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우먼 파워 동유럽 여행

20 두브로브닉 - 동 유럽편 크로아티아 2011-07-15

천천히 chunchunhi 2012. 1. 30. 10:20

20 두브로브닉 - 유럽편 크로아티아

 

한참을 달려 어느 기슭에 내려 놓는다.

곳이 드브로브닉을 한눈에 보기 제일 좋은 곳이란다.

그런데 마침 해는 넘어에로 지고 있으니 눈으로 보는 석양의 경관은 장관인데…. 석양을 등지고 산그림자에 덮여있는 드브로브닉 성의 경관이 사진을 찍기는 나쁜 시간이 아닌가….

30분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너무나도 크지만, 다시 자리에로 기회는 영영 없을 같기에 역광을 받으면서도 여러장 찍을 밖에….. 바다 위로 빛줄기를 만들며 저무는 석양의 노을은 아름다웠다.

 

이 곳을 와 본 바이런이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찬탄한 드브로브닉성은 크로아티아의 끝자락에 위치한 중세 시대의 백색 항구로서 아드리아 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UNESCO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된 도시다.

중세시대 때는 라구사(Ragusa) 공화국의 한 도시로서  그 당시 해상 무역으로 축적한 어마어마한 부와 뛰어난 외교정책의 뒷받침으로 , 아드리아 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도시로 만들었다고 한다.

 

웅장하게 지어 돌담, 그리고 육중한 , 문을 지키고 있는 두명의 수문장은 움직이지를 않으니 거저 악세사리에 지나지 않는 같았다.

불들이 하나 밝혀지면서 풍겨나는 정취….

것이 어디 전쟁을 위해서 지어진 성터인가 하는 의구심이 나도록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오노프리오 분수이다.

1448년에 이태리의 조각가 오노프리오 데 라 카바(Onofrio de la Cava) 만들었으며 분수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중앙에 커다란 돔 모양의 석조 물이 있고 그 아래는 16면으로, 각 면에서 물이 나오도록 설계된, 분수라기 보다는 우물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인것 같다.

원래는 돔 위에 커다란 쿠폴라와 조각상이 장식되었으나 1667년의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
분수의 물은 약 20km 떨어진 리예카 두브로바츠카(Rijeka Dubrovacka)에 있는 우물에서 공급받는데둘 사이에 놓인 수로는 크로아티아에서 건설된 최초의 수로이다.

실제로 내전 당시에는 이 것이 이 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일한 물의 공급원이 되었었다니까

이 분수를 지나 스트라둔(Stradun)이라고 불리우는 메인거리에는 명품들로 즐비한 고급 상점들이 늘어서 관관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끝에 이르면  성 블라시오 교회(Church of St. Blasius)가 아담하게 지어져 있었다.

이 도시의 수호 성인으로 추앙받는 성 블라시오에게 헌납된 교회로 이곳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교회라고 한다.

마침 들어 가 보았을 때에는 막 결혼식이 끝난 후인지 일하는 사람들이 하얀 런너를 걷어내고 있었다.

 

중세의 도시 구조에는 성당이 있으면 시장이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재래시장을 통과하여 해안으로 나가 보았다.

맑은 물은 바닷속이 훤히 드려다 보이고, 높이 지어진 성곽은 우람한데….. 몇군데 보수한 흔적이 역력하다.

1991년부터 1992년사이에 일어난 내전의 상처인 것이다.

크로아티아 사람들과 세르비아-몬테네그로사람들 사이의 격열한 전쟁은 세계문화유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나 보다.

그래서 그 때 이 성에 대하여 함포사격 명령을 내린 Pavle Strugar란 제독은 결국 종전 후 8년동안 감옥신세를 져야만 하게 되었고, 부서진 성은 2005년에야 완전히 복구 되어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으로의 면보를 되 찿은 것이다. 그러니 새로울 수 밖에….

 

7세기경부터 번성하기 시작한 이 곳이 그 후 세계를 주름잡던 열강들에 의해 주인이 바뀔 때마다 치러진 전쟁으로 많은 건물들이 부서지고, 또 재건되고…..

이런 역사의 반복 중에서 과연 평안한 날은 몇일이나 되었을까?

광장 옆에 지어진  렉터궁전(Rector’s Palace)은 박물관으로 변하여 이런 전쟁의 역사들을 그림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화는 이런 전쟁 때문에 오늘날 남자들이 매는 넥타이가 이곳에서 시작되었단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남자들이 하게 마련이고, 전장터로 떠나는 남자들에게는 또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이 있게 마련인가보다.

남자를 전장터로 보내는 여자들의 하나같은 바램은 모두가 다 무사히 돌아오기를 비는 마음인것 또한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가 없는 것이렸다.

이 곳의 남자들이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 생겼으며, 이곳 여자들 또한 늘씬하게 큰 키에 지중해의 바람에 잘 빚어진 육체가 그 아름다움을 세계로 뽑낸다고 한다.

이런 남녀가 전쟁으로 인하여 헤어지게 되고, 또 생사를 모르는 내일을 기약해야 하니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징표가 있어야 할 테인데….

어느 한 아가씨가 떠나는 남자친구의 목에 손수 만든 수건을 감아 주었단다.

땀도 딱고, 혹시 상처가 나면 상처도 싸매면서 자기를 잊지 말고 살아 돌아 오라고….

이를 본 다른 처녀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그러다 보니 유독 이 지방에서 온 청년들의 목에는 모두가 다 형형색색의 수건을 감고 있는 것이 특이하게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하나의 유행이 되어서 남자들의 목에 매는 물건이 되었고, 그것이 진화되어 오늘의 넥타이가 되었단다.

 

성 안을 걸어 다니다가 성벽위로 올라가 보기로 하였더니.

한 사람이 10유로씩 내야 한단다.

성을 둘러 싸고 있는 2km의 거리를 올라가 다리품을 파는데. 둘이서 20유로라…. 허허  그래도 안 올라 갈 수가 없지.

또 언제 와서 보려나.

집사람과 함께 올라가서 보는 경관은 정말로 장관이었다.

파란 바다와 빨간 지붕이 어우러저 만들어 내는 색조의 현란함, 그리고 높은 데에서 내려다 보는 조망. 올라오기를 백번 잘 한것 같은데….. 그 성벽이 평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형에 따라 오르내리는 것이 마치 지난번에 중국의 만리장성같으다.

좌골신곁통이 있는 부인에게는 너무 무리가 아닌가…..

결국 반을 돌고는 내려와야 하는 아쉬움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제 값어치를 한 성벽위의 경관이었다.

이제는 점심을 먹고 스프릿으로 떠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