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우먼 파워 동유럽 여행

26 구 시가지 – 동 유럽편 짤스브르크 오스트리아 2011-09-10

천천히 chunchunhi 2012. 1. 30. 10:59

26 구 시가지 동 유럽편 짤스브르크 오스트리아

 

짤자흐강변에 있는 아담한 집 정원에는 한시대를 풍미한 오케스트라의 황제 카라얀의 동상이 서 있었다.

250년 전에 태어난 모짜르트의 음악을 재현하며 세계적인 명지휘자가 된  카라얀 역시 이곳 태생이니 아무래도 짤자흐강에는 음악적인 소양이 소금과 함께 녹아 흐르는 모양이다.

짤자흐강을 건너 성 안으로 들어서니 사람들로 꽤나 북적거린다.

골목을 몇개 돌아 들어 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여기가 모짜르트의 생가라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을 뒤로 젖힌 채 다닥다닥 붙은 6층 건물 중에 노란 색을 칠한 빌딩을 올려다 보는가 하면, 또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가 태어 난 곳은 4층의 한 방이라는데……우리는 거기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단지 그 방으로 연결된 초인종(요즈음 말로 초인종이지 그 당시에는 종을 울리는 줄이었겠지)을 보면서 요즈음 간판의 거리라고 불리우는 번화한 거리를 지나 광장으로 나왔다.

성채가 있는 언덕 바로 밑에 있는 카피텔 광장이다.

광장 주위에는 많은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줄지어져있고, 그 많은 자리들이 전부가 다 차 있으니 관광객인지, 현지 사람이던지 하여턴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광장을 지나 짤즈브르크 성벽을 이루는 바위 밑으로 가니 오른쪽에 보이는 암벽을 파서 만든 극장이 있다. 이 안에  영화에서 경연대회를 하던 극장이 있다나….

우리 보고는 거저 겉만 보고 상상하며 가란다. 허허허

이것이 단체 구릅 관광의 단점이기는 한데…..

혼자 다니려면 교통편 하며, 숙식을 구하는 일, 또 관광지를 찿는일, 이 모두가 내가 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여로를 내 혼자 오려면 이 짧은 시간에는 택도 없으니 아쉬운 대로 따라 할 수 밖에는 없는 모양이다.

암벽아래 오래 된 공동묘지를 따라 생긴 길을 걸어가며 여기가 “Sound of Music”에서 도망가다가 숨어 있던 공동묘지라고 한다.

몇구비를 더 돌고 보니 또 나오는 넓은 광장. 짤스브르크의 대 성당이 있는 곳이다. 여기에서 모짜르트가 세례를 받았고, 이 교회 안에 어린 모짜르트의 고사리 같은 손이 만지던 올갠이 아직도 웅장한 음을 만들어 내고 있단다.

웅장하기 보다는 화려한 교회의 내부를 보면서 드는 느낌은 성스러움보다는 경탄에 가까우니 이 교회를 지으면서 내부에 수 많은 그림과 장식으로 치장한 장인들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것일까? 아님 빛을 못발하는 것일까….?

정신없이 끌려다니면서 기억에도 안 남는 설명을 듣고(이건 나만의 고민인지도 모르겠다.어차피 기억이 다 안되니 나중에 집에 가서 다시 자료를 찿아가며 회상하겠다는 생각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끌려가고….

 

비운의 천재음악가 모차르트의 빛나는 음악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영원한 음악의 고향 짤즈브르크의 짧은 관광은 이렇게 끝이났다.

다음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 뮨헨으로 떠나야 하니까.

내일 아침에는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니 뮨헨관광은 오늘 오후에 다 끝내야 한다.

그러니 서두를 수 밖에….

바삐 뛰어 다닌 짤즈브르크를 떠나면서, 빠른 리듬의 경쾌한 터키쉬 마치가 아니라  클라리넷 콘첼트의 아다지오가 흥얼거려지는 것은 나만의 템포였는지도 모르겠다.

 

모짜르트의 고향에 와서 그가 태어난 집까지 보았으니  모짜르트에 대해 조금 드려다 보는 것도 괜챤겠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바로 대주교의 위세가 등등하던 시기, 1756 1 27일 아버지 레오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의 사이에서 7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볼프강 아마데 모차르트'라고 자기 스스로 불리길 좋아했던 그의 두 번째 이름을 오늘날 우리는 '아마데우스'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그 쪽이 리듬이 좋고 '볼프강'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데우스'라는 말은 '신의 은총을 입어'라는 뜻인데, 과연 신은 그에게 은총과 천직을 내려주셨던 것일까?

음악적인 재능으로만 본다면 그건 틀림없는 은총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의 삶을 보면 그렇게 행복하였던 생활만은 아닌것 같으니 과연 이를 은총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조금 망설여 진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일찍부터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기에 충분하였기에 6살의 나이에 비엔나의 쇤브른 궁전에 연주 초청을 받을 수가 있었겠고, 그리고 그 곳의 거울의 방에서 후에 유럽의 역사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하게 되는 당시의 또래,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청혼을 하였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을 보면 결코 범상한 아이는 아니었을 터이나, 그런 천재에게 천재를 보필할 수 있는 부인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만일 그 때 그 청혼이 이루어 져 마리 앙투와네트가 부인이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 속에 또 하나의 소설을 쓰며 뮨헨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짤즈브르크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