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순례기 2 아테네 상
햇빛 찬란한 새벽 영시 30분에에 불란서의 파리에 도착 하였다.
한 밤중일 새벽 영시에 햇빛이 찬란하다….?
벌써 신화 속으로 들어 왔나?
허기사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트로이의 왕자 이름을 따서 “파리스”라고 이름 지어진 도시이고보면 한걸음 성큼 다가선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비행장에서 경유만 하면 되는데 입국 수속을 하라고 한다.
하라면 해야지.
작년의 이스라엘처럼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많다 보니 다음 비행기 탈 시간이 급한데….. “우리를 남겨 놓고 떠나지는 않겠지” 라고 자위하며 긴 줄을 기다려 수속을 마치고 탑승할 개찰구로 가는데 비행장이 왜 그리도 큰지…..
토론토의 비행장은 거기다 대면 그 크기가 시골 비행장 같으다.
파리발 1시 30분, 에어버스 320에 자리를 잡으니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마치 미로에서 탈출하는 다이달로스처럼 그 신화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짝이는 은빛 날개는 밀랍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겠지? ㅎㅎㅎ.
햇빛 찬란한 새벽 5시, 비행기에서 내리니 지중해의 따사한 햇살이 우리들을 반긴다.
그동안 시간이 벌써 두번 바뀌어, 현지 시간으로는 아침 12시가 되었다.
이제는 제대로 그 신화의 나라에 들어온 모양이다.
벼르고 별러서 떠나 온 2차 순례여로의 시발점인 아테네.
공항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 이한서씨의 설명을 들으면서 들어서는 도시 아테네는 그 오랜 역사의 풍우 속에 고색창연한 것이 아니라 하얀 집들로 깨끗이 정돈된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사진으로만 보아 온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한 하얀색의 정말로 그림같은 집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곳 북미의 집들 처럼 고층 건물이 즐비한 것도 아닌, 어딘가 조금 색다른 이국적인 정취를 풍겨주는 것 같았다.
설명에 의하면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기에 높은 집을 못짖게 한다니 그럴수 밖에 없겠지.
2004년에 이곳에서 치루어진 올림픽으로 인하여 도로가 많이 만들어지고, 또 정비 되어서 꽤나 산뜻한 느낌을 주는 도시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며, 언제 벌써 점심 때가 되었는지 먼저 귀빈 식당이라는 한국음식점으로 우리를 안내를 한다.
식당으로 가는 길목에 보이는 길가 풍경들.
신호등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는 자동차 앞 유리를 딱아 주는 Squeeze Man이 이곳에도 있더라.
설명인즉은 그리스가 EU에 가입한 나라 중에 입국이 제일 수월한 나라라나?
그래서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다른 나라에서 많이 밀입국을 한단다.
먹고 살려니 할 수 있는 일을 �아야겠지. 다행히 별로 춥지 않은 나라이니 지내기는 그리 힘들지 않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네들 모두의 최종 목적지는 카나다나 미국이라면서 우리가 얼마나 동경받는 나라에서 왔는지 알고 감사하라신다.
아테네의 역사는 전 유럽과 전 세계를 통틀어 도시 중에서도 단연 가장 오래된 도시중에 하나이다.
적어도 기원전 3,000년 전부터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는데 기원전 천 년에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이후 기원전 5세기 동안 아테네만의 문화 유적을 토대로 아테네는 서양 문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그 영토가 동쪽으로는 인도에까지 넓어 졌으나, 권불십년이라고 그가 죽자 나라가 나뉘어지다가 기원 전 150년 경에 신흥국가인 로마에 완전 정복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문화적으로는 그 로마를 정복해서 그리스의 신화가 고스란히 로마의 신화로 계승 발전되며, 그 로마가 딱아 놓은 길을 통해 찬란한 헬레네의 문화를 온 세상에 전파한 그리스.
이렇듯 역사가 길다보니 고대의 사람들이 다 그러했듯이 많은 신들을 섬기며 살아온 역사들이었다.
그래서 오늘에도 그리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리스 신화가 아닌가!
그러니 당연하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오는 것이 언덕위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이요,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이 지금도 매 4년마다 한번씩 떠들썩하게 열리는 올림픽일 것이다.
이런 역사가 있는 아테네를 내가 �아 온 것이다.
피뜩 떠오르는 시조 하나,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도라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는 개성에 와 보며 이렇게 읊었지만 이에 빗대어 조금 가필을 한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ㅋㅋㅋㅋㅋ
오천년 도읍지를 철마로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아아, 지나간 세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런 생각을 하며 함께 먹고 딩굴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온누리 성도들과같이 500년이 아니라 5000년이 넘도록 그 역사를 이어 온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주마간산격으로, 필마가 아니라 에어컨이 작동하는 시원한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그 화려하였던 부귀 영화의 잔재들을 초야에 뒹구는 돌덩어리에서나마 느껴보려 하는 것이다.
좁은 골목길에서 버스를 내리니 늘어 선 가로수에는 오랜지가 주렁주렁….
이 또한 이국적인 정취가 아닌가!
매연이 심해서, 또 가꾸는 열매가 아니라서 맛도 없기에 아무도 따 먹지는 않는단다.
11시간을 비행기에서 좁은 공간에 웅크리고 있다가 새벽 6시에 맞는 지중해에서의 점심은 된장국에 곁들인 한식으로 비행의 피로를 풀었다.
점심 후 제일 먼저 �아간 곳이 세계 보물 1호라는 아크로 폴리스 위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고적 제1호, 아크로 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국민학교때, 아니 요즈음 말로 하면 초등학교라고 하여야 하나?
공책 표지에 그려 진 멋이는 돌집의 그림을 보며 막연히 동경하며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이라고 바라던 그 곳에 이제야 온 것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문명은 신을 숭배하고, 신에게 보다 가까이 접근하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그리스•로마 신화, 또 이 신들의 이름을 딴 많은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 상품들의 이름에서, 또 밤 하늘의 수많은 별자리들의 이름에서 이를 잘 말해주고 있으니까.
오늘날 그리스를 찾는 여행자들은 모두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보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많은 사람들이 열지어 오르고 있는 아크로폴리스, 그 위에 웅장한 자태를 보수하기 위해 세워 놓은 철골에 싸인 채 우뚝 서 있는 파르테논 신전.
원래 그리스 말로 “아크로폴리스”는 “높은 언덕위에 있는 도시”라는 뜻이나, 고대 그리스에서는 도시마다 제일 높은 곳에 그 도시를 수호하는 신전을 지었고, 그 중에서도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가 가장 유명하기에 오늘날 아크로폴리스라 하면 바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지칭하는 것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나중에 다른 도시들을 쓸때 또 언급되기도 하겠지만 어느 도시를 가던 제일 높은 곳에는 신전이 지어져 있었다.
원래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은 기원전 3,000년 경인 미케네 시대에 만들어 졌으나 그때의 신전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현재의 아크로폴리스는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페리클리스에 의해 재건된 것이다. 당시 오랫동안 괴롭히던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끝나자 아테네는 그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번성을 구가하게 되었다. 이에 페리클리스는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였던 피디아스(Phidias)를 시켜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하여 많은 건축물을 이 언덕위에 세웠다.
오늘날 아크로폴리스에서 눈여겨 볼 만한 건축물로는 파르테논 신전, 에렉테이온, 프로필레아, 아테네 니케 신전, 박물관 등이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전체 면적은 300 ×150m로 건축이나 고고학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1시간 정도면 돌아볼 수 있다.
자, 이제 언덕을 올라가 보자!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올라가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블레 문 (Beule Gate)이다. BC 26년에 만들어진 이 문은 아크로폴리스의 입구로 이곳을 발굴했던 프랑스의 고고학자 블레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이다. 대리석으로 된 이 문은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지만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첫 관문인 셈이다.
블레 문을 통과하면 오른쪽으로 승리의 여신인 아테네 니케 신전 (Temple of Athena Nike)이 있다. 이 신전에는 들어갈 수가 없음으로 가이드를 따르는 많은 여행자들이 무심코 지나가지만 이 신전은 작은 규모에 비해 아주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다고 한다. 이 신전은 아크로폴리스의 건물 중 최초로 이오니아식 기둥만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신전 가운데의 작은 방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의 양쪽 주랑에 각각 4개씩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떠 받치고 있단다.
아테네 니케 신전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바로 아크로폴리스의 정문인 프로필레아 (Propylaea)가 보인다. 이 문은 BC 437~423년에 건축가 므네시클레스 (Mnesicles)에 의해 세워졌다. 프로필레아의 중앙에는 두 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있고 내부에는 6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떠 받치고 있다. 서로 다른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프로필레아를 통과하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넓은 광장이 보인다. 광장 정면에는 보는이의 숨을 멈추게 할 정도로 도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과 에렉테이온 (Erechtheion) 이 보인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로 BC 447~432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사실 파르테논 신전은 웅장함보다는 그 뛰어난 미술성과 또 고대의 건축술 때문에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된 것이다.
시인 바이런은 "오! 파르테논이여, 세계의 자랑이여, 너의 발 밑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나라는 굴에 갇힌 사자처럼 누워있다"라고 파르테논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아마도 파르테논에 대한 관심없이 무심코 신전을 찾는 사람들은 어쩌면 다소 실망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신전의 아름다움과 조화미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아름답다.
도시의 수호신인 아테네 파르테노스 (Athena Parthenos)에 바쳐진 이 신전은 도리아 양식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신전의 전체 크기는 가로 31m, 세로 70m이며, 기둥 하나의 높이가 10.433m에 달하는 4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전의 건축은 익티누스( Ictinos)와 칼리크라테스 (Calicrates)가 담당했고 조각은 피디아스가 담당했다.
파르테논 신전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벽면 조각의 아름다움에 있다. 신전의 박공에는 신화에 나오는 반인 반수(켄타우로스족)의 괴물과 인간과의 싸움, 그리스인과 전설속의 여전사들인 아마존인들과의 싸움, 트로이의 함락 등이 그려져 있었단다. 지금은 거의 파손되었으며 상당 부분은 대영박물관의 8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엘진 마블로 명명된 대영박물관의 파르테논 박공 조각들은 오늘날 영국과 그리스의 외교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 내부에는 피디아스에 의해 완성된 11m 높이의 아테네 여신상이 있었다고 한다. 청동으로된 몸체에 팔과 얼굴은 상아로, 중앙에 스핑크스 상이 새겨진 헬멧과 의상, 그리고 손에 든 방패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이 조각은 당시 가장 아름다운 조각 중 하나였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주 과학적으로 설계된 건축물이기도 하다. 인간의 눈에서 발생하는 착시 현상을 보정하기 위해 기둥의 배홀림처리를 비롯해 다양한 시각 조정기법이 사용되었다. 신전의 기둥은 얼핏보면 직각처럼 보이나 기둥의 중앙부는 배부르게 뛰어 나왔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기둥의 뒤가 외벽으로 막혀 있는 경우와 트여있는 경우에 발생하는 기둥 간격의 착각을 고려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단순한 수치적 간격에 집착하지 않고 인간의 착시 현상을 감안해서 균등한 간격을 느낄 수 있게 간격을 조절하였다. 기둥이 서 있는 구도도 곧은 수직이 아니라 피타고라스 법칙에 의해 약간 안으로 기울어지게 지여졌다고 한다. 건물에 안정감을 주기 위해 양측 모서리 기둥을 약간씩 안쪽으로 기울이는 안쏠림 기법을 사용했다. 기둥들이 안쪽으로 7cm정도 기울어져 있고, 기운 기둥의 중심선을 연결해보면 4.5km의 상공에서 한 꼭지점을 이루는데, 지붕의 무게와 바람의 세기와 지진을 견디기 위한 설계와 계산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대단한 그 당시의 기술인가!
얼마전에 들은 이야기: 아스완 댐 때문이 이전한 룩소의 신전이 현대의 컴퓨터를 동원한 과학 기술로 조심스레 옮겨졌는데도 막상 다 옮기고보니 태양이 떠 올라 신전 안을 비추는 그 날자가 하루 틀렸다는 데…
이렇게 정교하게 튼튼하게 지어져서 여러번의 지진에도 끄떡없이 잘 견뎌온 파르테논 신전이 결국은 인재에 의해 파괴 되어버렸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 점령시 터키군의 화약고로 사용되다 1687년 베네치아군의 직격탄에 맞아 폭팔되는 바람에 크게 파손되었다. 현재는 복원작업이 이루어 지고 있으나 언제쯤 그 작업이 끝날지 모르는 상태이다. 과연 온전히 복원된 모습을 볼수가 있으려는지….
파르테논 신전 맞은편에 있는 에렉테이움은 여성미가 넘치는 건축물로 유명하다. 파르테논과는 달리 이오니아식 기둥을 사용한 이 건축물은 남쪽벽의 여신상으로 아주 유명하다. 갸냘프고 아리따운 몸매의 여신상이 신전을 받치고 있어서 인지 건물 전체에서 여성미가 흐른다.
아크로폴리스 아래로는 기원전 2세기에 세워진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과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기려서 세운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었단다. 이 극장에서 다양한 연극과 공연이 열렸었다고 하는데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은 지금도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때에따라 공연장으로 사용하기도 한단다.
이렇게 떠 받들어진 아테나는 과연 어떤 신이었는가?
아테나(그리스어: Αθην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혜•전쟁•직물•요리•도기•문명의 여신이다. 후에 로마 신화의 미네르바와 동일시된다. 제우스와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아르테미스, 헤스티아처럼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은 처녀이다. 올륌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에 속한다. 투구, 갑옷, 창, 메두사의 머리가 달린 방패(아이기스), 올빼미, 뱀이 대표적 상징물이다.
언제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든 무장한 여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같은 전쟁의 신인 아레스와는 달리 총명하고, 이성적이고, 순결하여 사람들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며 영웅들을 수호한다. 아테네의 수호 여신이며 ‘아테네’라는 명칭의 어원이 되었다. 아테나의 별칭인 파르테노스는 여신의 처녀성을 뜻한다고 한다.
많은 도시들마다에 그녀의 이름으로 신전이 세워졌지만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신화속에 빨려 들어가며 파란 하늘아래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건물과 석상을 보랴 사진을 찍노라니 눈이 부셔온다.
그 무거운 돌을 움직여 이 커다란 신전을 지어 놓은 인간들의 신에 대한 경외감, 또 그 단단한 돌을밀가루 반죽하듯이 정교하게 다듬어 마치 살아 있는 인간을 연상하게 하는 정교한 예술인들의 장인정신들이 오늘에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인간이 만들어 낸 신을 위해서는 이런 수고와 노력도 마다않는 우리들이, 인간을 만들어 낸 신,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크로 폴리스의 언덕에서 이제는 다 부셔진 채로 몇개의 기둥만 남았기에 �아 갈 가치가 없다는 이네들의 신 중의 신, 제우스 신전을 멀리 망원경으로 바라 보노라니 이제는 내려 가잔다. 또 볼 것이 있노라며……
하
조금 내려 오다가 그 옛날 바울이 변론하던 재판정, 아레오바고 회의소를 보았다,
지금은 거저 동판으로 사인이 붙은 작은 공터에 불과하지만 그 옛날에는 바울의 생과 사가 결정지어 질 수도 있었던 그런 자리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바울이 열심히 전도하던 그 때에 이곳에도 교회가 분명이 있었을 테인데 왜 그 이야기는 성경에서 빠졌는지 잘 모르겠다.
가이드의 말로는 사도행전 17장이 아테네 전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니 그렇게 믿어야지.
행 17:16-25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이렇듯 많은 신을 섬긴 그리스인들이기에 사도 바울이 어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가 조금 더 수월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언덕을 더 내려와서 쏘크라테스의 감옥이라 이름 붙여진 바위 앞에 섰다.
우리가 흔히 “사옹”이라고 부르는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유명한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을 하였다는 소크라테스.
죽으면서도 닭 한마리 빚진 것을 갚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소크라테스.
그러면 그 빚진 닭을 갚아주는 사람에게 빚진 닭은 또 언제 갚으려는지….ㅎㅎㅎ
악처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였기에 나도 조금 더 유명해 지고 싶은 치기로 부인을 악처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아차, 우리가 알고 있던게 다 정설만은 아니라지 않는가…. 허허…. 어쩐담?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법을 준수하라”는 말의 와전이었고
“너 자신을 알라”는 말 또한 그가 처음 지어낸 말이 아니라 아폴론 신전에 쓰여져 있던 격언을 그가 자주 사용하였기에 그렇게 전해 졌다고 하니 말이다.
이 때의 “너”는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니 결국 “나”를 알라는 말인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 그는 누구인가?
그 자신을 알기 위해 잠간 베껴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서,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조각이 가업이었다는 플라톤의 증언을 바탕으로 볼 때 조각가였다.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였다.
정확한 출생 년원일은 잘 모르겟지만 그가 활약하던 BC 423년경,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와 아메이프시아스 등이 희극의 주인공으로 삼을 정도로 그 당시 아테네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 되었었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크산티페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크세노폰은 그의 저서에서 그녀의 기질이 불 같았다고 전하지만 그녀가 바가지 긁는 여자였다는 증거는 없단다. 그런데 왜 그런 말들이 전해 졌을까?
고등학교 때 들은 이야기 한토막.
소크라테스에게 부인이 바가지를 한참 긁었다고 한다.
허나 거저 못들은 체 하며 문 밖으로 나가는 그에게 부인이 물 바가지를 던졌다나…?
그러니 그가 한말이 “ 천둥이 치더니 드디어 소나기가 오는 구먼…”
어찌나 재미있게 들었던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니 어쩔꼬….
허나 그의 참을성은 대단해서, 그가 군에 있을 때 어느 여름날 아침 일찍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사색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공직이 자신의 원칙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보고 정치적으로 어느 편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BC 406~405년에는 500인회(불레) 회원으로 있었으며, 아르기누사이의 승전자들을 재판할 때 처음에는 동료 회원들과 함께, 나중에는 혼자서 온갖 협박에도 불구하고 참주들의 위헌적인 유죄판결을 끝까지 거부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말년에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기소되었다. 소송을 제기한 자는 권력자 아니토스로서, BC 403년 반혁명을 통해 복위한 민주주의자의 두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명목상의 기소자는 별 볼일 없는 멜레토스였다.
기소 이유는 2가지, 즉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도시가 숭배하는 신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이유는 당시 30인 참주의 공포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적인 민주행정을 시행하고 있던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반민주주의적인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의 우두머리였던 크리티아스에게 않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혐의였다.
그는 배심원 투표에서 약 280 대 220의 비율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기소자는 사형을 요구했다. 항소가 받아들여져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변론했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이 도리어 국가 공헌자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법정의 배심원들을 흥분시켜 501명 가운데 361명의 요구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아테네 규칙에 따르면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24시간 이내에 '독배를 마셔야' 했는데, 그 당시 델로스로 신성한 배를 보내는 기간에는 형을 집행하지 않기 때문에 형집행이 1개월간 미루어졌다.
이동안 그는 친구들을 매일 만나면서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 크리톤이 탈출계획을 꾸몄으나 소크라테스는 거절했다. 판결이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 판결은 법정의 판결이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독배를 마셨다. 이런 그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는 플라톤의 <파이돈>에 잘 기술되어 있다.
아마도 여기에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와전된 것이리라.
소크라테스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인격이나 이론은 주로 플라톤의 대화편과 크세노폰의 〈회고록 Memorabilia〉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모든 시간을 길거리와 시장, 특히 김나시온(고대 그리스의 단련장 요즈음의 Gymnasium)에서 보낸 듯하다.
우리가 오늘날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늙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이다(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 함).
이와 같은 문답의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답은 항상 ‘아직도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無知)의 고백을 문답자가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때 상대방은 소크라테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여기에서 자기의 무지를 폭로당한 사람들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음흉한 수법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참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미로 부여된 궁극의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이 근거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무지의 지), 그것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이 ‘막다른 벽’ 속에 머무는 데 소크라테스의 애지(愛知:철학)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 두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내 자신이 온통 근원에서부터 조명(照明)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기이한 편이었다.
뚱뚱하고 키가 작고 눈은 튀어나왔으며 들창코이고 입은 컸다. 마치 주신(酒神) 실레노스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비록 그 용모는 추하였어도 그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그의 말에 매료되고 그의 내면에 사로잡혔단다.
이렇듯 외면과 내면의 이율배반에 그의 존재의 본질이 있는 것 같다.
그 때까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의 원리를 묻곤 하였는데, 소크라테스에서 비로소 자신과 자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내면(영혼의 차원)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그가 갇혀 있었다는 감옥을 두리번 거리는 동안 지중해의 찬란하던 햇빛도 그 빛을 잃어가기 시작하였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근대 올림픽 경기장에 들렸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남작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 끝에 1894년 국제올림픽협회가 창립되었으며, 2년 후 1896년 4월 6일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제1회 현대 올림픽 경기가 개최되었던 장소이다.
당시에 총 16개국의 국가가 참가 하였으며, 전체 참가 선수는 295명이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대회에 참가 등록된 국가는 202개국, 총 선수 10,500명을 비교해 본다면 약 110년 남짓 후의 올림픽의 규모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2004년에 이곳 아테네에서 열린 현대 올림픽은 이곳에서 개막한 것이 아니고 새로 지은 올림픽 경기장에서 하였단다. 이곳에서는 양궁을 비롯한 몇가지 종목이 열렸었단다.
또 조금을 가노라니 국립 묘지 앞에서 위병들의 교대식이 있을 시간이라며 구경을 하쟌다.
특이한 복장에 특이한 걸음걸이 또한 특이한 이국적 정경이었다.
이렇게 긴 하루, 정말로 긴 하루가 지나고 저녁 후에 호텔로 돌아 왔을 때에는 초저녁인 9시이건만 시공을 초월하여 신화의 나라에로 들어온 나에게는 하루가 31시간으로 늘어난 새벽 네시가 아닌가……
침대에 누워 무거워진 눈을 감은채 생각하여 본다.
앞으로의 여정에서 무얼 보고, 무얼 느낄 수가 있을까?
우리가 가서 볼 곳들은 다 옛 자취의 폐허일 뿐일터인데….
그 폐허, 무너진 돌무더기에서는 아마도 씁쓸한 인생 무상감을 느끼게 되겠지.
그리고 그 느낌을 통해서 새롭게 다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겠지.
새롭게 전도서의 한 귀절이 절절히 마음에 와 닿는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1
헐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다고 말씀 하셨는데 헐어 부서진 돌덩어리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보수작업이라는 명목으로 철근을 세워 논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있는 나는 이 말씀 속에서 과연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앞으로 펼쳐질 하루 하루가 흥분 속에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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