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대성당 [Stephansdom]
비엔나의 명동이라는 거리에서 내려 세계의 내노라는 명품들을 눈요기 하면서 따가운 태양을 차양으로 가린 노천 카페에서 여유로움을 즐기는 많은 선남선녀들을 보면서 한참을 걸어가니 멀리 뽀죽 탑이 높은 건물들 위로 보이기 시작 한다.
가이드가 일행을 Swarovski라는 크스탈을 전문으로 하는 보석상으로 안내를 한다.
보석과는 상관없는 나인지라 30분의 자유시간을 이용하여 아까 꼭대기만 보이던 건물을 찿아 나섰다.
바삐 걸어가 보니 눈앞에 떠억 버티고 선 커다란 성당, 바로 슈테판 성당이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테반을 기념하여 지은 성당이다.
우리는 스데반집사라고 하는데 이네들은 슈테판이러고 부르는 모양이지.
겉 모양만 보고 허겁지겁 돌아 오니 다시 이 곳으로 온다. 허허…
그러나 나는 조금 더 본 것이지 ㅎㅎㅎ
슈테판 대성당 [Stephansdom]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로서,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하였고, 1258년 빈을 휩쓸었던 대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263년 보헤미아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1359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헐어버리고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였고, 1683년에는 터키군, 1945년에는 독일군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복구를 시작하여 대부분 옛 모습을 찾았다. 성당 이름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성인(聖人) 슈테판에서 딴 것이다.
옛 건물이 가득 들어찬 구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다.
‘빈의 혼(魂)’이라고 부를 정도로 빈의 상징으로 꼽힌다.
공사기간이 65년이나 걸렸으며 건물의 길이가 107m, 천정 높이가 39m에 이르는 거대한 사원이다. 높이 137m에 달하는 첨탑과 25만 개의 청색과 금색 벽돌로 만든 화려한 모자이크 지붕이 눈에 띈다. 보헤미아 왕이 세웠던 '거인의 문'과 '이교도의 탑'도 남아 있다.
건물 내부에는 16세기의 조각가 안톤 필그람이 만든 석조 부조의 설교대와 15세기 말에 만들어진 프리드리히 3세의 대리석 석관이 있다. 그밖에 마리아와 예수상이 있고,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지하에는 1450년에 만든 지하유골 안치소 카타콤이 있는데, 페스트로 죽은 사람의 유골 약 2,000구와 합스부르크 왕가 황제들의 유해 가운데 심장 등의 내장을 담은 항아리 및 백골이 쌓여 있다.
모차르트의 결혼식(1782)과 장례식(1791)이 치러진 곳이며, 빈 시민들은 매년 12월 31일 슈테판대성당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는다.
성당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성슈테판 묘지로 프리드리히 3세의 무덤 등 고풍스럽게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안내서에 있는 대로 엄청 높게 하늘을 찌르고 있는 높은 첨탑과 아름다운 지붕이 참으로 멋진 성당이다.
지금도 보수를 하노라 한쪽은 가려져 있었지만 그 가림이 웅장함을 가릴 수는 없었다.
성단 안의 모습 또한 장엄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많은 관광객 틈에 끼에 바삐 사진을 찍으면서 돌아 나와 뒤로 돌아가 보았다.
성당을 돌아가면서 부조된 조각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이야기 하여 주고 있는데…. 그 사연을 다 들을 시간이 내게는 없으니 어이할꼬!
오늘의 관광은 이것이 전부인 모양이다. 앞으로 남은 것은 차창으로의 관광인 모양이다.
성당을 나와서 점심먹으러 간단다.
비엔나의 명동을 걸어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점심을 먹으러 들어 갔다.
화려하기가, 그리고 고급스러움이 한국의 명동 같다는 것이지 이네들이 지어 놓은 건물들의 예술성이나 웅장함은 한국이 아직 따라가려면 멀고도 먼 길인것 같다.
허기사 이네들도 요즈음에는 이런 옛 건물을 짓지 못하지만….
고색 창연한 건물에, 현대의 편리함을 도입하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다 한번은 갖이고 싶어 하는 고급스러운 명품들로 즐비한 소비의 거리였다.
그 거리의 중앙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게 서 있는 스테반 성당에는 예배자가 아닌 관광객으로 차 있고…..
아마도 요즈음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무슨 명동 타령이냐고 할 것이다.
강남에 명동보다 더 고급이 많은데….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가 1970년 대 말에 한국을 떠난 사람이기에 그의 머리 속에는 그 당시 유명한 명동이 대명사로 자리 잡은 모양이다.
60년대에 떠난 나에게도 마찬가지이고…..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공화국(독일어: Republik Österreich 레푸블리크 외스터라이히(동쪽 영토라는 뜻이다.)
통용: 오지리(墺地利)라고도 하며 유럽, 알프스 산맥 동부에 있는 나라이다. 빈(독일어: Wien, 영어: Vienna)을 수도로 정했고, 독일어를 공용어로 정했다.
선사시대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여러 민족의 이동이 많았다. BC 8세기 무렵부터 할슈타트문화의 중심이 되어 정착한 켈트인이 BC 2세기에는 노리쿰 왕국을 세웠다. 기원 전후 로마인도 다뉴브강 남쪽 연안에 이르러 노리쿰을 속주로 편입시켰고 뒤늦게 빈도보나(지금의 빈)를 건설하였다. 게르만인도 1세기에 이 지방으로 진출했다. 로마 제국은 그 대응책에 고심하면서 4세기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훈족의 서진(西進)으로 435∼453년 아틸라의 지배를 받았으나, 그가 죽자 게르만부족들의 재편성과 자립화가 진행됐다. 그러나 동방으로부터 슬라브족을 동반한 아바르족이 진출하였고, 5세기 말 로마인이 철수했다.
중세
서쪽에서 5세기 후반 이래 왕국을 형성하고 있던 프랑크족은 6세기 로마 교회와 손을 잡고 점차 남동쪽으로도 진출하여 카롤링거 왕조의 카롤루스 대제(재위 768∼814) 영도 아래 8세기 말 바이에른을 복속시키고 다시 동진하여 791∼796년 아바르족을 괴멸시켜 여기에 오스마르크를 설치했다. 9세기 말부터 서진을 시작한 마자르인은 10세기에 이곳으로 진출하였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 동프랑크 왕국을 계승한 작센 왕조 오토 1세(재위 936∼973)는 955년 마자르인을 격파하고 오스마르크를 재건,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이 탄생하였다.
빈, 비엔나
빈(Wien)은 도나우 강변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이다. 인구 약 168만명(2009). 교통의 요지여서 11세기에는 십자군의 통로로서 융성하였고, 15세기 이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발전하였다. 근세에는 오스만 제국군이 두 차례(1529년, 1683년) 빈 문턱 앞까지 왔으나 모두 저지되였다. 2차 대전 말기 소련군의 공세로 벌어진 빈 공방전은 베를린 공방전 다음으로 치열하였다.
'잡음이 만드는 혼탁과 허망에 팔리지 않기 위해 자기 내부에 일어나는 소리만 듣도록 신의 청각을 막아버린 음악가. 베토벤, 세계의 완성자여-. 은혜로운 비가 되어 이 땅을 적시고 바다 위에 내리고 모든 만물 위에 떠돌며 하늘을 형성하는 자….'(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
알프스의 동쪽 기슭 삼림지대와 다뉴브강의 오른쪽 강변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고도(古都) 빈은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도시 동남쪽엔 베토벤을 비롯, 세계의 악성(樂聖)들이 영원히 잠든 음악가 묘지가 있다.이곳 묘역은 그대로 공원-. 사방에 녹음이 짙푸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묘소. 이곳이 바로 '영원한 음악의 완성자' 베토벤이 영면하고 있는 곳이다.
음악가 묘지에는 베토벤외에도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주페 등 세계의 악성(樂聖)들이 한데 모여 쉬고 있다. 묘비마다 천사를 그린 초상들이 갖가지 악기들을 연주하는 모습들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여기저기 잘 가꾸어진 꽃과 녹음-. 마치 악성들의 영혼이 선율로 흐르는 듯 잠시 분위기에 젖어 있으면 '이곳에 왜 이리 늦게 찾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베토벤은 독일 본에서 태어나 1792년 23세 때 하이든을 따라 빈으로 옮겨와 1827년 작고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빈 북동쪽 하일리겐슈타트 부근에는 그가 창작활동을 하면서 기거하던 집 대여섯 채와 거닐던 산책로, 시냇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 베토벤기념관은 1804년부터 15년 동안 살았던 집. 여기서〈교향곡〉4, 5, 7번과 단한곡뿐인 오페라〈피델리오〉를 작곡했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교향곡 3번〈에로이카〉가 울려나온다. 전시실 벽에는 검은 데드마스크, 구석에는 하얀 석고상이 지켜보는 듯했다. 가운데는 교향곡 2번 악보를 비롯, 많은 피아노곡 악보와 편지, 유서 및 그의 초상이 전시돼 있다. 특히 동생들에게 쓴 편지와 이런저런 일상메모가 그대로 보존돼 있는데 '인생 마지막' '절망적'등의 내용을 담은 베토벤의 필적이 남아 있다. 필체가 신경질적으로 마구 휘갈겨 적혀 있어 당시 병마와 싸우던 참담한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관리인은 "선생은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고 하녀 1명과 외롭게 살았답니다. 작곡하면서 귀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피아노를 세게 두드려 피아노가 빨리 망가졌대요. 동네사람들이 너무 시끄럽다고 들고 일어나곤 해서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녀야 했답니다."하며 당시 상황을 들려준다.
기념관 아래 파르 광장에 베토벤 하우스가 있다. 전원 분위기와 평화로움이 넘쳐 흐른는 곳, 교향곡 6번〈전원〉을 작곡했던 집이다. 실제로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는 베토벤의 산책로를 따라 걸어보면 당시 그가 빈 숲과 시냇가를 산책하면서 느낀 새소리, 시냇물소리, 마을사람들의 함성, 소나기가 지나간 뒤 잔잔히 깔리는 햇빛 등 삼라만상이 그대로 담겨져 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월광〉〈비창〉〈열정〉등도 모두 이곳에서 작곡했다고 전한다.
베토벤 하우스에서는 이곳에서 나는 새포도로 자가 주조한 토산와인을 팔고 있다. 〈전원교향곡〉을 들으며 와인을 마시면 베토벤 시절로 돌아가 이곳을 방랑하는 나그네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다. 실제로 당시 베토벤이 산책하며 와인을 잘 마셨다는 것이며, 지금은 집조차 명소가 되어 많은 여행자들이 찾고 있다.
이 부근 그린치거가는 유럽권에서 호이리게로 알려져 있다. 호이리게란 '금년의 새 포도주를 마시게 해준다'는 뜻으로 마을의 농가에서 만든 와인을 싼값에 팔고 있다. 술이 있는 집은 입구에 생솔가지를 걸어놓아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가 있다.
빈 시내에서만도 악성들의 자취가 역력한 유적이 50개를 넘는다.
슈베르트가 태어난 누스도르프가의 '슈베르트의 집'을 찾았다. 좁은 층계를 올라가자 연가곡집〈겨울나그네〉가 흘러나온다. 그가 태어났다는 방안에는 안경과 기타, 연주 안내장, 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 등이 진열돼 있고 옆방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다.
빈 시내 복판에 있는 '피가로의 집'은 모차르트가 오페라〈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한 곳, 또 하이든이 어린 베토벤과 교유를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모차르트가 어렸을 적에 연주하던 귀여운 모습이 걸려 있고 당시 공연됐던〈피가로의 결혼〉의 무대들이 축소, 전시돼 있다.
이밖에 하이든과 브람스를 기념한 하이든 기념관과 '브람스의 집', 베토벤이 불후의 대작〈합창〉, 교향곡을 작곡한 바덴,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빈 숲속의 속삭임〉〈푸른 다뉴브〉, 〈봄의 소리〉로 유명한 빈 숲 칼렌베르크의 언덕, 모차르트가 6세 때 피아노를 연주하고 빈 소년합창단원이었던 슈베르트가 공연했던 쇤브룬 궁전 등 모두가 하나같이 대음악가들의 채취가 서려 있는 곳이다.
또 시내 중심가 슈타트파크에서는 왈츠의 고장답게 저녁마다 왈츠의 잔치가 벌어진다.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바이올린을 켜는 요한 슈트라우스 동상 옆에서 젊은 청춘남녀와 관광객들이 한데 어울려 왈츠를 추며 돌아간다.
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국립오페라 극장,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1869년 완성된 세계 굴지의 오페라와 발레의 전당이다. 모차르트의〈돈 조반니〉로 개관기념공연을 한 뒤 세계의 저명한 오페라·발레 등의 역사적인 공연들이 이곳에서 막을 올렸다. 연주 첫날에는 지금도 남자는 연미복이나 턱시도, 여성은 칵테일드레스나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입장해야 한다.
그밖에 빈에서 가볼 만한 곳으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랑을 받던 황궁으로 거의 1세기 동안 합스부르크 왕궁이다. 건물들은 각 시대마다 왕궁에 살던 군주들이 아름답게 꾸미려고 했던 관계로 각기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외관이 간결하고 장엄하며 전망이 좋다. 18세기 왕이 사용했다는 마리아 테레지아 저택을 비롯해 황제 프란츠 2세의 기념비,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의 카를대공의 승마상 등 볼 만한 것도 많다.
구시가지 한가운데에 있는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교회로 빈의 상징인 성슈테판성당은 1백37미터나 되는 화살처럼 뾰족한 철탑이 있는 거대한 성당으로 장엄한 크리스트 상과 사도상이 있다.
성당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성슈테판 묘지로 프리드리히 3세의 무덤 등 고풍스럽게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미술사박물관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창출한 세계적인 미술품들이 소장된 곳이다. 한 층 전체가 미술품으로 꽉 차 있으며 왼편에는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독일 유파의 그림이, 오른편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유파들의 그림이 있다.
2층은 별관으로 연결돼 있으며 16~17세기의 플랑드르와 독일, 이탈리아의 작품들이 많다.
쇤브룬 궁전은 17세기초 마티아스 황제가 설치했다는 아름다운 분수가 있으며 빈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또 1815년 빈회의의 연회장소였으며 프랑스제국이 망한 뒤 나폴레옹의 아들인 로마왕의 저택으로도 사용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가 1818년 퇴위결의서에 서명한 유서 깊은 곳이다. 정문에서 공원 쪽으로 가면 우아한 아케이드로 된 화랑의 장관이 펼쳐지며 꼭대기에는 돌차양이 있고 황실의 독수리 문양이 있다. 특히 이 궁전은 모차르트가 6살때 놀라운 음악적 재능으로 황녀와 신하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었고 나폴레옹 1세가 한때 사령부를 설치하기도 했었다.
<글 : 배유현>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인터넷을 통해 알아 본 자료중의 하나다.
작성자에게 사전 양해를 얻지 못한 미안함이 있지만 너무 자세하게 잘 기술하여 놓았기에 작성자의 이름을 기록하며 퍼온 것을 밝히는 바이다.
그 외에도 볼만한 것은 많았지만 반나절에 어찌 다 볼 수가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를 보면서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점심 후에 버스는 또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 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는 것이다.
결국 요번 여행의 일정은 오전 관광에 오후 이동이 되려는 것일까?
빈국립오페라극장(Staatsoper )
1869년에 문을 연 빈 궁정오페라극장의 후신으로, 1918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R.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여자》, A.쇤베르크의 《행운의 손》 등을 초연한 극장으로, G.말러, F.샬크, F.P.바인가르트너 등 명지휘자와 총감독들이 활약하였으며, 빈음악, 특히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1955년 가을 복구하여 세계 최신의 시설과 객석 2,200석을 갖춘 대극장으로 발전하였다.
상연 레퍼토리는 고전을 비롯하여 현대 오페라의 초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전속 오페라극단은 매년 여름 잘츠부르크의 축제 오페라극단으로, 또 전속 관현악단은 빈필하모니관현악단으로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다.
빈시청(City Hall of Wien)
1883년 세워졌으며, 신고딕식 건물로서 빈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이다.
시민을 위해 시청 광장을 개방하고 있어 문화공간으로 이용되는데, 여름에는 필름페스티벌, 겨울에는 강림절 행사인 크리스마스마켓(Christmas Market) 등 일 년 내내 크고 작은 축제들이 열린다.
7, 8월 여름밤에 열리는 필름페스티벌에서는 대형스크린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 및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그리고 오페라가 무료로 상영된다. 크리스마스마켓은 11월 16일부터 12월 24일까지 열리는데, 행사가 시작되면 시청 앞에 늘어선 140여 개의 가판대에 설탕에 절인 과일, 군밤, 솜사탕 등 먹을거리와 크리스마스 장식품이 진열되며, 전세계 합창단이 참가하는 크리스마스 캐럴 콘서트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페스티벌 홀에서 열린다.
오른쪽에는 빈대학교가 있고 건너편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빈 최초의 극장이었던 왕궁극장(Burgtheater)이 있으며,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오페라하우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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