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교회, 그리고 나

무엇을 찿는가?

천천히 chunchunhi 2012. 6. 1. 08:31

 

무엇을 찿는가?

잠언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선교란 무엇입니까?

또 여선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말 사전에 선교가 무엇인가고 찿아보니 종교를 선전하여 전도하는 일이라고 정의하여 놓았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기독교 역사상 선교를 제일 처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누구 아시는 분 대답을 좀 하여 주시겠어요?

신약성경의 태반을 기록한 사도 바울입니까?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임니까?

아님니다. 여인들이었읍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서 공생애의 여러 과정을 거쳐

하늘의 복음을 전하며 우리 인간들로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려고 하셨지만

우리 인간들은 그를 십자가에 달아 죽임으로써 인간으로 저지를 수 있는 죄악의 극을 행하였읍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하나님이신 예수님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심과 동시에

기독교가 영생의 소망을 갖는 부활의 종교로서 정립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그 많은 기적을 베풀고

그 많은 비유와 행동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지만

또 그를 내 주로 믿고 그와 함께 3년동안 동거동락하며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태16:15)이라고 신앙고백한 베드로까지도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자 실망하여 낙향을 준비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88절에 보면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 할새"라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그 부활의 놀램과 기쁨을 천천히 걸어가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달려가서

예수와 함께 생활을 하였으면서도 그 죽음을 믿고 실망하여 낙향하려는 제자들에게 전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선교요 전도인 것이며,

또 그것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아니요 단지 예수님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마음으로 믿고 따르던 여인들을 통해서 이루어 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를 보더라도 진정한 전도는 선교사나, 전도사, 아니면 목사를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여성들을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교회의 성장은 여선교회의 활동과 비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가짐을  점검하고, 언어 행실을 주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32절에말씀하신 것 처럼 우리 모두가 육의 심비에 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지 않았읍니까.

 

 

이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찿아야 하겠읍니까?

육신의 부귀 영화입니까?     

아름다운 얼굴입니까?         

날신한 몸매입니까?

자식의 성공입니까?          

남편의 성공입니까?

도대체 우리가 여자로서, 한 남자의 부인으로서,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또 부모님의 딸로서 살아가는 동안 지향하는 목표가 무었입니까?

수도 수도 없이 많은 현자들이 책을 통해서, 말을 통해서 "권불 십년에  화무 십일홍이요,육신의 부귀 영화는 일장 춘몽에 지나지 않는다"고 갈파하여 왔읍니다.

성경에서도 시편 10315장에 보면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다고 하였읍니다.    

계속해서 16절에보면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상통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육체적인 것을 먼저 구하려고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가끔 박물관에 가면 몇천년 전 사람의 뼈를 전시해 놓은 것을 봅니다.

병원에 가면 또 우리 인간들의 뼈를 모조하여 놓은 모형을 봅니다.

얼굴과 머리를 이루었던 해골이 있고. 그에 이어서 갈비뼈가 있고, 등뼈를 통해서 엉덩이 뼈가 있고, 거기에 이어서 다리 뼈가 있읍니다.

우리가 관상을 볼 때에는 흔히 골상도 본다고 하지만 우리가 어디 그 해골을 보고,

그 뼈다귀를 보고

! 참 잘 생겼다, 매력적이다, 요즘 말로하면 참 SEX APPEAL하다고 감탄을 합니까?

아니지요.

그러면서도 그 뼈를 뒤집어 싸고 있는 불과 몇 미리미터박에 안되는

살가죽인데  그 살가죽을 보고 우리는 잘  생겼다는 둥, 누구는 주름살 없애는 수술을 몇 천불을 들여서 했다는 둥, 누구는 눈에 쌍가풀을 하고, 영구 아이 라인을 집어 넣고, 허리에 군살을 빼기 위해 먹지 않고 다이어트를 한다고 입방아를 찧으며, 집안일 다 때려 치우고 열심히 운동하고, 유행에 따라 치창도 하는 것이 평범한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일인것 같읍니다.

왜 이런 일을 합니까?

첫째로는 자기 스스로의 눈에다가 만족감을 주기 위해서이고, 소위 자가 도취이지요,

두째로는 남에게, 남편에게 잘 보이어서 그들의 관심을 자신에게 뫃으려는 심리의 발로인 것입니다.

예레미아 3122절에보면 :여호와가 새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또 서양 격언에 "남자는 세계를 지배하고 여자는 그 남자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고보면 우리 여성들이란 다 현명해서 그 세계를 지배하는 남성들의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또 그 남성을 지배하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는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런데 이렇듯 힘들여 쟁취한 아름다움이 얼마나 갑나까?

우리의 젊고 아름다움을 10년을 간직할 수 있읍니까?

우리의 부귀 영화를 백년을 지탱해 나갈 수 있읍니까?

이 모두가 순간적인 것이 아님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듯 순간적인것을 위하여 그 귀한 시간을, 노력을, 헛되이 보내어야만 하겠읍니까?

우리는 우리가 찿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음미해 보아야 하겠읍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에 이런 일화가 있읍니다.

다빈치가 몇년을 걸려서 예수님을 비롯해서 다른 제자의 얼굴을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찿아서 거리에 나갔읍니다.  하루는 뒷골목에서 얼굴이 찌들고, 간사하게 보이며 사기꾼 같기도하고, 술 주정뱅이처럼 보이는 사람을 만나서 그를 화실로 데리고 왔읍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그 모델이 울면서 하는 말이

"선생님, 저를 모르시겠읍니까? 몇년전에 선생님이 예수님의 모델로 쓴 사람이 바로 저였읍니다. 그동안 사랑에 배신을 당하고 사업에 실패한후 좌절 속에 술에 중독이 되었고, 그 욕망을 위해 사기도 치며 살다 보니 오늘에 이르게 되었읍니다."

다빈치가 자세히 보니 기절 초풍을 할 노릇이지요.  어떻게 예수님의 모델과 가롯 유다의 모델이 같은 사람이 될 수가 있겠읍니까?

우리가 오늘날에도 사업에 성공해서 재물이 넉넉하고 사는 데에 여유가 있는 사람을 보면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르 돌고 자신감이 넘쳐 보이며, 조금은 교만해 보이기도 하지만, 같은 사람이 사업에 실패해서 쪼들릴 때엔 그 얼굴에 궁자가 끼엇다고 하지 않읍니까?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며 불만으로 꽉 찬  사람은 그 불만이 얼굴에 나타나고,

인자한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그 인자함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이렇듯 우리의 얼굴이란 마음의 거울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을 대변해 주는 창구인 것입니다.

아무리 화장을 많이 하고, 성형 수술을 하고, 군살을 제거하고, 주름살을 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평안이 없고, 사랑이 없고, 인자함이 없으면 그 얼굴은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라 회칠한 무덤이요, 가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가 있겠읍니까?

어떻게 마음속에 사랑을 키울 수가 있겠읍니까?

어떻게 하면 잠언 3110절에 이른 것같이 진주보다 더 귀한 현숙한 여인이 될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 답은 오늘 본문에 주신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까?

그 답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브처럼 먹지 말라는 과일을 따 먹고, 또 제 남편에게 먹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것같은 불순종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순종을 합니까?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는 불만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귀찮으니까 따르는 척 하는 것이 순종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혹시 남편이나 자녀들과 의견의 대립이 심각해져서 언쟁의 단계까지 도달할 때 마음속으로' 요번에는 꼭 버릇을 고쳐 놔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끝까지 싸워 남편이나 자녀들에게 순종을 강요한 후 이겼다고 좋아해보신 경험이 없으심니까?

그 남편이나 자녀는 가식적인  순종을 연기하기 위하여 속을 부글 부글 끓이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렇듯 억압에 의한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삼국지에도 제갈량이 남만을 정복할 때 맹획의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항복을 받기 위하여 칠금 칠종이라는 고사를 행하였던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부더의 순종이 있게 하기 위하여서는 마움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1310절에 이르기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 던 것입니다.

사랑을 할 뿐만이 아니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여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애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하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있겠읍니까? 아니, 부탁을 기다리기에 앞서서 먼저 호의를 베풀려고 노력을 할 겁니다.

우리 속담에 부인이 이쁘면 처가집 말둑보고도 절한다고 하지 않읍니까?

그러나 미워하는 사람이 부탁을 하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거절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니 미움받는 사람이 "예수 믿으세요."하면 믿겠읍니까?

믿을려다가도 질겁을 하고 도망갈 것입니다.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남편에게서, 자식에게서, 주위의 친구에게서,  사회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선교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까?

얼굴에다 구찌베니 찍어 바르고, 눈섶 뽑고 연지 곤지 찍으면 사랑받는 여인이 되는 겁니까?

성경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읍니다.

잠언 3110절에(945) 현숙한 여인이 되라고 하였읍니다.

12절에는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않는다고 하였읍니다.

15절에보듯이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누어 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마끼는 부지런함이 있어야 합니다.

20절에서는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미는 구제에 앞장서라고 하였읍니다.

26절에는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라고 가르치고 있읍니다.

우리들은 흔히 "나는 뒤끝이 없으니까..."라고 자위하며 남에게 입바른 소리를 잘 하지요. 나는 뒤끝이 없으니까, 한번 말하면 그것으로 끝이 나는데 듣는 사람은 그 한 마디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불면의 밤과 고뇌의 나날을 지내햐 함을 우린 알아야 겠읍니다.

한 마디의 말이 천냥의 빛을 갚읍니다.

시편 574절에서는 혀는 날카로운 칼날같다고 하였고, 잠언 1821절에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했읍니다. 성경 전편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혀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수도없이 많이 나오지요.

지극히 작은 혀지만 그 혀가 패역하여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디모데 전서 29(338)에 보면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고 하며 11절에 계속해서  일절 순종함으로써 종용히 배우라고 가르치고 있읍니다.

다시 잠언 1116절에 보면(921)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124절에는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한다고 하였읍니다.

이 외에도, 오늘 밤을 새우며 나열하여도 못다 할 만큼 많은 말씀들이 있으나 이 모든 것이 이루어 지기 위해서는 끈임없는 노력과 쉬임없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제치고 가장 먼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였던 여성 여러분, 긍지속에 선교를 담당하고, 긍지속에 예수님을 사랑하고, 긍지속에 그 사랑을 전하십시요.

그 일차적인 전도지역은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여러분의 가정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는 모순이 있어서는 안되겠지요.

행동으로 사랑하고, 행위로서 믿을 때 남편의 신뢰를 얻게 됨은  남편에 대한 참된 전도요,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음은  자녀들에게 행한 참된 선교인 것입니다.

길에 나가 노방 전도하고,  부흥회를 따라 다니며 간증하고, 기도회를 하는 것도 다 필요합니다마는 가정에서의 선교와 전도를 외면한 선교와 전도는 부평초 같아서

뿌리가 없는 전도인 것입니다.

가정에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가 교회를 바탕으로 성장하고.

그 가지가 사회에 무성하게 성장하여서

병들고 소외된 자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평안한 안식처를 제공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그 가지를 꺽어 줄 수 있을 때

그 꺽인 가지에서는 더욱 많은 가지가 소생할 것이요

그 무성한 숲 속에는 예수님의 인자하신 미소가 깃들 것임을 확신하며

이것으로 대언을 마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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