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의 조건06.07.13
2006년 7월 12일 수요예배에서 나눈 이야기 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5장 1:8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오늘 저녁은 여러분들, 컵 라면으로 허기를 메우셔야 할것 같읍니다.
목사님께서 한국방문중이시기에 지난주의 방 장로님에 이어 제가 오늘과 다음 주일을 맡고, 김무광장로님이 남은 두주를 맞게 되었읍니다.
부족한 저를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들어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결실의 조건이 무엇일까 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우리 모두가 다 너무나도 잘 아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도 없이 여러번 이 본문으로 주시는 말씀을 들었읍니다.
그럴 때마다 제게는 한가지 의문이 있었읍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포도나무로 비유를 하셨을까?
포도보다는 오히려 주식으로 더 많이 쓰이는 오리브나무나, 사방에 지천으로 깔린 무화과 나무를 예로 들 수도 있었겠는데 왜 하필이면 포도나무였을까요?
처음으로 이루신 이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이기 때문일가요?
마지막 성 만찬 때 포도주를 나누시며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시며 기억하라셨듯이 그 포도주가 상징하는 의미가 깊어서일까요?
포도 재배와 포도주에 관한 기록은 창세기 9:20-21에 처음 나오기 시작 합니다.
노아 할아버지가, 이러니까 마치 노아의 할아버지인 강집사님을 지칭하는 것 같은 데, 강집사님이 아니고 방주에서 나온 할아버지 노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 노아가 처음 소산인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곤 그 맛에 빠져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취하지 않았어요?
그 취한 모습을 본 두째 아들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에 나가 형과 동생에게 고하니 셈과 야벳은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가려 주었기에 술이 깬 후 그 일을 안 노아가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였지요. 그의 저주 대로 그네들의 후예들이 출애급 때서부터 지금까지 중동지방에서 서로 싸우고 있읍니다.
포도주로 시작된 비극이지요.
이렇듯 조금 지나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비극의 시작이 되었던 포도주는 우리 인간들하고는 꽤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것 같읍니다.
이집트에서는 3000년 전 부터 포도주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고대 중동지방의 가나안과 시리아에는 물보다도 포도주가 더 풍성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까요.
실제로 민수기 13:23에 보면 모세가 가나안으로 보낸 정찰대가 돌아오면서 포도송이 하나 달린 가지를 두 사람이 작대기에 꿰어 둘러메고 온 일이 기록되어 있지요.
이 일이 결국은 광야 40년 고생의 시작이 되기도 하였으니
우리가 아는 성경에서의 포도는 결국 비극의 시작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포도밭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상징으로도 많이 쓰였던 것 같읍니다.
이사야서 5장 1~2절에는 포도밭의 노래가 나옵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아름답게 가꾸시었으나 우리가 악한 열매 밖에는 맺지 못하자 그 후에 올 징계, 어려움을 노래한 구절이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도 구약성서의 이러한 전통을 이어 받아
복음 선포의 핵심인 하늘나라를 설명하시는 비유에 포도밭을 이용하신지도 모르겠읍니다. (마20:1-6, 21:33-44 막 12-1-12 눅 20-9-19)
이렇듯 우리 인간과 오랜 역사동안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그로 인해 즐거워하기도 하고, 취하여 망신을 당하기도 하며면서도 사랑하여 온 포도주, 그 포도나무에 대해서 조금 알아 보았읍니다.
저는 거저 붉은 포도, 청 포도나 있는 줄 알았는데 그 가지수가 600여가지가 되더군요.
재배하는 지역에 따라서, 또 교접시킨 방법에 따라서 이름이 붙여지고 그 지방에서 생산 된 포도주에는 대체로 그 지방의 이름을 붙이더군요. 여러분들도 가끔 포도주를 사러 가셔서는 너무나도 많은 종류라 무엇을 살까 어리둥절하지요?
흔히 맛 있는 포도주라며 선호하는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이라던지, 샤도네(Chardonnay) 같은 것은 품종 이름을 딴 포도주 종류이? 축하 할 때 터뜨리는 것으로 유명한 샴페인은 불란서 삼페인 지방의 이름을 딴 발포성 포도주인 것입니다.
얼나 전에는 타이타닉호와 함께 수장되어 있던 포도주가 건져저서 엄청난 금액에 팔렸읍니다.
이렇게 가지수가 많은것 만큼 포도주의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라 불과 5~6불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몇 천불, 심지에는 몇 만불을 호가하는 포도주도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 모두가 다 우리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그 포도나무에서 나온 열매로 만든 술입니다.
술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나요?
앞에서 포도에는 약 600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였지요?
어떤 포도 종류는 뿌리는 강한데 줄기가 약하다고 합니다.
어떤 종류는 뿌리는 약해도 그 과일이 무척 달다고 합니다.
이런 두 종류를 합해서, 즉 뿌리가 튼튼한 포도나무에 과일이 단 포도 줄기를 접 붙이면 뿌리도 튼튼하고 열매도 단 포도를 얻을 수가 있읍니다.
이것은 비단 포도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과일나무가 다 그런것 같읍니다.
그러니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나무의 튼튼한 뿌리에다가 열매를 맻을 수 있는 포도나무의 줄기를 접붙여서 튼튼한 지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주에서 새 가지가 나오고, 그 가지에서 탐스러운 포도를 수확하는 것이지요.
포도의 씨에서 직접 자란 줄기에서는 실한 열매를 얻지를 못합니다.
이렇듯 포도 재배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농사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포도는 일년 묵은 가지에서는 안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얼마전 저의 집사람과 함께 다녀온 유럽 여행이 제게는 많은 일깨움을 주었읍니다.
버스로 독일, 스위스 이태리를 거쳐 불란서에 올 때까지 그 길 양옆에는 항상 포도밭이 있었읍니다.
라인강변의 산 비탈에도 포도밭이요,이태리의 구릉도, 불란서의 평원도 포도밭, 온통 포도밭 일색이었읍니다.
그런데 그 많은 포도밭이 다 키가 약 1m정도 되는 줄기, 즉 지주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읍니다.
그 때가 이른 봄이었기에 그 줄기에서 새 순이 돋아나라고 농부들이 묵은 가지를 다 쳐 내었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은 적당한 간격으로 땅에 심겨져 약 1m가랑 자란 줄기외엔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포도밭을 보며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를 생각하다가 문득 이래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같은 가지에서 매년 자라는 올리브나 무화과 보다는 매년 새로 나오는 가지에서만 결실을 맺는 포도 나무로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어떨까요.
저희를 통해서 아름다운 구원의 열매를 맻히려고 예수님이 오셨읍니다. 스스로 낯아 지시며 고난을 당하심은 마치 뿌리가 땅 속에서 묵묵히 어둠을 이겨 나가는 것 같읍니다.
부활 후 성령으로 오시어서 지주로 자라 나셨읍니다.
허나 지주 된 줄기 만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구세주로 모시며 살겠노라고하며 예수님의 그 줄기에 붙어서 열매를 맺읍니다.
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 육을 입은 인간은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나의 안위를 위하여 거짓된 행실을 하게 되고,
나의 마음 속에 이는 욕심을 충족키 위해
미움과 시기와 질투의 싹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게 됩니다.
항상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가 무척 힘들다는 이야기이지요.
가지가 굳어지기 시작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지는 더 굵어지며 그 각질 또한 두터워 져
제법 보기에는 견실한 가지요, 또 예수님의 줄기에 붙어 있는 살아 있는 가지 같지만 이 가지는 더이상 필요한 포도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가지가 되고 말았읍니다.
포도는 묵은 가지에서 열리지를 않으니까요.
본문으로 다시 잠시 돌아가 보겠읍니다.
1절에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하셨읍니다.
농부의 바램은 무었일까요?
풍성한 수확 아니예요?
수확을 바라지 않고 농사 짓는 사람 보셨어요?
농부의 바람은 풍성한 수확이기에 농부인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바램 또한 우리를 통한 풍성한 수확일 것입니다.
그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묵은 가지,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를 과감히 짤라 버리고 새 순이 나오게 하여야 겠지요.
왜 교회에 나오지요?
영생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아니예요?
거저 심심해서 재미로 나오시나요? 아니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보시기에 기뻐할 결실을 얻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굳어진 가지를 짤라 버려야 되겠지요.
굳어진 가지는 무었일까요?
나의 욕심과 아집과 불순종, 불성실한 마음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짤라 내야 한다는 말씀인것 같읍니다.
이 것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 한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인것 같읍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탄식하다가는 고린도 전서 15장 3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 하였읍니다.
예수님의 줄기에 붙어만 있어 가지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매일 매일 나의 굳어진 가지를 짤라 버리는 노력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 순으로 나와야 합니다.
거듭나야 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뭐라고 하셨읍니까?
거듭나지 안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다고 하시니까 니고데모의 답변은 무엇이었읍니까?
어머니의 뱃속에 다시 들어 갔다 나오는 거냐고 물었지요?
아마도 니고데모는 농사를 지어 보지 못한 학자이기에 그 생각으로 거듭나는 것은 생물학 적으로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 갔다가 나오는 것으로만 해석을 한 것 같읍니다. 자신의 지식과 자신의 경험으로 그 말씀을 이해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럼 새로워 지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무엇일까요?
본문으로 다시 돌아 갑니다.
2절에 기록되기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고 하셨읍니다.
과일을 맺지 않는 묵은 가지를 짤라 버리고, 열매 맻는 가지는 더 깨끗케 하신다고 하셨읍니다.
그런데 고마웁게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보혈의 피로 깨끗케 하여 주시었읍니다.
3절에서 말씀하셨쟎아요? “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하셨읍니다. 깨끗해 졌다고 하셨어요.
그 말씀으로 우리의 죄를 일단은 사하여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조건이 있습니다.
결실을 위한 조건이지요.
4절에 말씀하시기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아무리 새로 돋아나는 가지라 하더라도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봄에 뒷마당에 있는 사과 나무에 꽃이 아름답게 피었읍니다.
긴 겨울 동안 삭막해진 집안 분위기를 바꾸려고 그 화사한 가지를 꺽어 물병에 담아 부억 식탁위에 놓아 둡니다.
며칠은 화사하게 아름답지요.
그런데 우리가 거기서 열매를 얻기를 바랍니까?
사람인 우리도 꺽어진 가지, 줄기에서 떨어진 가지에서는 과일을 얻을 생각을 안 하지요.
과일은 줄기에 견실히 붙어 있는 가지에서만 열리는 것을 우린 다 알고 있읍니다.
이것을 5절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여 말씀하십니다.”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결국 예수님과 공거 동락하지 않으면,
우리가 예수님안에 들어가고, 예수님이 우리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지의 운명은 6절에서 말하여 주시지요.
결국은 말리워져 불 타 버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포도나무 비유의 크라이막스는 바로 7절에 있는 것 같읍니다.
함께 읽어 보지요.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하셨읍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더불아 살아가며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하셨듯이 그 말씀인 성경을 읽으며 묵상하고 그 말씀에 따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님께 매어 달리면 그 때 우리의 기도가, 간구가 이루어 진다는 말씀이신것 같읍니다.
우리가 멋 대로 생활하면서 드리는 간구의 기도가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될 때 그 기도가 이루어 진다는 것이지요.
크라이막스를 지나 이제 결론 부분에 도달합니다.
8절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이 모든 것이 이루어 져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 누가 제일 기뻐하겠읍니까?
힘들여 농사를 지은 농부지요.
1절에 뭐라 하셨지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며 그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가르치시고 있읍니다.
이렇게 1절에서 8절로 짧은 글귀지만 그 속에 기승전결이 다 이루어 지도록 간략하지만 심오한 뜻이 있는 비유를 우리에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상식과 경험으로 모든 일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려 합니다.
또 사실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할 수가 있겠읍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만큼은 알지 알지 않아요?
나무도 눈 바로 위를 짤라주면 가지가 두개로 불어나고,
포도는 새로 난 줄기에서만 열매를 맺는다고...
이렇게 안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행동으로 옮겨야지요.
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용기가 더 큰 결실을 준다는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그대로 못하는 이유가 무었일까요?
그건 나를 움직이는 마음이 내 속에 있지만 내가 그 마음을 내 마음 먹은 대로 할 수가 없다는데에 있는 것 같읍니다.
물론 안 그런 분들도 계십니다마는 대부분의 경우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릴 수가 없어요.
여러 인생의 선배님들, 한번 곰곰히 생각 해 보세요.
지나온 한 평생,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린 적이 얼마나 있는지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린 어쩔수 없이 넘어지고, 좌절하고, 그리고 유혹에 따라 구습을 행하게 되어 있읍니다.
여기서 벗어 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의 힘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4절에서 말씀하신 것 처럼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말이예요.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그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할 수 있게 마음을 비우는 일일 것입니다.
허나 그 마음을 비우는 일 조차 나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절대로 되는 일이 아님니다.
값없이 은혜로 오는 그 성령님의 도움이 있을 때에야 비로서
나의 자아를 죽이고, 나의 욕심을 죽이고 나의 교만을 죽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줄기가 되신 예수님에게 잘 붙어서 탐스러운 열매를 맺어야지요. 우리를 통해 농사를 짓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려야 우리의 간구가 이루어 진다고 하셨으니까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제아무리 믿음이 많으면, 학식이 많으면, 경험이 많으면 무얼 합니까?
유용하게 필요할 때 써야지요.
사용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적재 적소에 맞게 나의 모든 능력과 재능을 다해 성심껏 봉사한다는 말이 되겠지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 그리고 묵은 가지가 아니라 새로운 가지가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어야 하듯이 먼저 죽어야 영생을 얻는 아이러니가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니 참 믿는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지금 한 여름입니다.
뒷뜰 터밭에서는 모든 채소들이 자라고, 화단에는 꽃이 만발하고, 나무에서는 과일들이 자라고 있읍니다.
그런데 여러분, 꽃이 더 잘 자랍니까? 아니면 잡풀이 더 잘 자랍니까?
채소가 더 잘 자랍니까? 아니면 잡풀이 더 잘 자랍니까?
우리가 보고 즐기기 위해서 심은 꽃보다, 또 맛있게 먹기 위해서 심은 채소보다도 잡풀이 더 잘 자랍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하지요? 그 꽃을 보고 즐기기 위해서, 또 그 채소를 거두어 맛있게 먹기 위해서 그 잡풀을 방치하는 게 아니라 김을 매 주지 않읍니까?
김을 매 보신 분들은 알거예요.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주저 않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하며 잡풀을 뽑노라면 얼마나 허리가 아픔니까?
저희 집 뒷마당에도 손바닥 만 한 터밭이 있읍니다.
토마토와 고추, 상추, 깨 같은 것들을 심어 두었지요.
그런데 그나마도 가끔 김을 매 주어야 하고, 상추 잎을 따려 해도 꾸부려야 하고, 깻잎을 따려 해도 허리를 꾸부려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집사람이 “아이구 허리야” 하며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
저는 “아니 아플 허이가 어디 있기나 해?” 하며 농을 하여 부아를 돋우어 놓기도 합니다마는, 아무리 배에 살아 쪄서 허리가 없다 하더러도 그런 분들이 쭈그리고 앉아 일을 하면 허리가 더 아픈 법이지요.
이렇듯 뒷 뜰에 있는 조그마한 밭에서도 나름대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김을 매 줘야 하는 데 하물며 우리 인생을 풍성하게 수확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고는 허리 아픈 수고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요.
정리를 하지요.
열매를 맺으려면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붙어 있어야 할 뿐만이 아니라 매년 새로운 가지로 나야 합니다.
그리고는 잡풀이 기승을 부리지 못하게 김을 매 주어야 합니다.
내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수님의 줄기에 붙어 있으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 하여도 내 마음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연약한 우리라는 걸 깨달은 이상 내 힘으로 내 의지로 거듭나려 노력하고, 잡풀을 뽑으려는 헛된 수고를 하기 보다는 그 모든 노력을 그 줄기에 꼭 붙어 있으려는 데 기울이며, 항상 위의 것을 바라 보면, 이 모든 열매는 저절로 맺히게 될 것이며 인간의 죄성으로 생기는 잡풀들은 점차로 우리에게서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묵은 가지를 짤라내는 것은 농부의 일이라고 하셨듯이이 모든 것은 내게 힘 주시는 이 안에서 이루어 질 것이니까요
그러므로,한번 세례를 받았다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탄식처럼 매일 매일 주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선입관을 주는 모든 묵은가지를 다 잘라내고,
나를 얽매고 있는 아집과 모든 죄된 마음을 다 벗어 버리고
이사야가 노래 한 대로
극상품 포도 열매가 열리는 그 포도원 안에 망대를 세우고
우리를 틈타는 모든 유혹을 성령의 도움으로 물리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포도의 소산이 되어 아름다운 포도주, 예수님의 피로 변화 받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포도나무 주인이시고
예수님은 포도나무 이시고
우린 그 안에서 매년 새롭게 태어나는 가지,
그래서 탐스런 열매를 맻어야 할 책임이 있는 가지이니까요.
이 성숙의 계절에
우리 모두 뜨거운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위의 것을 바라보며
탐스럽게 결실하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주님의 가지에 굳게 붙은 새로운 가지가 되어지기를 기도 드리며 말씀을 마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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