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장사 루디아. 여자 그리고 봉사05.10.15
(2005년 10월 구역예배)
오늘 우리들이 함께 이야기 나눌 주제는 자주장사 루디아라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집사님도 임명이 되었고, 내일이면 또 앞으로 6년간 시무할 장로님도 뽑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직분 들인데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봉사를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인가를 다시 한번 고찰 해 보고자 하는 의미에서 루디아라는 자주장사가 이번 달 구역 예배의 주제가 된 것 같습니다.
우선 루디아에 대해서, 또 자주장사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먼저 고찰하여보고 다음에 그 여인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여보기로 하지요.
먼저 자주색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누어 볼까요?
자주색은 여러분들이 다 잘 알고 있는 색갈이지요.
빨간 색에 파란 색이 적당히 가미되어 짙은 남빛에 붉은 빛을 띤 색을 나타나는 색 말입니다.
그런데 자주색 하면 무엇이 연상됩니까?
주일날마다 교회에 앉아서 앞을 보면 십자가 뒤에 쳐진 휘장, 자주색이지요.
자주색은 옛날부터 고귀한색으로 알려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색깔을 만들기가 엄청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오늘날과 같이 화학이 발달되지 않은 그 옛날에는 자연에서 그 색을 채취해야만 했었는데 그 채취 원은 아프리카, 소아시아, 베니게(페니키아)의 연안에서 채집된 아름다운 악귀패(뿔고동)의 목구멍에 있는 특별한 선(腺)에서 채집한 염료였던 것입니다.
두로 사람은 이 염료의 기술에 뛰어나,(두로 자색)은 가장 유명했습니다.
최근 행해진 실험에서는 1,200개의 뿔 고동에서 겨우 1.5g의 색소를 얻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계산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의 화폐를 오늘날 화폐로 환산한다면 1g이 약 $15 내지는 $20에 해당되는 아주 고가였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이 염료로 염색된 의복은 왕족, 귀족, 고관이 착용했고 따라서 자주색은 왕실, 권력, 부유의 색으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귀한 것은 비싼지, 아니면 비싸기 때문에 귀한지 하여 턴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자색 실은 성막의 휘장(출 25:4,26:1 기타), 솔로몬 성전의 휘장(대하 2:14, 3:14)등을 짜는데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귀하고 비싼 염료 장사를 하던 루디아는 과연 어떤 여자였을까요?.
자주장사 루디아 하면 성경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구라파에 있어서 바울 초기의 개종자의 한 사람인데, 루디아 지방의 두아디라 성 출신의 자주(紫紬)장사 여인이다. 루디아가 그녀의 이름의 유래였는지 어떤지는 분명치 않다.
그것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루디아의 여인'이란 뜻의 말이었다고도 생각된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루디아의 이름을 한 번도 기록하지 않은 사실은 사람으로서의 형용사이지 개종자 개인의 이름이 아닌 것처럼 생각이 든다.
(루디)만이 고유명사로서 발견된다 따라서 루디아를, 바울이 빌립보서 4:3에서 "복음에 힘쓰던 동역자"라 말하고 있는 부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루디아는 자주빛 염료(染料)의 제조자로서 유명하였는데, 여하튼 루디아는 자주 장사로서 빌립보에 와 있었다.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하였다고 했으나, 그녀가 아직 예수가 메시야인 줄은 몰랐으면서도, 일찍이 유대인의 감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가 이제 바울로 부터 복음의 전도를 받으니 주께서 그 마음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그녀는 마게도냐와 유럽에 있어서 최초의 회심자가 되었다. 이 여인을 교량으로 삼아 교회는 서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족과 더불어 다 세례를 받고 그 일행을 자기 집에 유숙하라고 강권하여 머물게 했다. 이렇게 하여 그녀의 집은 빌립보에서 첫번째 교회가 되었다(행 16:12- 15).
이런 설명에 의하면 루디아가 한 여인의 이름인지 아니면 그 지방에서 상류사회를 상대로 장사를 하던 유지로서, 바울의 사역을 도와주던 묘령의 여인이었던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 턴 오늘에 와서는 루디아 하면 마게도냐와 유럽에 있어서 최초로 회심한 여인의 이름으로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루디아라는 이름의 배경이고 이제 여자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에서 여자의 역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의 시대를 먼저 살펴 보지요.
제게는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 의문이라는 것이 무슨 영적이며 대단한 가치가 있는 의문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아마 여러분들이 들으신 후엔 픽 하고 웃어버리고 말 그런 시시하면서도 지극히 일상적인 의문인 것입니다.
의문이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이 3이란 세월을 12제자를 데리고 사역을 하실 때 어떻게 의식주를 해결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단호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입니다.
가정과, 재산과 심지어 부모마저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종용하셨던 것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12명의 제자에 예수님을 합하여 13명의 결코 적지 않은 수가 함께 다녔으니
이들의 식생활, 주거 생활, 의복문제,
이 모두가 다 간단한 일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가정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니
이들이 필요에 따라서 집에서 음식을 갖여 오거나
필요한 돈을 가져 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유대지방은 춥지가 않은데다가
그들의 의복이라는 것이 아이들이 연극할 때 입는 의상처럼
이불 호청을 어깨에서부터 늘어뜨린 후
허리에 띠만 매면 해결이 되는 간단한 것이고 보면
주거와 의복문제는 그런대로 해결이 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하루 세끼 먹어야 하는 음식 문제만큼은 결코 간단히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 키웠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께서 매 식사마다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하여턴 이건 꽤나 궁금한 의문이었읍니다.
밀밭 사이로 가시다가 밀을 까불어 먹은 제자들의 이야기나,
열매를 얻으려다 얻지 못하여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기록을 보면
분명 매 끼마다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가나의 잔치에 참여하신 모습, 세리 마태와 함께 식사하신 모습이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모습,
마르다의 집에서, 또 유월절 만찬 때처럼 여기 저기서 식사를 하셨지만
그 나머지 그 많은 기록되지 않은 식사 말입니다.
그 당시엔 요즈음처럼 말씀 후에 헌금도 없었고,
또 예수님이 병을 고쳐준 대부분의 환자들이 다 가난한 사람들이었기에
무슨 큰 감사헌금을 기대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탱하실 수 있었던 것은 누가복음 8장 3절에 나와 있는 것 처럼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숨어서 봉사하고 희생하는 여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자, 우리 인류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자, 이렇게 많은 여자들인데 한 평생을 여자와 살아 온 여기 앉아 계신 남성님네들 부인들을 다 잘 이해를 하십니까?
남자들은 그 여자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여자를 칭찬하던 아담도 그 후에는 아무 소리 없다가 “여자, 그가 먹으라고…” 한 후에는 여자에 대한 아무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여자들은 그때부터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지요?
이건 농담이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첫 이적을 행하시도록 종용한 것도 어머니인 마리아, 여인이었으며,
최초로 예수님을 증거하며 외친 사람도 우물가의 여인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후
모든 제자들이 다 각기 자기들이 속했던 곳으로 돌아 갔건만
유독 이 여인들만이 끝까지 예수님을 위해 향유를 가지고 무덤을 찾고,
그래서 부활의 영광의 첫 증인이 되었으며
또 이 부활의 기쁨을 처음으로 전파한 것도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렇듯 기독교의 발생과 전파와 발전에서 여성들이
실로 지대한 공로를 세웠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성들의 봉사가 예수님 때에도 컸고,예수님 이후 바울을 도와 준 루디아가 에베소에서 서양 최초의 교회의 기초를 세웠던 것 처럼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여성들의 역할이 실로 큽니다.
한마디로 여자가 없으면 교회가 운영이 되지를 않습니다.
요즈음은 저희 교회에서 남,여 선교회를 합해서 해, 달, 별, 하늘선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그 각 선교회가 활동하는 주축은 여선교회를 이루었던 여성들임을 우리 모두가 다 잘 알지 않습니까?
여자들이 교회에서 참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 일들의 성향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비유에서 잘 나타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마리아 처럼 말씀을 듣는 여성들과 마르다처럼 팔 걷어 부치고 부엌에서, 또 교회의 구석 구석에서 일 하시는 여성들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 습관인지 관습인지는 모르겠읍니다마는 우리 주변에서 보면 여성들이 부엌 일을 참 많이 하시지요.
그런데 그 많은 일을 하시는 여성들에게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에서
항상 마리아만 칭찬하시고, 마르다처럼은 되지 말라고 말씀들을 하십니다.
교회는 항상 말씀이 중심이요, 말씀이 먼저이기 때문에 아무 일도 안 해도 좋으니
말씀을 들으라고 역설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예배 후 친교시간이나, 교회의 무슨 행사가 있을 때엔
식사나 간식이 준비되어 있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좀 모순이예요.
저는 성경을 원문으로 읽으면서
그 본래의 뜻을 찾을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기에 우리 한글 성경과 영어성경,
그리고 성경에 붙어 있는 주석들을 중심으로 살펴 보면서
목사님들의 말씀이 맞기는 맞는 구나 하고 생각을 하면서도 모순이 느껴지는 것 또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주석들이 이런 맥락에서 쓰여 진 것을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허나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도 해석 할수 있지 않을까고 자문하여 보았읍니다.
보세요,
마르다의 집에 예수님이 손님으로 오셨읍니다.
(이 때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인지,
아니면 그 전인지는 잘 모르겠읍니다마는,나사로를 살리신 일과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참으로 사랑하셨다는 기록은 요한복음에만 나와 있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더 칭찬하시고 마르다는 훈계하셨다고 하시며
인용되는 구절은 누가복음에만 있읍니다.)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죽었던 동생 나사로를 살려주신 은인임과 동시에 자신을 참으로 사랑해주는 분이었읍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이해해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인지 상정이지요.
그런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좀 더 잘 대접하려고 애를 쓰지 않읍니까?
마찬가지로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여 주시는 예수님이 오셨으니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 올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성을 다 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정성스레 많은 반찬을 준비하노라니 마음이 분주해지고 정신이 분망한데
그 동생인 마리아는 얄밉게도 예수님 발 아래 무릎 꿇고 말씀을 경청하느라 도울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에요.
얼마나 얄밉습니까?
아마 시누이 올케 지간이라면 충분히 싸움할 이유가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보고 나와서 좀 도우라고 했던 것인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랑하는 마르다야! 사람이 떡만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니
너도 음식 준비하는 것 그만두고 들어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렴.“ 하신 것이 아니고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즉 이것은 준비 하기는 하되
너무 많이 찬을 차리느라고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지요?
여기에서 한가지 사실을 발견 할 수가 있읍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
일로 봉사하는 사람은 계속 일로 봉사하되
너무 무리해서 준비를 많이 하느라
말씀을 듣는 사람마저 못 듣게 하지는 말라는 말씀이었던 것 같읍니다.
이는 후에 바울 사도를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었읍니다.
로마서 12장 6절에서 8절까지 한번 찾아 봅시다.
(P25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 함으로,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마르다보고 섬기며 긍휼을 베푸는 일은 즐거움으로 하지
많은 것을 미쳐 장만 못한다고 짜증내며,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
즉 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까지 불러내지는 말라는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님들은
마르다보다는 마리아를 더 예수님께서 칭찬하셨으니
모든 교회 일들은 목사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할 수 있으면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아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말씀만 듣고 일은 안 하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상은 여러분에게 맞기겠읍니다.
목사님들께서 그렇게 설교를 하시는 데에는 또 그대로의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예배 드리며 말씀을 듣는 곳이지, 봉사하는 곳이 아니라고 말씀들을 하시지요.
예배에는 말씀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물론 다 맞는 말입니다.
이 외에 다른 의도는 뭐가 없을까요?
제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요즈음 저희 구역에서는 저녁 식사 후에 예배를 드리니까 그런 일이 없겠지만 그 전처럼 예배 후에 식사를 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집 주인과 또 여러 여성들이 그 준비를 위해서 자리를 뜬다고 하면 저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모처럼 주어진 기회에
제 딴에는 열심히 준비해서 부족한대로 열과 성을 다해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듣는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가
앞에 보이는 자리가 기계 충 많은 머리처럼 듬성 듬성 빈다면
막말로 김이 새지요.
목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성경을 주석하고,
그 말씀을 풀이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목사님이나 교수,
즉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 있는 분들이지,
다른 봉사로 긍휼을 베푸는 분들이 아니기에
마리아를 더 칭찬하는 것이 아닌가 고 생각 키웁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예배 후 음식 준비로 머리가 꽉 차 있는데
목사님의 말씀대로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고 해서
그 말씀이 어디 머리에 들어 옵니까?
물론 목사님으로 볼 때엔 다 앉아서 경청하는 것 같지만
마음은 벌써 뽕밭에 가 있는 빈 껍질만 있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젯밥에만 신경을 쓴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서 봉사를 할 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고,
또 그 일들을 해야 하는 때를 분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건물을 중심으로 교회를 보면 그건 구약의 회당이 되는 것이지
예수님이 계신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 마음 속에 있고,
또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우리 마음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눈에 보이는 성전으로서의 교회는
작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신 교회 즉 교인들이
함께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며 상부상조하는 집합체,
다시 말해서 언젠인가 이중표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생주막이지
성전, 그 곳에만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임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인생주막에서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하는 축도,
즉 이 축도를 받아야 축복을 받을 터인데 이 축복마저 희생하면서
다른 교우들을, 즉 작은 예수님을 모셨으니 결국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을 즐겁게 대접하겠다고 부엌으로 먼저 내려가는 마르다를
마리아보다 못나다고 질책하시는 목사님들의 설교에 조금은 이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봉사할 때는 열심히, 성심껏, 자기를 희생하는 봉사를 소신을 갖고 하십시오.
그렇다고 봉사를 핑계로 예배에 게으르지는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육체적인 봉사 때문에 기도하는 일과,
주님께 예배 드리는 일을 게으르게 하지는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와 예배와 더불어 균형 잡힌 봉사를 할 수가 있을까요?
목회자가 아닌 평교인의 입장에서,
또 봉사하는 봉사자의 입장에서 느낀 몇 가지 점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여성들은 봉사해야 하는 팔자를 타고 나셨나 봅니다.
바자 준비하랴,화단을 가꾸랴,왜 또 잔치 할 일은 그렇게도 많은지....
정말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고 힘든 세월입니다.
이런 바뿐 중에 또 화요 성경 공부, 전통 문화 교실까지 시작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여기 앉아계신 우리 여성들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신 분 모두가
남편들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안히 살면서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유한 마담들이 아니라
남편과 함께 직업전선에서 뛰시는 맞벌이 부인네들이며
돌보아야 할 자녀들이 있고,
챙겨야 할 남편이 있는 가정에 매인 여성들이었습니다.
집에서도 여성들이 하여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밥하고 빨래하고, 소제하고,
거기다가 일 나가기 위해 얼굴 치장마저 남자들보다 더 정성 드려 오래 해야 하니
집에 돌아와 밥상에 앉아 신문이나 뒤적거리는 남자들에 비해
정말로 바쁜 여성들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저는 여성으로 안 태어 난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으니까요.
이렇게 바쁜 중에도 내 교회, 우리교회, 내 믿음, 우리 믿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해온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 모든 진행을 일을 잘 하는 몇 분이 책임을 지다 보니
일을 하시는 분은 하시는 분대로 burn out,완전히 탈진 상태가 됩니다.
물론 수고했다고 위로하며 격려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마르다보다는 마리아가 더 칭찬을 받지를 않나,
또 신기한 일은, 일을 하면 할 수록 좋아지는 사람과 싫어지는 사람이
뚜렷이 갈라지는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안 할 때엔 이 사람, 저 사람 다 괜챤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인간관계도 괜챦았었는데,
일을 하다 보니 의견에 충돌이 생기기도 하고
사물을 보는 방법이 달라지면서 뒷공론이 수군거려 지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있는 소리 없는 소리들이 나와
서로가 좌절하는 시험에 들게 되기도 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교회에 너무 시간을 보낸다고 불평이지요....
이를 옆에서 본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모두가 책임 있는 일들을 안 맡으려고 해요.
발뺌을 하는 풍조가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본디오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아무 죄가 없으니 너희들이 책임 지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책임 있는 자리에서 책임 있는 결정을 회피한 빌라도가
결국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지 않습니까?
매 주일마다 하는 신앙고백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어렵다고, 힘들다고 책임을 회피하지는 마십시오.
이 모든 어려움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감당할 만한 시련임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 들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합시다.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할 때엔 피곤을 모르는 법이니까요.
일을 맞기는 입장에 있는 분들은 일을 할 사람을 뽑을 때
그 사람의 능력을 보고 뽑아야 합니다.
나와 가까우니까, 나와 친하니까 뽑고,
나와 멀리 있고, 내가 보기 싫어서 뽑지 않게 되면
결국은 간장 종 재기에 국을 담는, 그래서 모두가 어려워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국은 국그릇에, 간장은 간장종지에 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 사용한 국 그릇이라고 다시는 사용하지 않은 채
선반에 올려 놔두기만 한다면
그건 그릇으로의 가치를 잃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반의 자리까지 축내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너무 심각해 지지 마세요.
이건 우리 교회 이야기가 아니라 토론토에 있는 어느 다른 교회 이야기 였읍니다.
일을 하다 보면 여러 사람과 상의를 하게 되지요.
요번 성탄주일에는 어떤 음식을 할까 하고 상의를 했다고 가정 합시다.
누구는 샌드위치를 하자고 하고,
누구는 국밥을 하자고 하고,
또 누구는 비빔밥을 하자고합니다.
세가지를 다 하면 좋겠는데 그럴 수는 없으니 한가지를 선택하게 되지요.
비빔밥으로 결정을 하면
샌드위치를 하자던 사람과 국밥을 하자던 사람이 삐죽거립니다.
왜? 자기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회장하고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피곤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건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마는 이런 과정에서 전체를 보며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을 보고
좋게 말하는 사람은 초지 일관의 의지라고 칭찬하고
밉게 보는 사람은 고집 불통이라고 합니다.
결과야 어찌 되었건 적당히 비위를 맞추어 가며 소리 없이 지내는 사람을
좋게 말하면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또 나쁘게 말할 때에는 사꾸라라고 하지요.
똑같은 사람이 의지의 인물이 되기도 하는가 하면 고집불통의 몹쓸 사람이 되고
똑같은 사람이 융통성이 있는 인물이 되기도 하는가 하면
사꾸라가 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세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도 사실은 지독한 고집 불통이었읍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 마디만 하면 살려 주겠다는데
끝내 묵무대답 이었으니까요.
아니,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마디 한다고
그래 하나님의 아들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에서의 경우를 보세요.
배가 고파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을 주어야 죽을 주겠답니다.
에서의 생각에는
그래, 너 장자 해. 그런다고 실지로 장자인 내가 너처럼 차남이 되겠어?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한 마디 한 것이 씨가 되어 크게 당하지 않습니까?
말이 씨가 됩니다.
그러니 힘들어 죽겠다는 말, 다시는 안 하겠다는 말,
미워 죽겠다는 말 등등 부정적인 말들은 서로가 삼가야 겠읍니다.
하나님의 세상은,
하나님의 일은 우리들의 세상 일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무슨 일이건 주어진 일을 할 때엔
인간의 일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그 목적과 결과를 하늘나라의 소명에다 두어야 할 것입니다.
칭찬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욕이 무서운 것이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자신의 속에 있는 예수님에게 물었을 때
부끄러움이 없이 성실히 최선을 다 하였다고 대답할 수 있는가 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칭찬만을 쫒다 보면 가정에 소홀해 지기 쉽고,
기도와 예배가 외식하는 사람의 모양을 따르게 되며,
자그마한 시련에 좌절하게 되는 것을 우린 경험으로 많이 보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땅에서 칭찬을 받으면 그는 벌써 그 상급을 받은 것이니
하늘나라에선 받을 것이 없노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믿음의 여성들이요, 기도의 용사들이며
가정을 가슴에 안고.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신 여성 여러분은
주어진 은사에 따라 그 힘든 잔을 피하려 하기 보다는.
그 소망을 조금 더 높은 곳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나오미의 첫째 며느리,오르바처럼
열심히 충성하다가 중간에서 그만두시지를 마시고
두째 며느리 룻처럼 끝까지 열심히 섬김으로써
축복 속에 예수님의 반열에 들어서시는 여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확신의 믿음 속에 어려움을 극복하시어
더 큰 축복 속에 영광을 얻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바다에 떠있는 배를 볼 때
바다가 너무 크기 때문에 바다는 보이지 않고 배만 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이 하시는 일도 너무 큼으로
때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숨은 봉사가 되는 것이지요.
비록 남에게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처럼 또 루디아처럼
아낌없는 헌신 속에 복음의 씨앗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리아가 끝날까지 주님을 따르고 위함으로써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처럼
우리 모두가 다 옥 합을 깨트리는 아름다운 믿음의 여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 드리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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