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터키 여행기

소아시아 7 교회터를 보고 2차 순례기 13

천천히 chunchunhi 2008. 11. 30. 07:26

2 순례기 13 소아시아 7 교회터를 보고

 

밧모섬을 떠나면서 혼자 마음 속으로 가졌던 의문이 있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당시에  벌써 곳곳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다.

그런데 게시록에서는 단지 7교회만을 거론하였을까?

다른 교회들은 아무 문제들이 없어서…?

아님 거론할 가치가 없어서…..?

아닐것이다.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점하고 있는 바울 서신으로보면 교회들마다에도 나름대로의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던것 같다.

7교회중에 바울 서신으로 남아 신약성경에 오른 에베소서를 제외하고는 다른 6교회에 보낸 서신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성경에 오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6교회의 이름들만이 계시록에 거론된 이유는 무엇일까?

 

7교회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이다,

중에 사도 바울이 직접 가르치고 인도한 교회는 에베소교회 밖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나마도 일은 그의 3 전도여행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가 생기고 한참 후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된 일인지 바울은 소아시아로 가기를 원했으나 2 여행 때까지도  소아시아로 없겠끔  성령으로 금지되었던이 3 여행 때에서야 비로서 이루어 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두란노서원을 통해서 복음을 가르치며  에베소 전도에 3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하며 전력을 집중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오랜 전도생활 중에서 이렇게 곳에  3 동안이나  머물렀던 일은 그에게는 없었던 일이니까……

 

바울의 선교 패턴으로 보면 그는  일찍부터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대도시의 중요성에 유의하여 도시에 있는 회당을 중심으로 하며  전도를 시작하였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에베소에서는 회당이 아니라 두란노 서원을 통해서 전도를 하였으며, 에베소 인근에 있는  도시,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에는 에바브라를 통하여 복음을 전한 것을 보면 ( 4:13)   지역에서는 그가 스스로 다니며 전도를 하지 않았는지 또다른 의문이생기게 된다.

 

 혼자서 의아심이기에 거기에는 혼자서 혹시…?”하는  의문의 자답이 생기는 또한 당연지사이겠지.

 

제일 먼저 의문은

혹시 바울이 당시 사도들로부터 소위 요즈음 말로 하는 왕따를 당한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예수님과 더불에 생활 경력이 없는 그가, 아니 초기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었던 사람이 한번 꼬꾸라져서 회심을 후에

나는 이제 어제의 내가 아니오!” 하고 아무리 외쳐 본들 쉽게 믿어지겠는가 말이다.

어제까지 사람을 피해 숨어 다녀야만 했던 사람들이 말이다.

 

그러한 그가 바나바의 도움으로 안디옥에서부터 전도를 시작하게 되자  미심쩍지만 그래도 믿어 보자면서 그를 대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가지는 바울, 그는 당시, 요즈음으로 보면 해외 유학까지 하며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이렇게 많은 교육을 받은 그이기에,  체험으로 알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그의 지식과 능력은 꽤나 설득력을 가진 힘이 되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담대히 증거 믿는 사람들이 수천명이 생긴 것을 보더라도 능력은 배움에서만 오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어부 출신들이었다.

그네들이 성령을 받아 권능이 생기고, 능력이 배가되었다 하더라도 어느 시점에서는 바울과 비교하며 약간의 콤프렉스가 있지 않았을까?

그들 스스로에게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네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 부터라도….?

 

동향사람들로 뭉친,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같이 보고 느낀 그네들에게 예수님과 생활해 보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믿던 사람을 잡으려 했던 바울을 그네들과 같은 사도의 반열에 올려 놓아 사도라 부르기에는 어딘가 껄끄러움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그가 다니면서 전도하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며 교회로부터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로 구제헌금까지 보내오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인간인데 시샘이 없을 수는 없었겠지….!

 

사도 바울이 열심히 전도하며 세워 놓은 교회에도 어느 틈에 그가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주장이 끼어 들고는 하였던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서에서 사도된 바울은….” 하며 자신의 사도권을 애타게 외쳐야 했던게 아닐까?

 

 

성경에서 피뜩 나타나기에는 아테네에서만이 그가 사도가 아니라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그가 가는 곳마다 먼저 싸워야 것은 그의 위치를 나타내며 그의 말을 믿게 있는  권위이리라.

 

요즈음 같이 사도 자격증을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인터넷으로 조회해 수도 없는 때에,

편에서는 나는 사도요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

다른 한편에서는 그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 적도 없는 사람으로 사도가 아니요.” 하며 훼방을 놓으니, 이렇게 상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어디에 솔깃하였을까?

 

다음에 드는 생각은 혹시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가 당시에는 로마의 권력아래 있었지만, 소아시아를 구성하는 사람들하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구성하고 있었던 사람들하고에는 어떤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곳에까지 퍼진 유대인들 숫자와  성향 또한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마치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과 북미주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같은 한국사람이라고는 하여도 생각하는 성향이나 행동하는 바가 다르듯이 말이다.

하나는 소아시아고 한쪽은 유럽이 아닌가!

아무래도 소아시아에 살던 유대인들이 조금은   이스라엘에 살던 유대인에게 가까웠겠지.

 

어찌 되었던 복음은 소아시아를 거쳐 아테네와 로마에 이르기가지 전파되었고,

누가는 "아시아에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주의 말씀을 듣더라"( 19:10)라고 기록하였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쓰면서, 

헬라쪽에 바울이 전도하여 세운 교회들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언급을 회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싱약성경에 하나의 책으로 올려지지 않은  에베소를 제외한 다른 6교회만이 구지 계시록에 언급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문제가 문제가 아니겠기에 아직도 귀에 이런 이야기가 들려지지 않았는지, 아님 나의 귀와 눈이 막혀 못보고  못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나에게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는 말이다.

누구, 시원스레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 주면 좋겠다.

 

이렇듯 아직도 나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지만 한가지 느껴지는 것은 7교회에 보내 주는 계시의 말씀들 중에는 어떤 교회던지, 어디에 있던지
언제던지, 것이 옛날이던지 오늘날이던지를 막론하고 일어날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일들이 거론 되었다는 점일것이다.

 

교회들마다 그네들이 어디에 처해 있던지,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이 성향이 어떠하던지에 따라서 칭찬을 받을만 교회가 있는가 하면 경고를 받아야 교회가 있고, 충고를 받아야 교회가 있고, 격려를 받아야 교회가 있고…..

 

우리가 함께 생활하며 이루어 나가는 온누리 공동체는 과연 어떤 교회일까?

나름대로의 답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름대로의 답이기에 이상 거론하지 말기로 하자.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 서로 조금씩은 다를 테니까.

허나 바램은 모두가 같겠지?

이름은 온누리이지만 빌라델비아 교회 처럼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 말이다.

그런데, 어디 칭찬이 거저 오나…?

칭찬이 거저 오는 것은 아닐것이다.

그렇담 우선 나부터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해야 겠다 .” 다짐하여 본다.

작심 3일이 되어지지 말기를 바라면서…..

 

이제 다음 행선지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