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 나는 어떤 사람일까? 06.07.20
2006년 7월 19일 수요예배
누가복음 15장 4-7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것을 찿도록 찿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찿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찿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오늘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내용은 한마리의 길잃은 양과 이를 보는 우리들의 마음을 통해서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일까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역사에는 정사가 있고 야사가 있읍니다.
정사는 역사 학자들이 고증을 거쳐가며 기록 한 기록이고
야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에도 정경이 있고, 외경이 있고 위경이 있듯이 목사님을 통해서 정통적으로 해석 되는 설교말씀은 정설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오늘 처럼 저 같은 사람을 통해서 듣는 말씀이 야설이 되겠지요.
오늘 읽은 비유 말씀의 정경적 해석의 핵심적인 주제는 7절에 말씀하신바 대로
“하늘에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 보다 더하다”는 것입니다.
5절과 6절은 이 7절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필요한 비유였던 것입니다.
이 7절의 정경적 말씀 풀이는 목사님에게 마끼기로 하고
저는 오늘 저녁, 6절까지의 말씀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려고 합니다.
양은 어떤 동물일까요?
창세기 4장에 아벨은 양치는 사람이었다며 처음 등장합니다.
이것 보다 조금 더 일찍, 3장 21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하셨읍니다.
좋은 가죽옷의 대명사 하면 이태리제 양가죽을 떠 올리시지요?
아마 하나님께서도 에덴제 양가죽으로 아담과 이브를 치장해 주셨을 것 입니다.
이렇듯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몸의 방패막이가 되기도 하고, 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욕심과 결부 될 때에는 시기와 질투의 원인이 되어
형제간에 살인까지도 하게 만드는 그 양은 과연 어떤 동물일까요?
양의 특성은 겁이 많고 순하며 연약한 동물이기 때문에
항상 무리지어 살면서 목자의 보호를 받아야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살기 위해서 다른 동물을 잡아 먹어야 할 필요도 없는,
거저 무리지어 있으면서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초장에서 풀을 뜯고,
시내에서 물을 마시며, 털이 자라면 털을 깍이우고,
제사에 필요하면 제물이 되는 그런 순한 짐승인 것입니다.
그런데 양 한마리가 없어 졌읍니다.
성경에는 왜 잃어버렸다는 말씀이 없읍니다.
초장에서 초장으로 양무리가 이동할 때에는 잊어버릴 수가 없읍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항상 뒤에서 양들을 몰고 다니기 때문에
양의 움직임을 다 볼수 있기 때문이지요.
잃어버릴 수 있는 때는
목자가 나무그늘아래 쉬면서 양들을 마음껏 초장에서, 시냇가에서
놀고 먹게 할 때인것 같읍니다.
이제는 편안 한 곳에, 풍요로운 곳에 도착하였다고 목자가 방심 할 때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한마리의 양은 왜 그 무리를 이탈하였을까요?
목자가 못마땅해서 일까요?
그 무리중에 보기 싫은 양이 있기 때문일까요?
풀을 뜯다가 다른 양과 싸워서일까요?
자기를 좀 더 돋보이어 목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일까요?
다른 저 곳에는 더 풍요로운 초장이 있고,
더 시원한 시내가 있어서일까요?
늑대가 물고 달아 났을까요?
그도 아니라면 그 양에게는 그 무리를 떠나야 하는 운명,
즉 무리를 떠나야 하는 팔자때문 이었을까요?
아무턴 그 한마리의 양은 무리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갔고,
목자는 그 잃은 양을 위해서
아흔 아홉마리의 양들을 들에 둔 채 그 한마리를 찿아 나섰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아이러니가 생깁니다.
숫자적으로 볼 때, 한마리는 아흔 아홉마리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수입니다.
그런데도 목자는 아흔 아홉이라는 양들을 방치한 채로 한마리를 찿아 나섰던 것입니다.
다행이도, 정말로 다행이도 그 목자가 잃은 양을 찿아 왔을 때까지
남은 아흔 아홉마리의 양에게는 별 탈이 없었읍니다마는
만약 그때에 이리가 오거나 해서 많은 양들이 죽임을 당하였다던지,
아니면 목자를 잃은 양들이 초원으로 뿔뿔이 흩어 졌더라면 어쩔번
하였겠읍니까?
그런데 이 양들에게 더 기가 막힌 일이 생겼읍니다.
목자가 돌아와서 그 양을 찿음에 기뻐서 이웃을 불러서 함께 즐기자고 한
것입니다.
그 당시 풍습으로 보면, 함께 즐길 때엔 으레 포도주가 있었고, 양고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포도주야 어디서 사왔겠지만 양고기를 위해서는 그 양 중에 한마리를
잡지 않았겠읍니까?
잃었던 양을 찿음으로 해서 벌린 잔치이고보니
그 잃었던 양을 잡을리는 만무하고,
그 남아있었던 양 중에서 한마리를 잡았을 터인데,
인간적인 생각으로 추측을 하면
아마도 가장 나이가 들고, 이전 더 털도 잘 자라지 않고, 젖도 안나오는
양을 잡았을 것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이 양으로보면 억울하기가 그지 없겠지요.
평생을 목자의 말에 순종하며 무리를 이탈한 일도 없고,
털을 깍을 때면 말없이 털을 깍기우고, 젖이 필요하면 젖을 짜주면서
그렇게 순종을 하면서 살아온 한 평생인데
이제 그 못된 한마리 때문에 자신이 제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참 세상도 공평하지 못하지요?
목자를 원망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그렇게 죽어 갔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었읍니다.
하루는 이 예화를 딸 아이에게 말하면서
“너는 그 희생당하는 양이 어떻게 생각했겠느냐?”‚고 물어보았읍니다.
그런데 그 딸아이의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나왔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그 희생당하는 양이 되었을 때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갖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읍니다.
“무슨 이유였건 주님의 초장을 떠난 사람을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목자가 요구하는 목숨을 내 놓는 것이 믿는 사람의 본분이 아니겠느냐?”고 오하려 제게 반문을 합니다.
명색이 그래도 교회의 장로인데 생각하는 것이 딸아이만큼도 못하니 한대
얻어 맞은 것이지요.
지금부터 12~3년 전,
그러니까 우리 딸 아이가 아직 대학에 다닐 때에 있었던 대화 내용이었고
또 그 당시에 오늘 읽은 본문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읍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그가 행하는 행동은,
그 사람의 평소 생각을 나타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언행이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또 평소의 생각과 행동은 앞으로 올 영혼의 앞날을 가늠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들을 분류하여 평하기를 즐겨 합니다.
제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인간을 두가지 유형으로 분류를 하였었읍니다.
햄릿형과 동키호테 형으로 말입니다.
유명한 대사가 있지 않읍니까?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그 문제를 끌어 않고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 갑니다.
막상 무슨 일을 하기는 해야 되는 데 행동보다는 먼저 생각하는
심사숙고형이지요.
이런 햄릿형의 사람은 양이 없어 진 것을 알았을 때 이런 고민을 하겠지요.
”찿아 나설 것이냐? 아니면 말 것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얼마나 오래 고민 할지는 모르겠읍니다.
그러는 동안에 또 어떤 일이 벌어 질 지도 모르겠읍니다.
반면에 동퀴호테 형의 사람은 “어? 양이 없어졌어?”
두번 생각하지 않고 지팡이를 휘어 잡고 그 양을 찿아 뛰어 나갑니다.
나머지 양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저는 그 당시에는, 아무 준비 없이, 대책도 없이 많은 양을 남겨 두고 한마리 양을 찿아 나선 목자는 바로 이런 돈퀴호테 형의 인간이 아닌가고 생각 했었읍니다. 그러고는 “이러면 안되는 데… “하고 혼자 중얼거렸지요.
왜냐하면 저는 조금은 햄릿을 닮은 형이었거던요.
내 취향으로, 나의 생각으로 그 목자를 정의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로 세월이 40년 넘게 흘렀읍니다.
부모님의 어린 자식에서 성장하여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부모의 마음을 알게되었고,
이제는 그 자녀가 자녀를 낳아 할아버지가 되도록
세월에 부디끼며 살아 온 인생 여정이 있었읍니다.
그 여정동안 교회에 다닌답시며 깝죽거리기도 하였읍니다.
신실한 생활하고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면서도 혼자 자위하기는
콩나물시루에 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래도 콩나물은 자라듯이 뭔가 좀 자라겠지…
또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데 교회 문턱을 50년 넘게 넘나 들었으니 뭔가 조금은 알지 않겠느냐”고 자위하며 지내 온 세월들이 었읍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서 떠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읍니다마는 그동안 들은 풍월에 의하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인간을 대개 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놓게 됨을 알았읍니다.
그 첫째가 운명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일들을 팔자 소관으로 생각하며 체념속에 자기 행동을 합리화시키면서
더 이상 발전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읍니다.
잘 되어도 내 팔자요 못 되어도 내 팔자, 모든게 다 팔자 소관인 것입니다.
양이 한마리 그 무리를 이탈했지요?
그것도 역마살이 낀 그 양의 팔자소관이요,
양을 찿기 위해 남은 양들이 초장에 버려진 것도 다 남은 양들의
팔자소관이요,
99마리라는 많은 양을 방치 한 채로 하나를 찿아 나서는 목자도 그 팔자 때문이며, 돌아와서 기뻐 벌리는 그 잔치를 위해서 잡히는 양도 또한 팔자소관인, 모든 것이 다 팔자, 팔자, 팔자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소망이 없읍니다. 사랑과 관심이 없읍니다.
모두가 다 자기가 타고난 팔자 때문인데 관심을 갖인들 뭐하겠읍니까?
무기력 속에 무책임하여지면서 요행을 바라는, 그러면서 자신의 팔자를 쉽게 바꾸어보려 노력하며 점장이 집도 찿아 다니고,
심지어는 교회마저 자기의 팔자를 예수 이름으로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막연한 욕심 속에 극단적인 이기심이 생기게하는 그런 사고방식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렇게 운명에게 모든 것을 마낀 채
체념하는 습성이 어느 정도는 있는가봅니다.
두번째로는 율법주의적인 사람이 있읍니다.
모든 행동을 자기가 알고 있는 규범에 마추어 행하고,
그 규범에서 벗어나면 서슴없이 돌을 던지는,
그래서 규범의 속박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양이 무리를 이탈 했읍니다.
“왜 이탈해? 너는 여기 있어야 할 양이 무리를 이탈했으니 그건 너의
잘못이야. 고생해도 싸. 암 당연히 고생 해야 하고말고.”
목자가 양을 찿아 나섭니다.
“ 너 목자 틀렸어. 그래 그 한마리 때문에 아흔 아홉을 놔 두고 찿아 나서?
그런 경우가 어디 있어? 그 하나가 아흔 아홉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야?”
목자를 나무랍니다.
잔치의 제물이 된 양도 한마디 합니다.
“내가 비록 이젠 늙어 젖도 안나오고, 깍을 털도 별로 없지만 난 한평생을
목자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그래 그 못된 한마리 때문에 나를 잡는단
말이예요? 세상에 그런 법도 있는 거예요?”
어째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나오느 형의 푸념 비슷하지요?
틀린 말들이 아님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들입니다. 허지만 여기에는 사랑이 없읍니다.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모든 규범이
결국은 자기 자신도 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깨닿지 못한
근시안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고, 서기관들이 그랬으며,욥을 위로하러 찿아 온 친구들도
그랬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먹지 말라”는 한 조항 밖에는 법을 만들지 않으셨읍니다.그러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살아가니까 이 법을 열개로 늘리어 십계명을 주셨읍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서로가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 편하게 살기 위해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자잘하게 보완이 필요하게 되었읍니다. 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율법이 생기고,규범이 생기다보니 천지 사방에 법 천지입니다.
그렇다고 그 법이 완전 합니까?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연극에서 계약서에 서명한 대로 한 파운드의 가슴살을 띠어 내겠다는 샤일록이나
계약서 대로 살은 떼어 내되 한방울의 피도 흘리면 안된다는 판결을 내린 포시아나 다 완전하지 못한 법 때문에 얽힌 이야기가 아닙니까?
공평하게 만들어 놓은 법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더 속박을 받게되는 것이지요.
항상 법에 매달려 누가 위법을 하지 않나 살피고,
내가 행한 위법을 누가 보지나 않았는가 두리번 거리노라니 안정이 없는
삶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는 누구도 그 모든 율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 질 수는
없으니까요.
화평이 없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행복이 없읍니다. 평안도, 사랑도 없읍니다.
그러니 구원에 대한 소망 또한 있을 수가 없겠지요.
오늘을 사는 저나 여러분도
이런 생각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세번째 종류의 사람은 은혜를 알고 그 은혜 속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감사할 조건이 됩니다.
양이 무리를 떠난 것도 그 양으로 하여금 목자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 무리속에 있는 것이 얼마나 편안한 것인지를 느끼게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요, 아흔 아홉은 놔두고 하나를 찿아 나서는 목자의 경우도
그 하나의 영혼을 위해서 큰 희생도 감내하겠다는 목자의 사랑을 보여 주는 하나님의 은혜요, 잔치를 위해서 죽게된 양도
이젠 별 쓸모도 없는 나를 그런 즐거운 일에 사용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는
감사의 마음을 갖이는 이런 감사의 생활이 은혜의 생활인 것입니다.
은혜 속에 감사의 생활을 할 때엔 법이 필요가 없어요,
팔자를 논할 필요도 없읍니다.
왜?
모든 것이 다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런 은혜스러운 마음이 그냥 주어집니까?
우리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많은 은혜중에서
그 것이 나를 위한 은혜라고 믿고 깨닿게 되기 위해서는
묘하게도 또 하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은혜가 없으면 은혜를 깨닿지 못하는 그런 아이러니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란 무엇일까요?
은혜란 선물입니다. 뇌물이 아닌 선물인 것입니다.
선물이 무었입니까?
조건 없이 주는 것이 선물입니다.
조건이 있을 때에는 그건 벌써 선물이 아니고 뇌물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그러면 이렇게 조건도 없이 선물로 주시는 은혜를 어떻게 받을 수가
있겠읍니까?
돈을 주고 사겠읍니까?
사도행전 8장 18절을 보십시요.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하니 베드로가 무어라고 하였읍니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호통을 치지 않았읍니까?
이렇게 은혜란 돈으로 살 수도 없읍니다.
그렇다고 행위로 얻겠읍니까?
계속해서 예베소서 2장 9절에 보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이렇게 행위로도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은혜를 받는 오직 한 방법은 요한 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대로
지금도 문밖에 서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입니다.
문을 여는 일이란 다름 아니라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줄기에 꼭 붙어 있는 새 가지가 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묵상하며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에 들어와 더불어 먹고
우리는 또 예수님과 더불어 그 말씀을 먹으며 사는 은혜의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아세요?
이 세가지 마음이 다 우리 안에 있다는 걸 아세요?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우리 모두는 다 이 세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읍니다.
어느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운명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고, 율법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은혜로 사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삶을 살다 보면 견디기 힘든 일을 당할 때가 많읍니다.
요즈음 같이 경제사정이 나쁠 때엔 정말로 하루 하루가 힘들 것입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할 수가
있읍니다.
육신이 원인 모를 질병으로 시름 시름 앓아가고 있읍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뜻대로 자라지를 않고 탈선을 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부인의 속을 썩이고,
부인은 부인대로 남편의 심기를 돋구어 놓읍니다.
극도로 긴장되어 정신 분열의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에 운명을 탓하며, 좌절속에 절망하고 있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가련하지 않겠읍니까?
이 모든 것이 나의 죄 탓이라며 자기 학대를 하고
자신을 원망하며 저주하는 율법적인 삶 역시 우리에게 어떤 대안을 제시해
주지를 못합니다.
너무나 허망하지 않읍니까?
이럴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읍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과
모든 것이 다 팔자소관이라는 생각사이에 무슨 다른 점이 있읍니까?
단지 팔자소관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놓은 것 외에는
아무 다른 점이 없읍니다.
중동을 다녀 오신 분들이 많이 말씀하시지요,
“인솰라”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란 소리지요.
내일 만나자 해도 인솰라, 이 계약을 이행하시겠읍니까? 해도 “인솰라’
젊은 이들이 서로 사랑을 하면서도 흔히 확인 하기 위해서 물어버지 않아요?
“나를 사랑해?” 하고 말이예요. 그래도 인솰라.
모든게 “인솰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으로 이루어 집니다.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 뜻 대로 되는게 뭐 얼마나 있읍니까?
우리에게는 뜻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연단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것이 단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이 어려움을 통해서 나에게 나타 내시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 노력의 과정이 끊임없는 기도와 간구요,
찬양과 말씀을 읽는 중에 묵상이며 나를 통해 나타나는 결실일 것입니다.
이 과정이 빠지면 우리는 결국 팔자라는 단어를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말하는 운명론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거저 “인솰라!” 하고 마시겠어요?
고린도 전서 10장 13절을 한번 보십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하심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
하셨읍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은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연단이니
이 연단을 인내로 이겨 나가면 소망을 이루는 것이기에
오히려 환난중에 즐거워 하는마음, 어려움 중에 감사하는 생활,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준비가 이루어 지면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요
이 때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면
주님께서 들어 오시어 우리와 함께 더불어 먹고 더불어 거하실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말씀하셨읍니다.(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결국은 주님의 줄기에 붙어있기만 한 채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를 기다리기만 하기 보다는
나를 얽매고 있는 굳은 가지를 짤라내며 새 순을 돋아
탐스런 포도송가 열리도록
의심없는 믿음을 가지고 이 모든 어려움은 분명히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연단이라는 믿음 속에 소망으로 하루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삶이 힘드심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에 좌절하고 계십니까?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십니까?
육신이 질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읍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사람들을 연단시킨 후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훈련을 통해서 강한 군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요?
이 훈련을 통한 주님의 사역은 오늘까지도 우리를 통해서 이어지고 있는 사역임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온누리 교우 여러분,
우리 함께 운명을 탓하며 자포자기하는 생활을 하기보다는
율법에 얽매여 스스로가 목을 죄는 삶을 살기 보다는
비록 지금은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다 하더라도
인내로 이기어 소망속에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지 않으시렵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먼 후일 주님의 품에서 영생을 하며 영락을 누릴수
있는 온누리 교우들이되기를 진심으로 바람니다.
함께 기도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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