경험이 있는 베드로였읍니다.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이런 경험이 있는 베드로가 왜 바다로 뛰어 들었을까요?
주님이라는 말을 듣고 부끄러워서 죽으려고 바다로 뛰어 들었을까요?
아님니다,
성경에는 물 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나아 갔다는 말은 없지만, 또한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말도 없읍니다.
그리고는 해변에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베드로의 모습이 쓰여 졌읍니다.
이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나아갔다는 말인 것입니다.
육지와의 거리가 50간이라고 하였읍니다.
원문에는 200페퀴스라고 쓰였다고 합니다.
이 거리는 요즈음 사용하는 단위로는 약 90 미터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거리를 걸어 나갔다는 말입니다.
어부니까 수영을 잘 할 것이고, 그래서 성미 급한 베드로가 헤염을 쳐서 주님에게 갔을 꺼라고들 많이 상상하며, 또 많은 성경에 붙어 있는 주석에 그리 쓰여 있읍니다.
그런데 헤염을 칠 사람이 겉옷을 두르고 물에 들어갑니까?
것옷을 걸쳤다가도 그것을 벗고 물에 들어가지, 수영을 할 사람이 벗었던 옷을 입고 물에 뛰어 드는 법은 없읍니다.
것 옷을 두르고… 한 이 대목 또한 베드로가 걸어서 주님께로 나아 갔다는 것을 뒷받침 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베드로의 마음을 잠시 묵상하여 보면 좋겠읍니다.
불 같이 성격이 급한 베드로,
그만큼 단순한 성격의 베드로가 아닌가 합니다.
그 동생 안드레가 주님을 소개하자 아무 의심 없이 금방 따라 나섰읍니다.
변화산에서는 그 곳에 초막을 짓고 살자고 할만큼 단순한 사람이요,
주님에게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을 고백하도록 믿음의 사람이었는가 하면,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는 칼을 빼어 종의 귀를 짜를 만큼 의협심이 강하기도 한 베드로였으나
자신이 위험에 처하였을 때에는 “나는 그를 모른다”며 세번씩이나 부인하다가 급기야는 저주까지 할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인 베드로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와 별 차이가 없겠지요.
그런 베드로가 주님이 죽은 후 고향에 돌아와 자신을 뒤 돌아볼 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렇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시던 주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하고는 새벽 닭이 울 때 땅을 치며 통곡하고, 후회하던 그 베드로,
허나 이제는 죽은 주님이시기에 찿아가 용서를 빌 수도 없게 되었기에
회한을 씹으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기나 잡으려 하였지만
그 고기마저 안잡혀 허탈에 빠져 있던 베드로에게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사랑하던 주님을 배신하고 한마디 변명도 할 겨를도 없이 고향으로 돌아 왔읍니다.
바라던 모든 희망을 다 잃어 버리고,
살아가기가 막막하도록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고기도 안잡히고,…..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바닥까지 내려온 베드로의 마음이었기에 “주님이시다” 할 때 의심이 스며들 여지가 없었는 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물 가득히 잡힌 고기를 보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던 주님이 생각키웠기에 더구나 “주님이시다.”할 때에 의심없이 믿을 수가 있었던 것 같읍니다.
그래서 의심과 두려움이 있었을 때엔 물에 빠져 살려 달라고 허우적 대던 그 베드로가 의심없이 물에 뛰어 들었을 때 물위를 걸어 주님께로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삶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손을 내미시는 주님에게 더 가까이 가기가 쉬운 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라면, 결국 주님에게 나가는 길목을 막아서는 것은 우리의 편함이요, 우리의 건강이요, 우리가 누리는 부가 된다는 말로도 상통되는 것 같읍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적은 믿음, 즉 의심과 욕심과 편함이 결국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다고도 할 수도 있겠지요.
믿음,
짧은 한마디 말이지만 이 믿음이 우리의 삶 전체에 미치는 힘은 그 어느 것 보다도 큰것 같읍니다.
그 믿음으로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영생의 구원을 얻는가 하면
그 믿음으로 불치의 질병에서 쾌유되기도 하고,
그 믿음으로 한숨짓는 괴로운 삶이 찬양하는 평안의 삶으로 바뀌는가 하면
그 믿음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모습들을 우린 많이 보고, 듣고,
또 나름대로 경험하여 왔던것입니다.
허나 그 배움과 경험도 막상 우리에게 새롭게 닥치는 시험에 직면하게 되면 그 믿음에는 어느새 의심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그 지식에는 의문이 생기는 것 또한 우리들이 매일 경험하는 삶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생기는 의심을 떨어버려 확신을 얻고,
우리의 흔들리는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이렇게 새벽을 깨우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의심이 있을 때 물에 빠져 허우적 되던 베드로가 아무 의심없이 주님을 믿을 때 일어난 일은 물위를 걸을 수 있었던 기적이 나타나게 되었고,
땅을 치며 후회하던 회한이 회개하고 나니까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부탁하시는 말씀까지도 들을 수 있게 되었읍니다.
이렇게 어려운 연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확실하게 되어지고
또 그 믿음이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새벽을 깨우며 교회에 나와 주님과 교제하는 교우 여러분들의 모습에는
베드로와 같이 후회할 일도 많고, 용서 받아야 할 일도 많은 채 막다른 길목에 처해 있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 속에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이미 체험하시고, 그 시험을 이기도록 도와주신 주님의 사랑이 고마워서 이 곤한 새벽을 깨우며 먼 길을 달려 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런 시험의 과정이 없이도 삶을 지켜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며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하여 새벽을 깨우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여러가지 모양으로 이 새벽에 주님을 만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주저함 없이 “예, 주님을 사랑 합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키우고,
우리의 마음을 순화시키며 우리의 행동을 정화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내 양을 먹이라” 하시겠지요.
양을 먹이는 일,
이는 주위의 아픈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 괴롭고 외로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도움의 손길을 펼 수 있는 일일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주위에 전파하는 일일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축복이 너무 크니까요.
그럴 때에 마태복음 28장에서 하신 말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 하신 그 말씀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읍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낙망과 좌절 속에 잠겨있던 제자들에게
새벽이 올 때 찿아 오신 주님이
오늘 아침 온누리 교회에 모여 기도하시는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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