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교회, 그리고 나

2010-01-20 희망의 속삭임

천천히 chunchunhi 2012. 6. 1. 08:37

희망의 속삭임

 

잠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벧전 3:10-11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요 8:10-11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레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행 15:36-41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행 5:34-39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목사님께서 새해의 목회 구상도 하시고,또 기도와 더불어  재 충전을 하시기 위하여 1주일간 기도하러 가시는 바람에 오늘 제가 이자리에 서게 되었읍니다.

원님덕에 나팔 부는 격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 나팔이 좀 잘 불어 졌으면 좋겠는데… 모르겠읍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는 동안 많이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소리가 있읍니다.

그런가 하면 또, “침묵은 금이라고 하지만 필요한 때의 말 한마디는 금쟁반위에 올려 놓은 다이아몬드와도 같다”는 말도 있읍니다.

말의 위력을 잘 나타낸 비유라고 하겠읍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곳에서 혀의 중요성을 말하여 주고 있읍니다.

이것은 입 속에 있는 뼈대 없는 혀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혀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우리들의 말이 우리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인것 같읍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여 뱉은 한마디가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을 두고도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남는가 하면 또 그 한마디의 말이 한 사람의 인생관을 바꾸어 놓기도 하는 엄청난 힘이 우리가 늘상 하는 말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혀가 스스로는 말을 할 수가 없읍니다.

그 혀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말로서 상대방에게 전달하여 줄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되겠지요.

우리들의 생각에는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이 항상 교차하고 있읍니다.

이런 일화가 있읍니다.

65세가 된 한 노인이 인생 사는 것에 너무나도 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병들고 아퍼 이제는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읍니다.

어느 날 아침 병실 창으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누가 이런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가?” 하며 창문으로 내려다 보니 어느 흑인 노인이 한 다리에는 의족을 한 채 땅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으면서 부는 휘파람이었읍니다.

그 노인이 보기에는 저렇게 보잘것 없고, 불구이기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도 행복스럽게 아름다운 휘파람을 불 수가 있을까 궁금해서 그 사람을 병실로 불렀읍니다.

절뚝거리며 들어오는 사람에게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도 기쁜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 수가 있읍니까?” 하고 물으니 그 사람이 하는 대답이

“왜 기쁘지가 않겠읍니까?  나에게는 아직 건강한 하나의 다리가 있지요, 두 손이 있지요. 또 쓰레기를 주울 수 있는 일자리가 주어 졌지요? 그러니 먹고 사는 걱정이 없지요. 이런 고마운 세상이 어디 있겠읍니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이 자신을 되 돌아보며 무척 부끄러워 졌읍니다.

그 순간 새로운 결심이 섰읍니다.

빨리 나아서 새 삶을 살아야 겠다고 말입니다.

그 후 퇴원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닭을 튀겨 파는 일이었읍니다.

우리가 다 즐겨 먹는 켄터키 후라이 치킨을  66살에 시작한 사람의 일화 한 토막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의 차이가 같은 사람에게 영 반대의 현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똑 같은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생각하기에 따라서 우리는 일을 성사시킬 수도 있고, 또 우리는 일을 망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는 행동을 하면서  우리 인생을 살리는 삶이 되었으면 참 좋겠읍니다.

 

2010년 새해 첫 주일, 권사님들이 준비한 새해 떡국을 맛있게 먹고 있던 중에 앞에 앉으신 분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읍니다.

 “우리 교회는 연합교회인데 교회에서 동성연애자를 죄인시하고 정죄하는 설교를 하고도 괜챦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더 이야기들이 계속 되어 졌었읍니다마는 결론을 얻을 수는 없었읍니다.

아니 분명한 잣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잣대가 법적인 구속력을 가질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짓대는 사회적인 잣대요 하나의 잣대는 윤리적인 , 종교적인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연합교회가 동성애자를 보호하고, 또 그것이 카나다의 헌법에 명시되어지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였는지는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 것이 법으로 되자 지금은 장로교단을 위시해서 모든 교단이 다 포용하게끔 되어 버렸읍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읍니다.

 

동성애자들이 그네들의 자녀들에게, 아니 동성애자들은 자녀를 만들 수가 없으니까 제쳐 놓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애들아, 내가 살아 보니까, 동성애가 참 좋은 거더라. 괜히 결혼 해서 티격 태격 싸움질 하다가 이혼 하네 마네 하지말고 마음에 맞는 동성애자를 골라 함께 살거라” 하고 가르칠까요?

아니면

“열심히 노력해서 마음에 드는 배우자를 만나서 아들 딸 낳으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칠가요?

아마도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쳐도 자녀들이 자라면서 육체적인 병으로 인해서던지, 아니면 정신적인 욕망때문인지 어느사이에  동성애자로 변할 수가 있읍니다.

이럴 때 부모가 “너는 내 자식이 아니야!” 하면서 내치겠읍니까?

아니지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그럴 수가 없지요.

긍휼해하는 마음으로 보듬고 안아 줄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그 것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을 할 것입니다.

연합교회가 처음에 동성애자를 수용하게 된 것은 이런 부모의 심정으로 그네들을 감싸면서 재생의 길을 열어주려는 마음에서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법으로 금지된 동성애자들이 발 붙일 곳은 그네들을 포용하기 시작한 연합교단외에는 아무데도 없었읍니다.

처음에는 자원봉사자로 교단의 일을 하기 지작하다가, 유급직원으로 자리가 확보되고….

그러면서 같은 사람들을 자꾸 빈 자리에 채워 놓다 보니 교단이 마치 동성애자들의 집단이 된 것처럼 되어 버렸읍니다.

 

저는 연합교단의 그 연합 정신을 숭고한 정신으로 믿고 있읍니다.

단지 지금은 그 교단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일터가 되었고, 또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었지만 아직도 연합교회 안에는 순수하게 성경을 믿으며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교회들이 많이 있읍니다.

그네들의 믿음이 언제인가는 연합교회가 애초에 연합하려던 그 숭고한 정신으로 돌아가 선교와 구제와 전도에 힘쓰는 교단으로 바뀌어 질 것을 믿어 마지 않읍니다.

약 20%가 조금 안되는 정도의 교회들이 아직도 순수하게 믿음을 지켜 나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교단에 깊이 관여된 백인 목사님의 말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도 정죄를 하지 않으셨읍니다.

단지 다시는 죄를 짖지 말라고 하시었던 것입니다.

그 한마디가 결국에는 옥합을 깨트리는 사랑으로, 믿음으로 승화된 삶을 살도록 그 여인을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정죄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면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교회가 하여야 할 일일가요?

그런데 또 문제가 있읍니다.

성경에 있는 말이기에 그 말이 옳은 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기는 가 하면 이 또한 성경에 있는 말이기에 이것 또한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소아시아에 전도여행을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할레를 하여야 하는가 안해도 되는가를 놓고의견다툼이 생겨서 서로가 옳고 그름을 가릴 수가 없었을 때 그 답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물어서 그들의 결정을 따르자고 하였읍니다.

그 당시에는 그래도 권위를 가지고 판결을 할 수 있는 사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요즈음에는 그런 권위를 가진 사도들이 없다 보니 교단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교단의 권위가 사도만 하지 못하기에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믿음 생활을 하려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죽음 이후의 삶에서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지침이 되는 성경은 이 구원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해 주고 있읍니다.

로마서에서는 구원은 믿음에서 나온다고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가르쳐 주면서 오직 행함만이 구원에 이룰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읍니다.

두개의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가 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기에 서로가 옳다고 주장을 하면 누가 옳고 그름을 밝혀줄 수가 있겠읍니까?

이 두가지 중의 하나만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으니까요.

 

성경을 이렇게 하나의 작은 나무로만 보아야 할까요?

성경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숲을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가요?

그 숲 속에는 기둥감으로 쓸 수 있도록 크고 곧은 나무가 있는가하면

불 쏘시개를 할 수밖에 없는 마른가지들도 있읍니다.

태양을 바라보며 초록으로 광채를 내뿜는 건강한 잎새가 있는가하면

땅에 떨어져 썩어가는 잎새들도 있읍니다.

우리들이 선호하는 짐승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들이 혐오하는 짐승들도 있읍니다.

이 모두가 어우러져서 하나의 거대한 숲, 살아있는 숲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세상이 좋은 사람, 나쁜사람, 건강한 사람, 아픈사람, 신실한 사람, 거짖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세상이 되는것 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우리들이 보통의 상식으로는 부끄러워서 말 할 수 조차 없는 일들을 아무 꺼리낌없이 기술하여 놓았는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구원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행위를 등한시하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그 반대로 행함만을 강조하다 보니 믿음을 등한시 하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성경이 이루고 있는 거대한 숲을 보면서도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하다 보면

다원주의에 빠져 들 수도 있고, 동성애를 보듬는 것이 아니라 지지할수 있도록 오류를 범할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하나의 작은 나무로만 볼때에는 우리의 시야가 편협되어서 내가 보고 듣고 배운것만을 주장하는 아집에 빠지게 되는 것 같읍니다.

성경이라는 거대한 숲 속에 있는 곧은 나무만을 주장하던지

아니면 썩어가는 나뭇잎을 토양으로 자라나는 벌레들만을 주장하다보면

이 모두가 다 성경에 있는 말이기에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왜곡되게 해석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 될것입니다.

그래서 교파가 생겨나고, 교단이 갈라지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것인지도 모르겠읍니다.

 

이렇듯 구절 구절마다에  이론이 있을 수가 있기에

이런 토론을 하다 보면 토론이 논쟁이 되고, 논쟁이 싸움으로 변하는 것이 우리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들만 이런 것은 아니것 같읍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2차 전도 여행을 계획하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행선지를 정 한 후에 누구와 함께 갈까를 상의하던 중에 이견이 생겼읍니다.

바나바는 지난 전도여행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마가가 함께 가기 원하니 함께 데려가자고 하였읍니다.

바울은 지난번에 높은 산을 넘어야 하는 그 어려운 때 집으로 돌아간 마가가 끝내 못마땅하여 그를 두고 가자고하였읍니다.

마가를 데려가고, 안데려가고 하는 일이 그렇게 큰 일이 될 수있는 일이 아니었읍니다.

그런데 그네들이 크게 다투었다고 부끄럼 없이 기술하고 있읍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왜 안되?” 하니 “글쎄 마가는 안된다니까!”에서부터 시작해서 말들이 조금씩 격해지다가 급기야에는 서로 갈라서야만 할 만큼 감정적인 싸움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에게는 어떤 사람입니까?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고, 큰 도움을 받은 사람입니까?

근데 그깐 일 가지고 싸움을 하고 결별을 해요?

모르기는 하겠읍니다마는 마가를 데려가지 말자하는 것은 표면상의 이유였지 그 내면에는 어떤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읍니다.

 

우리들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가끔 부부싸움을 하지요.

그런데 정작 큰 문제가지고는 싸움을 안합니다.

사소한 일이 발단이 되어서 싸움을 하다가는 몇밤씩 분방을 하기도 하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드러눕기도 하지요.

왜일가요?

사소한 일들이 감정을 자극하고, 그 자극이 혀를 통해서 해서는 안될 말들을 하도록 우리를 부추기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진 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치부하면 더 할 말은 없읍니다마는 그래도 그 때 함께 다녔으면 더 좋은 결실을 맺을 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씁니다.

그렇게도 서로 돕고 위하던 두사람이 그 일 이후에는 바나바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사리지는 아쉬움이 되었으니까요.

바울도 후에 이일을 생각하면서 많은 후회를 하였던것 같읍니다.

그래서 그가 쓴 편지마다에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성령의 열매를 이야기 할 때마다  오래 참으라고 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고, 무례히 행하지 말라고, 분을 품지말라고 권면하는 것을 보면 그 자신 그 때의 일을 무척이나 후회를 한듯 합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서로의 의견이 다름을 가지고 다툴 수도 있읍니다.

 

허나 한가지 중요한 것은 다툴지라도 말을 조심해서 너무나도 깊은, 치유되기 힘든 상처는 서로에게 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골프를 치다가 잘 나가던 공이 끝에 가서 옆으로 돌아 담장밖으로 나갈 때마다 농담으로 저건 이단인데…”하며 웃고는 합니다.

이단.

잘 나가다가 끝이 다른 것을 이단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이 단어는 교회에서 많이 사용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순수한 심정으로 목회를 하다가 끝에 가서 교세가 커질 때  행로가 바뀌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지금은 없어진 신앙촌의 박태선장로가 이 경우였고, 종말론으로 교세를 확장하던 다미선교회가 그러 했고, 요즈음에는 신천지라는 것이 기승을 부리고 있지요.

그리고 요즈음은 교계에서 좀 잠잠해 졌읍니다마는 통일교 또한 그 끝이 다름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읍니다.

이 중에서 교세가 가장 큰 통일교도  몇년이나 되었읍니까?  50년도 채 안되지 않았읍니까?

가말리엘이 말한 것처럼 그동안에도 수많은 이단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하였읍니다.

그런데 이단이라고 정죄할 수록 그 단체들은 더 커지는 속성이 있었던것 같읍니다.

그러나 끝이 같지 않기 때문에 결국운 다 소멸되어지고 말았지요

그리고는 또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교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잴 수 있는 정확한 자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인간들의 세상에는 절대불변의 진리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그런 사이비 종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간과해서도 안될 것입니다마는 믿음이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이요, 또 주관적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고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의 생각과 다르고, 나의 믿음과 다를 때 이단이라는 말을 쉽게 하지요.

허나 이것은 괭장히 조심해야 할 말 같읍니다.

자기의 수제자였던 바울이 개종한 것을 보면서 가말리엘의 마음속에도 어떤 동요가 일어났는지도 모르겠읍니다.

박해를 받을 수록 들불처럼 번져가는 사도들의 행진을 보면서 당대 석학 가말리엘이 한 말이 오늘도 저의 가슴을 때려 옵니다. 그러면서도 저를 두렵게 만들고 있읍니다.

나는 과연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연애결혼을 한 사람들은 오랜동안 서로 사귀면서 서로를 알기에 결혼 후에도 별 어려움이 없읍니다마는 그래도 세월이 가노라면 서로의 눈에 씌었던 깍지가 벗겨 지면서 서로의 단점을 보게 되지요.

그 단점이라는 것이 대개의 경우에는 부부가 서로가 다른 행동과 생각인 것입니다.

이 때부터 부인은 부인대로 남편을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남편은 남편대로 부인을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게 하려다 보니 부부 싸움이 시작 되는 것이지요.

싸움이 치열해 지다 보면 급기야는 성격의 차이라는 이유로 갈라서지 않읍니까?

중매 결혼을 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서로가 잘 모른다는 전제하에 서로를 조심해서 배우려 하기 때문에 의외로 화평이 오래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마춰지기까지의 새행착오의 시간은 서로에게 참으로 힘든 인내의 시간일 것입니다.

서로가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서로가 배운 가치관이 다를 때 오는 당혹감은 참으로 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만남이 아름다운 결실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가 제 고집만 부려서는 안되겠지요.

배려가 필요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추려는 노력에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어 할까 하는 생각을 할 때 배려가 되는 것이지, 왜 나를 따라 하지 않느냐고만 우길 경우에는 파경에 이르고 말겠지요.

부모와 자식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대 차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제게는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읍니다.

이네들이 대학생활을 할 때부터 자신들의 주장을 조금씩 나타내기 시작하였읍니다.

아들녀석의 경우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토론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아들보다 20년이 넘게 세상을 살아오면서 굳어진 고정관념과 경험을 나이어린 아들이 아무리 설득한들 먹혀들어가겠읍니까?

토론이 논쟁으로 되어질 즈음해서 아들녀석은 기도원으로 들어가더군요.

어떤 때는 하루, 어떤 때에는 1주일씩 금식기도를 한 후에 초췌해진 몰골로 집으로 돌아 옵니다.

그리고는 다시 설득을 시작 합니다.

초췌해진 모습을 보면서 안스러운 마음에 부모가 져 주지요.

그러나 부모가 마음으로부터 져 준것은 아니기에 그가 앞으로 하는 모든 행동이 그 때 그 토론과 결부되어져 되 살아나고는 합니다.

후일에 그 결정으로 인해서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그놈의 자식, 그 때 우리 말을 안 듣고 그렇게 우기더니…” 하게 됩니다.

그런데 딸은 좀 다른 방법을 사용하더군요.

부모가 기분이 좋은것 같은 때를 기다려서 허락을 물어 옵니다.

잠시 설명을 들은 후에 “안되” 하면 더이상 말을 안하고 물러 섭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또 다시 물어 옵니다.

두번째 안되 할 때에는 부모의 마음도 어느 정도 누그러져 있을 때지요.

그러다가 또 한참 후에 허락을 물어 오면서 다시 설득을 시도 합니다.

부모가 웃으면서 허락을 하게 되지요.

후에 그 일로 인해서 후회할 일이 생기더라도 부모가 딸을 나무리지는 않게 됩니다.

마음에서 허락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복음 성가에 익숙하하지 못하였을 때 우리들은 예배 전에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을 얼마나 반대하였었읍니까? 그러다가 한번 부르고, 두번 부르고 하더니 요즈음에는 제법 익숙해지지 않았읍니까?

 

오랜 세월을 조용히 기도하던 습관에 젖은 사람에게 통성기도가 좋은 것이니 소리를 크게 내서 기도하라면 참으로 힘들어 집니다.

예배 시작은 묵도로 시작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에게 묵도는 하나의 형식이니 형식에 구애 받지 말라면  당혹하게도 되지요.

통성기도를 하고 안하고, 묵도를 하고 안하고가 우리 믿음생활에 중요한 것은 아님니다.

그런데 그차이를 가지고 서로 이야기 하다가 이야기가 논쟁이 되고, 논쟁이 싸움이 되어 교회가 흔들리게 되면 그건 정말로 믿음 생활에 큰 어려움을 가져 오게 되는 것이지요.

 

서로가 다른 점을 서로를 존중하면서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대화로 풀어 가면서 서로에게 유익하도록 마추어 가는 노력이 절실한 때인것 같읍니다.

사소한 일로 인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하였던 것 처럼

작은 개미 구멍이 큰 제방을 무너트리는 것 처럼

이런 사소한 일들로 인해서 우리가 감정이 격해지는 일들은 없었으면 참 좋겠읍니다.

 

된장이 시어지면 그 불행은 1년이면 끝나지만

결혼을 잘 못하면 그 불행이 한 평생을 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읍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여줄 수 있는 교회를 잘 못 만나면 한 평생이 아니라 영원한 불행에 이르게 되겠지요.

그래서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오늘도 열심히 우리 온누리 교회를 올바로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시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또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가 있겠지요.

 

부인이 이쁘면 처가집 말뜩보고도 절을 하는 게 우리 사람의 마음이지만

며느리가 미우면 발 뒤축이 달걀같다고 나무라는 시어머니의 마음 또한 우리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지를 멀쩡히 가지고도 죽기만을 기다라던 사람의 마음도 우리의 마음이요, 비록 한 다리가 없어도 남은 한 다리를 감사하게 생각 할 수 있는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인 것입니다.

2010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말을 하면서 보내는 한 해가 되었으면 참 좋겠읍니다.

주님께서 성령의 띠로 우리 모두를 묶어 주시사 우리 모두가 다 몸의 각 지체 처럼 주어진 일이 다를 지라도,우리가 하는 생각이 다를 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서 아름다운 열매를 가꾸는 충성된 종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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