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순례기 4 밧모섬
요한동굴 입구
저녁 후 6시에 “삐레아”라고 현지 인들이 부르는 피레우스 항구에 도착 하니 엄청 큰 배가 분주히 사람들과 자동차를 싣고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려 있고….
달밤에 지중해에서 sail하는 기분을 만끽하기는 글른 모양이다.
허기사 아무리 계시의 섬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도 요한이 죄수로 갇혀서 수감생활을 하던 그 감옥으로 가는데, 내가 배 갑판에서 달을 처다보며 낭만적인 감상에 젖겠다는 것이 조금은 격에 안맞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4명이 방 하나씩을 배정을 받아 짐을 풀고 뒷 갑판으로 나와 사람들이 승선하는 것과 자동차들이, 큰 트럭들이 배의 뱃속으로 사라지는 모습들을 보며 시간 가기를 기다렸다.
모두들 밧모섬에 간다는 그 사실에 흥분되고, 또 기대가 되는 모양이다.
거기다가 어디 지중해에서 이렇게 큰 배를 타 보았겠는가? ㅎㅎㅎ
뱃고동 소리 한번 울리는 일 없이 7시 정시에 출발 한 배가 밧모섬에 도착할 예정시간은 새벽 1시 55분이다. 그러니까 6시간 뱃길이다.
아테네에서 250km 떨어진 밧모섬에 6시간이 걸리면 최소한 시속 40km는 되는가?
좀 넘을지도 모르겠다. 뱃길이 직선거리가 될 수는 없을 테니까.
1800명의 사람과 500대의 자동차를 실을 수 있다는 Blue Star 2.
난생 처음 타보는 큰 배의 여기 저기를 기웃기웃거리다가 상 갑판의 휴계실에 모두 모여 앉았다.
마침 좋은 기회가 되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이었다.
함께 가기로 한 최집사가 사정이 있어 못가게 되었노라며 여행 중에 언제 기회가 되면 과일을 한번 쏘아달라며 자그마한 봉투를 주는게 아닌가….
가려던 여행을 못가는 것도 아쉬웁고 짜증나는 일인데, 이렇게 함께 하려던 사람들과 함께 못하는 게 아쉬워서 “가면서 군것질을 하라”고 봉투를 내밀다니……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는 것이기에 받아 온 봉투를 열 때가 된 것이다.
저녁은 먹었겠다, 그렇다고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배에서 과일을 구할 수도 없으니 어짜피 못잘 잠, 커피를 함께 마시며 담소하는 게 제격이리라.
Greek Coffee를 한잔씩 돌렸지.
처음 먹어보는 Greek배 위에서 Greek Coffee!
그것도 남이 준 돈으로 마시는 커피 맛이 일품이다.
비록 커피를 갈아서 필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루를 그냥 넣고 끓이는 커피이기에 깡치가 혓바닥을 간지럽힌다 해도 그 맛은 일품이었다.
모두 함께 보이지 않는 최집사에게 건배를 들며 히히낙낙 담소속에 지중해의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새벽 2시에 내려 짐 들고 호텔에 가려면 조금은 자는 게 나을 것 같아 한참 후에 침실로 들어와 2층 침대에 몸은 뉘었다.
한 두시간 잤나? 눈을 뜨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이젠 더 자면 오히려 깨기 힘들것 같아 갑판으로 나와보니 웬걸! 보름을 향해 차가기 시작하는 달이 휘영청이다.
바다위로 수없이 부서지는 달빛, 그래 이게 은파지……
한참을, 정말로 오~래 한참을 그 지중해에 부서진 달을 주서 모아 하늘에 떠 있는 달에 채우며 밤 바닷바람을 받고 있었다.
자연스레 흥얼대어지는 찬송에 뒤 이어지는 기도…..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며 달의 신 Diana에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신들을 만들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우리 인간을 만들어 주신 하늘에 계신, 허나 지금 우리 주변에도 계신 그 하늘 아버지에게 간구할 것은 왜 또 그리도 많았을까…..
아직도 욕심에서, 아집에서 해탈하지를 못한 나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한시간 남짓 서 있다 보니 이제는 짐을 정리하여 내릴 준비를 할 시간이 되었다.
조금 더 잤더라면 어쩔뻔 하였나! Toronto에서부터 꾸어 오던 이 좋은 기회를 놓쳤을 테니 말이다.ㅎㅎㅎ
새벽 2시가 되자 뱃고동 소리도 없이 밧모섬 항구에 배가 정착하였다.
허기사 새벽 2시에 고동이 울면 주민들이 불평을 할 테니까…..
배에서 내라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작은 섬인줄 알았는데…..
배에서 내리니 차인수목사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 보아도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가 보이지를 않는게 아닌가?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짐을 들고 따라오라신다.
조금 걸어 가니 이 곳이 우리가 오늘 밤의 나머지 밤을 잘 호텔이란다.
벨보이도 없고, 에레버이터도 없으니 짐을 아래층에 놔 두시던지 들고 2층으로 올라가라신다. 허허허
Toronto에서 여행일정과 투숙할 Hotel명단을 받자마자 요즈음 그 편한 인터넷으로 한번 살펴 보았었다.
모든 호텔이 다 좋왔는데 유독 이 밧모섬만은 c class였다.
그래도 거저 몇시간 잘 곳이니까…. 하고 말았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쬐끔 너무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다가 한밤중에 자다 깨셔서인지 차목사님의 말씀 또한 조금은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야 할 것 같으니 내일 아침 일이 조금 우려되었다.
걱정은 걱정이고 피곤한 육신은 또 피곤한 육신이기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나보다.
아침에 눈을 뜨자 열어 본 Sun Blinder 저편에 찬란히 떠오른 아침 햇살!
전형적인 지중해의 찬연한 아침이 창밖에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서둘러 짐을 정리하곤 아래로 내려갔다.
잔잔히 갯가를 적시는 잔잔한 파도. 그 위에 수없이 부서지는 태양.
참으로 밝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상상대로 호텔에서 주는 아침은 기준 미달이었다. 그것도 하~안참 미달이었다.
그래, C Class가 C Class지. 자위하며 구워지지 않은 빵을 갇 삶아 온 겨란과 함께 아침 요기를 때우노라니 차인수 목사님이 버스를 가지고 오셨다.
떠나기 전에 듣기로는 이곳은 언덕이 심해서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움직인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버스가 움직일 수 있는 모양이지?
사실 안그럼 우리 모두는 참으로 난감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어찌 오토바이로 움직일 수가 있겠는가…. 이 나이에 말이다.
이렇게 우리의 밧모섬 순례는 시작 되었다.
밧모섬, 영어로는 Pastmos라고 하며 터키 해안에서는 불과 60㎞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나 아테네에서는 250㎞나 떨어져 있다.
그러나 밧모섬은 그리스의 영토이다.
1차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오스만 터키가 주위의 많은 섬들을 다 연합군들에게 빼았겨 대부분이 그리스 영토로 편입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터키와 그리스는 서로 사이가 별로 안좋은 모양이다.
허기사 서로 먹고 먹히우는 역사가 벌써 몇천년인가!
오늘의 승자가 내일에는 패자가 되고, 오늘의 패자가 또 내일에는 승자가 되는 그런 역사의 점철이 수 놓아진 이곳 지중해니까 앞으로의 일을 그 누가 알리요.
우린 우리대로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볼수 있는 것을 많이 보고, 느낄 수 있는 만큼 느끼고 돌아가는 일 외에 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남북이 약 16㎞,동서로는 넓은 곳이 약 10㎞이며 중간 부분은 너비가 불과 1㎞정도밖에 안된다는 밧모섬.
해안 굴곡이 심하여 주위 둘레는 약 60㎞에 이르나 면적은 34㎢박에는 안된단다. 주민은약 2700여명인데 반 이상이 섬 중앙의 산언덕에 있는 호라 마을에 거주하고 있단다.
대부분 백색이어서 매우 깨끗하게 느껴지는 이곳의 집들은 모두가 지붕이 넓적하다.
이유인즉은 비가 올 때 빗물을 받기 위해서란다.
그 옛날, 감옥으로 사용하던 섬이기에 이 섬에서는 물이 나지를 않는단다.
오로지 비가 내릴 때 그 빗물을 저장하여야만 살 수가 있단다.
요즈음은 어느 그리스의 부호가 상수도 시절을 집집마다 해 주어 모두가 편하게 물을 쓰고 있지만, 그 물도 정기적으로 오는 급수선에 의존한다고 하니 결국 오늘 아침에 샤워를 안 한 것이 이곳 주민들을 좀 도와준 셈이 되었는가?ㅋㅋㅋ
차인수목사님 말씀이 이곳 그리스에서는 가끔 부호들이 이렇게 주민들을 위해서 거금을 쓰는 일이 있단다. 참 좋은 본보기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 같다.
나는 언제 그런 거금을 벌어보지? 내 평생에는 글른 모양이다. 허허허
이젠 이곳에 온 진짜 목적, 사도요한의 계시받은 그 배경을 살펴보아야 겠다.
때는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 시대.
피 지배자가 많은 만큼 감옥에 보내야 할 죄수들 또한 많았으리라.
밧모섬은 이 시기에 정치•종교 중범자들의 유배처였는데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든 생지옥이었단다.
예수의 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은 사도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이 섬으로 유배됐다가(주후 95년께•계1:9)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후 석방돼 96년 에베소로 귀향하였다. 결국 1년 남짓 이 곳에서 석수로 일하며 감옥생활을 한 것 같다.
이곳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돌을 깨는 일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이곳 채석장에서는 돌을 생산하고 있다고 하니, 그 돌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래서 섬이 좀 더 작아지지 않았을까?
그가 갇혀 있었던 감옥, 동굴로 들어가기 전에 요한에 대하여 한번쯤 돼 새겨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사이버 세상에서 돌아다니는 자료들 중에서 그래도 성경에 기초한 자료들로 모아보았다.
사도 요한 (John)
(1) 예수의 12제자중의 한 사람으로 야고보와 형제이다.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졌는데 이것은 그의 과격한 성격 때문인 듯하다(막3:17, 9:38, 눅9:54-:5).
이 형제들의 활화산 같은 성품은 주님에게 겸손하지 못한 사마리아인에게 불을 내리기를 원했을 때 잘 나타났다. 또 이 형제는 앞으로 올 왕국에서 높은 자리 둘을 주십사고 예수께 간청하는 절제 없는 야망을 갖기도 했다. 그들의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소위 그때부터 치맛바람의 효시를 이룬게 아닐까?ㅎㅎㅎ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삼년간 훈련시켜 폭풍 같은 성격을 잠재웠으며 우뢰를 조용하게 변화시겼다.
(2) 예수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다(요21:20)
(3) 그는 베드로, 야고보와 더불어 예수의 측근자였으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와 동반되었다(막5:37, 9:2, 14:33).
(4) 요한 복음과 요한 서신 1, 2, 3을 썼으며 말년에는 밧모섬에 유배되어가서 요한 계시록을 썼다.
(5) 레오날도 다빈치(Leonardd da Vinci)는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소녀처럼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흰 손을 겹치고 있는 요한의 얼굴을 그렸다.
십대의 말기에 주 예수를 만났을 때에는 비록 사도들 가운데서 나이가 가장 어리며 나약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요한은 용감하고 영적으로 강건한 사람이었다.
(6) . 요한의 초기 생활
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요한은 가버나움에서 베드로, 안드레와 고기를 잡았다. 요한의 아버지는 세베대였다(마 10:2). 그는 그 당시 꽤나 재력가였던 모양이다.
안드레와 함께 요한은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과 몇 말씀을 나눈 요한은 그가 구세주임을 확신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줄을 바꾸어 섯다.
요한은 육십년이 지난 뒤에도 처음으로 예수님과 대화한 감격적인 순간인 시간을 회상하였다. 이 순간부터 예수님은 요한의 생애에 빛이 되셨다. 사랑이란 서로 주고 받는 보완관계이다. 요한은 "예수의 가장 사랑받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7) 편협한 마음(막 9:38-40, 눅 9:49-50)
어느 마을로 복음을 전하러 가던 중에 요한은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동요하는가 보려고 요한은 앞으로 다가갔다. 귀신들린 한 소년이 땅 위를 뒹굴면서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이 미처 손도 쓰기 전에 낮선 사람이 귀신을 쫓아냈다. 그 소년은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뒤틀 다가 조용해지더니 고쳐졌다.
예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말할 수도 없으며 예수의 이름으로는 일도 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요한은 몰아쳤다. 요한은 예수님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여쭈었다(막 9:38).
그러나 예수께서는 "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막 9:39).
예수께서는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한자니라"(눅 9:50)고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8) 요한의 변화
어느 정원사가 정원의 흙을 보고 "너는 어떻게 그처럼 좋은 향기를 풍기느냐?"고 물었더니 진흙은 "사람들이 나를 장미꽃 옆에 두었기 때문이랍니다"라고 대답했단다.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성급한 청년 요한은 성인이 되어 온유한 성격으로 변하였고 야망은 줄어들었다.
편협한 외곬수적 성격도 사라졌다.
결국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격렬한 성격의 청년에서 마음 착한 성인이 된 것이다.
요한의 성품의 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격려를 해 준다.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며 불평하기 좋아하는 청년이라 해서 반드시 고집세고 이기적이며 잘 투덜대는 어른으로 성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영적인 성장법칙에 따라서 떫고 시퍼런 과일이 달콤하고 맛좋은 과일로 익을 수 있는 것처럼…...
(9) 요한이 보여준 사랑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가 어느 사도보다도 먼저 예수님에게로 다시 돌아온 사람이 요한이었다.
베드로가 멀리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을 때 요한은 용감하게 대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갔다(요 18:15-16). 아마 대제사장은 요한의 아버지인 세베대의 사업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과는 서로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대제사장을 알고 있던 덕택으로 요한은 베드로도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종을 해쳤기 때문에 겁에 질려 베드로가 숯불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재판장에게로 곧장 들어갔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비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때 요한은 외곡된 진실을 직접 보고 들을 수가 잇는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도 가운데서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옆에 서서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그리스도의 적들이 악의에 찬 독설을 내뿜을 때에도 요한은 도망치지 않고 적들의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도 유일하게 요한뿐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을 바라보시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하시고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가리키며 "보라, 네 어머니라"하셨다>(요 19:26-27) (사족: 이 당시의 관습으로는 “여자여” 하는 것이 여성을 최대한 예우해 주는 말이었다고 한다.)
오직 요한만이 "내가 목이 마르다" 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고개를 떨구시고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을 지켜 보았다. 군병이 에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온 것과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사한 사실을 말한 것도 요한 뿐이었다.(요 19:38-42).
이렇게 요한은 용감하였으며 최후까지 예수님께 헌신하였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살인마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어린 양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몇몇 사도들과 더욱 가깝게 지내셨던 것같다.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오백여 형제이며(고전 15:6), 모인 무리의 수는 일백 이십 명이고(행 1:15), 예수께서는 칠십 인을 제자로 세웠다.(눅 10:1). 이들 가운데 열 두 사도가 있으며 사도 가운데 핵심이 되는 세 사람(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있으며 이 중에서 사랑받는 요한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자주 불리워졌다(요 13:23/20:2/21:7). 요한은 "여호와의 은총을 받는다"는 이름의 뜻 그대로 일생을 살았다.
(10)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요3:16) 유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겼다. 요한은 책임감으로서의 사랑 뿐만 아니라 사도직의 징표로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하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상기시켜 주었다. 요한은 그의 저술에서 오십 번 이상이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사랑받는 요한은 예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믿었으며, 밤을 새워 고기를 잡은 후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본 제자였다(요 20:8/21:7).
(11)요한의 사랑은 강했다.
사랑에 대하여 요한이 요약한 말은 사랑의 근간을 이루었다.
진실한 사랑이란 그 사랑의 대상을 해롭게 할 모든 것을 막을 수 있어야 하며 결코 꺽이지 않는 강한 것이어야 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나운 개로부터 아장아장 걷는 자기의 아이를 보호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 진실한 사랑이다. 요한은 일반적으로 그릇된 가르침이 어린 아이들에게 크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요한은 거짓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서슴치 않고 경고했다(요일 1:6/2:4).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당부했다.(요이10). 또 디오레베는 교만하여 사악한 말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세상에 공개했다(요삼 9:10). 요한의 우뢰 같은 성격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그의 강경한 어조도 사랑과 겸손으로 많이 부드러웠졌다.
(13). 말년의 요한
소아시아 태생으로 요한의 제자이면서 폴리갑(Polycarp)과 잘 아는 이레니우스(Irenaeus)는 요한은 주후 98년까지 에베소에서 살았다고 말했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을 독살시키려는 음모에서 하나님께서 목숨을 구해주셨다고 한다. 이 전설은 뱀이 그려진 성찬배가 요한을 상징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또 다른 전설은 핍박받는 동안에 끓는 목욕탕에 던져졌으나 요한은 그 속에서 살아났다고 한다.
요한은 계시록의 인사말에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에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라고 썼듯이 말년에는 도미시안 황제에 의하여 에베소에서 멀지 않은 에게 해에 있는 섬인 밧모에 유배되었다.
이 곳에서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 책에 대한 멧세지를 받고 환상을 보았다.
계시록의 마지막인 22장에서 요한은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라고 썼다(계22:8)
도미시안 황제가 죽은 후 트라얀(Trajan) 황제는 요한이 밧모를 떠나서 에베소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곳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데려와 모시고 살면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1-3서)를 기록한 그는 99세까지 장수하다가 서기104년에 하나님 곁으로 갔다.
예수를 처음 따를 때 가장 어린 소년이었던 요한은 열 두 사도 가운데서 제일 장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형제인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죽었다.
지금도 그의 무덤이 에베소 요한교회에 남아있다. 그리스 정교회는 5월 8일에 그를 기념하고 9월 26일 그의 변화(metastasis)를 축하한다.
(출처 : KCM성경자료 중에서 발췌와 보완)
자 이제는 그 동굴 교회로 들어가 보자.
버스에서 내리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또 나오고 있었다.
입구에서 다섯번이나 하얀 돌담을 돌며 좁은 계단을 내려가서야 나타난 동굴 입구.
약 30여명이 족히 들어갈 만한 바위굴로 그 천장에는 요한이 계시 받을 때,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을 때에 세갈래로 갈라진 바위 틈새가 있었고 전면에는 교회처럼 장식물들이 있었으며 오른쪽으로 요한이 기도하면서 머리를 대어 움푹 파인 바위와 일어날 때 짚었기 때문이 파인 손자국을 은으로 감싸고 있었다.
가이드 하신 차인수 목사님이 설명을 하시는 동안 둘러본 동굴벽은 좀 특이한 바위였다. 자세히 보니 아주 작은 조개껍질들이 수도없이 모래와 뭉쳐진 채로 바위가 된 수성암이었다. 그러니까 이 동굴도 그 언제인가 옛날에는 바다 속에 있었던 것이 지각의 융기로 땅위로 솟아 올랐고, 그 중 약한 부분이 파여서 동굴이 되어 죄수의 몸으로 귀양온 요한의 거처가 되어 오늘날까지 성스러운 곳으로 인정받아 수많은 관광객이, 순례자들이 �아오는 곳이 되었던 것이다.
비록 보잘것 없는 돌덩어라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연계될 때에는 이렇게 변화할 수가 있다는 증거이리라.
계시 동굴 입구에는 눈이 어두운 요한 대신에 계시의 내용을 대서한 요한의 제자 브로고로 집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도행전 6장 5절에 따르면 브로고로 집사는 예루살렘 교회 초대 7집사 중 한 사람으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동굴교회를 나와 수도원으로 향하였다.
4세기 콘스탄틴 대제 이후 순례지가 된 밧모섬에는1088년 성 크리스토 둘로스가 동로마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1세의 도움으로 그당시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의 폐허위에 수도원을 세웠다.
지금 우리가 버스를 타고 더 올라가고 있는 야산 정상에 세워진 사도요한 기념 수도원(The Monastery of Saint John the Theologue) 이다.
외형적으로는 중세의 요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해적들의 공격을 쉽게 방어 할 수 있었단다.
현재는 수도원을 주변으로 섬의 수도 인 호라가 자리잡고 있으며 수도원 안의 교회는 성 요한에게 봉헌된 것으로, 여러 시대에 제작된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두개의 예배실이 있다.
입구에서 오른쪽편의 예배실은 성 크리스토 둘로스에게 봉헌된 것이며 입구에 크리스토 둘로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어 방문자들은 쉽게 볼수있다.
외쪽편의 예배실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으며 17세기의 프레스코벽화로 치장되어 있다.
이외에도 8개의 작은 예배실이 수도원안에 위치하고 있다지만 우리는 들어가보지를 못하였다.
지나온 세월동안 모여진 여러 보물들을 전시해 놓은 방이 있다고 하였으나 그 또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 수도원에는역대의 동로마제국의 황제들이나 총대주교들이 수도원에 하사한 값진 보물과 희귀한 성경이 많은데 특별히 500년대에 기록한 마가복음은 매장 첫 글자를 순금으로 썼고 나머지는 은으로 쓴 희귀본이 있는가 하면 해상무역으로 큰 돈을 번 상인들이 안전 항해를 기원하며 많은 보물을 기증하여 엄청난 보물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우리들에게는 그림 속의 떡일뿐, 특히 이곳에 있는 계시록의 책을 펼쳐 들고 있는 요한의 초상화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성화이라지만 그 또한 볼수가 없었다.
밧모섬에 기독교가 정착하게 된 것은 바로 요한수도원이 세워지면서부터다. 이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다른 많은 수도원과 교회들이 속속 세워졌고 수도사들의 학문 연구를 위해서 도서관도 세워졌다. 1453년 이후 터키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로마 교황청의 지원을 받기도 했으나 16세기에는 터키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912년 이탈리아에 귀속되었다가 1947년 그리스에 양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오랜 역사 속에, 또 많은 진귀한 결실을 만들어 놓은채 오늘은 성지로써 많은 참배객과 관람객을 부르는 밧모섬은 말 대로 크지가 않아, 아침나절에 벌써 다 돌아 볼 수가 있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에 한해서 말이다.
이제 점심을 먹은 후에는 소아시아의 7교회 터를 보러 간다.
지역으로는 그리스 땅에서 터키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자그마한 배가 하나 준비 되었다.
막상 타고보니 우리 일행 뿐이 아닌가….!
결국 전세낸 배에 타고 찬란히 빛나는 지중해의 태양을 받으면서 신화의 나라에서 떠나는 것이다.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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