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교회, 그리고 나

2006-09-19 선지서

천천히 chunchunhi 2012. 6. 1. 08:26

선지서

 

아침 말씀 요지

 

1: 미가 5-나훔 2        2: 나훔 3-하박국 2             3: 하박국3-스바냐 2

4 : 스바냐 3-학개 2     5일 스가랴 1- 3           6일 스가랴 4-6

 

 

이번 주간에는 12 소 선지서 가운데 그 반에 해당하는 6개의 소선지서를 읽으셨읍니다.

성경을 흔히들 구분하기를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율법서,

여호수와에서 에스더까지 역사서, 욥기에서 아가서까지 시가서, 이사야부터 말라기 까지 선지서로 나누게 되는 데 그 선지서도  호세아에서부터 말라기 까지를 12 소 선지서라고 구분하고 있읍니다.

이 선지서들이 다 시간적으로 순서대로 기록된 것은 아님니다마는 그 내용을 중심으로 구약성경에 배열하여 놓았다고 하더군요.

이건 우리가 읽는 성경에 대하여 알아 두면 나쁘지는 않은 지식에 지나지 않는 말씀이고 실제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거기서 무엇을 찿아야 하는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가 더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 합니다. 학문적으로는 선지서, 소 선지서, 역사서, 율법서 시가서등으로 나우어 놓았지만 그 모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가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읽어야 할것입니다.

 

선지서들이 기록된 배경을 보면 한결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간적인 쾌락을 위해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고, 위정자들은  그권력을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휘두르던 시절,많은 백성들은 내우외환, 안으로는 폭정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침략에 시달리던 시대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그 멸망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하여 주신것입니다.

비록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지위에 따라서 풍요를 구가하며서 태평성대를 살아가는 것 같지만 곧 닥쳐올 멸망에 대비하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선지서를 통하여, 또 지나온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 밑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 행복이 인간적인 욕심과 쾌락추구로 변질되면서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되고 그러면 이방인의 손을 통하여 나라가 멸망당하고 포로가 되고, 그래서 괴로움에 신음하다가 도움을 요청하면 지도자를 보내 주시어 구하여 주시고 그러다가 또 시간이 지나서 괴로움을 잊을 때 즈음해서는 다시 하나님을 멀리하고, 그래서 범죄하고, 그럴 떼에는 또 선지자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고, 그래도 회개를 하지 않으면 멸망당하고, 그래서 신음하고, 부르짖으면 또 지도자를 보내시어 구출하고.. 이것이 우리 인간의 역사요, 이것을 기록하며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만 멸망을 피할 수 있는가가 구약에 기록ㄷ죄어졌으며, 어떻게 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느가를 기록한 책이 신약성경인것 같읍니다.

이렇게 반복되어지는 역사를 볼 때 이 역사를 춧소하면 바로 우리의 가정생활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말입니다.

자녀들이 말을 잘 들으면 우린 칭찬을 하지 말을 잘 듣고 모범된 행동을 하는 데 벌을 주는 부모는 한분도 안계시지요.

그러나 자식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그 생활이 방탕해지면 부모님들은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는 말로 타이르고 훈계를 하지요. 말이 안통할 때에는 매를 들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지요. 이런 경우 자녀들이 바로 돌아서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예 집을 나가기도 할 것입니다.

집을 나간 자식은 부모를 나 몰라라 할 수가 있지만 집나간 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은 절대로 나 몰라라가 안되는 게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비록 말을 안듣고 속이 상하게 한 자식이라 책망하고 두들겨 주기는 하였지만 그걸 못 참아 집을 나간 자식이라 할지라도 부모의 마음에는 항상 “이 녀석이 지금은 어디서 무얼 어떻게 하고 있을 까…? 하고 근심 걱정을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다가 어느날 멀리 외지에서 그 집을 나간 자식으로부터 도움의 요청이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 싸다 싸 조금 더 실컷 당해 보아라. 어디 내가 도와주나 봐라!” 하며 돌아 앉을 부모가 몇이나 되겠읍니까?

디들 도움을 주려고, 그 자식을 어려움에서 구해 주려고 보선발로 달려가는 게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하신 돌아온 탕자의 비유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돌아온 자식이 한동안은 잘 근신을 하면서 지내다가도 그 괴로움을 잊어버릴만 하면 또 방탕하고, 탈선하기 시작하게 되지요. 본색이 다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또 다시 매를 들도 또 집을 나가고, 또 구언을 요청하고…..기원 전 750년 경부터 기록되어진 소 선지서들은 모두 이와같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반복과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으로 만들어 낸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서 훈계하고, 벌을 주고, 또 때로는쫒아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자식으로부터의 도움 요청이 오면 보선발로 달려나가듯 흙으로 정성들려 만드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창조한 인간이고 보니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어쩜 몽므로 자식을 낳은 우리와 자식과의 관계보다는 더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지도 모르겠읍니다.

아니 확실히 더 끈끈하게 맺어진 것 같읍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한두번도 아니고 그 많은 반복의 배역을 다시 감싸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또 그런 우리가 영원한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으로 비천한 종의 형상으로 이세상에 오시기까지 하였겠읍니까.

그래서 이 선지서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닿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읍니다.

미리 미리 준비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고 가르쳐 주셨다며 준비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읍니다.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면 미리 미리 때에 따라서 정비를 하며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장이 나서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아야만 고치는 사람이 있읍니다.

어느게 더 경제적이고 어느게 더 좋은 일인지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다르겠기에 절대적으로 어느게 좋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미리 미리 정비하는 것이 조금은 더 현명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길에서 어느날 갑작이 서는 경우는 드물테니까요.

목사님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에 이런 것이 있읍니다.

어는 교인이 갑작이 새벽기도에 나오기 시작하면 가슴이 철렁하시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아픈지..”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매번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오시던 분이 안 나오시면 또 가슴이 철렁하시답니다.

“내가 무얼 잘 못했나?’하는 근심에서 부터 “또 저러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어떻허나?” 하는 걱정으로 말입니다.

새벽기도에 나오고 안나오는 것만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 새벽이라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주님전에 나오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지금은 비록 어려움이 없더라도 그 주신 복이 감사하여, 그 주시는 말씀이 좋와서 새벽의 단잠을 깨우는 사람들도 있는것을 봅니다.

우리들이 지난 주간에 선지서를 읽으면서 느꼈던 것 처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노엽게 하지 않는 삶을 살수가 있을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와 우리 자식과의 관계를 끈지 못하는 것 처럼 끊을 수가 없을 진대에는 모든 선지서마다에서 반복되어 지는 말,즉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 노하시는 가, 즉

우상을 숭배할 때, 거짓과 약탈과 음행과 마력을 행할 때 라고 하였으니 그런것을 피하는 삶을 살아야 겠읍니다.

하박국 선지의 말처럼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시었으니 그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게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면서 축복을 나려 주실 것입니다. 시편에 노래 한 것 처럼

[개역] 128:3

내실에 있는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개역] 128: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우리 모두 함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사는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도시기를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