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터키 여행기

고린도 (Corinth) 2차 순례기 3

천천히 chunchunhi 2008. 10. 30. 11:57

 

 

2차 순례기 3    고린도 (Corinth)

 

 

 

 

 

그리스에서 처음 맞는 아침다운 아침이다.

아침 식사 후 호텔에서 내어 준 방에 모여 경건의 시간을 가진 후 신들의 도시, 철학의 도시, 민주주의의 광장인 아테네를 떠나서 고린도로 향하였다.

하늘이 잔뜩 찌푸러 있었다.

우리가 오자 마자 신탁도 받지 않고 떠나는 게 좀 언쨘었는가보다.

아님 그네들의 그 많은 신들의 신전은  구경만 하고, 신전도 없이 자취만 남은 바울의 발자취를 보며 그 열정을 느끼려는 우리가 좀 못마땅하였는지….

가이드의 말이 이때 즈음에는 비오는 날은 물론, 흐린 날도 없는 것이 이곳 기후였는데 요즈음은 날씨가 좀 변덕을 부린단다. 안하던 짓을 자주 한단다.

그래서 지금 즈음에는 햇�이 부서지는 파아란 쪽빛 바다를 보며 달려야 하는데 하늘도 잿빛이요 바다도 잿빛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마음까지 잿빛일 수는 없지.

그래도 우리는 간다. 고린도로……

이 말뜻의 속내를 눈치 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ㅋㅋㅋㅋㅋ

 

뿔이라는 뜻을 가진 고린도.

우리에게는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통해서 귀에 익고 눈에 익은 이름 고린도이지만 실은 그 곳이 어디에 있는 도시인지 조차 잘 모르고 있었던 도시 고린도.

국민학교, 또 국민학교네, 요즈음은 초등학교라고 해야 한다는데….

역시 나는 구세대 사람임을 어쩔수 없나 보다. 하여턴 초등학교때부터 들어 온 3대 기둥 양식중에 가장 화려한 고린도식 석주의 본고장 고린도.

스파르타식의 훈련만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줄수 있다면서 기압을 주던 고등학교때의 체육선생님은 그 스파르타가 이곳 고린도와 이웃한 도시안것을 알고 계셨을까?

스파르타 카스의 본고장이 바로 이곳 필레포네소스 반도에 있는, 고린도와 이웃한 도시국가였음을 나도 이제야 알았으니까.

이런 고린도가 그 옛날부터 그리스 반도와 대륙을 연결하는 지협 남단에 있으며 겐그리아 항구와 로마의 레기온 항구를 연결하고, 지중해의 동서를 연결하는 묘한 지형으로, 상업으로 물질적인 변영을 누린 도시요, 도시가 번영하다 보니 여러 인종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동서 문화의 생활습성과 또 여러 신들을 믿던 그네들의 종교가 서로 뒤엉켜 혼잡을 이루었던 큰 도시였단다.

 

고린도의 종교 중에 여사제 프로디트라는 우상이 있어 600피트나 되는 산상에 무녀가 무려 1,000명이나 있어 뱃사람들을, 또 신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불러 드려 온갖 음탕한 짓들을 다 자행하였기에  고린도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음탕한 풍습에 젖어 고린도사람이라하면 음행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단다.

그래서 고린도로 가자!”하는 말은  좀 세속적인 말로 몸 풀러 가자 !”하는 말의 은어처럼 사용되었었단다.

그 고린도로 가는 길에 차 안에서 들려 주는 가이드 이 한서씨의 재담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여 준다.

 

지중해가 왜 지중해로 불리게 되었는지의 어원에서부터 영어의 기초가 된 라틴어는 결국 그리스 어에서 발전하였기에 모든 고급 영어는 다 그리스 말에서 파생하였단다. 그러고 보니 그렇기도 하다.

모르던 말들도 많이 배웠고, 또 막연히 알 던 말들도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더니 내리란다.

벌써 1시간 남짓 달려 온 모양이다.

 

조금 앞에 보이는 다리로 가 보란다. 무엇이 보이는지……

다리는 별 볼 품이 없는데 막상 다리 위에 서니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동안 성경책 밑에 나오는 조그마한 사진으로만 보아 오던 고린도 운하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두부를 반듯하게 자른듯이 바위를 잘라 만든  고린도 운하로 때마침 배가 한척 지나간다. 하늘이 개였더라면 조금 더 좋왔을 것을….

아쉬웁지만 그래도 눈으로 직접 보는 그 운하의 경관은 정말로 장관이었다. 수직으로 깍아 지른 벽이 결국은 필에포네소스 반도를 반도가 아닌 섬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내가 서있는 다리에서부터 해면까지의 깊이가 자그마치 86m나 되게 수직으로 깍아내린 바위들, 해면으로부터 수심 깊이가 10m나 되고 해면의 폭이 22m, 위로 올라 오면서 점점 더 넓게 파여져서 큰 크루즈도 다닐수가 있다는 세게 3대 운하중의 하나인 이 고린도 운하의 길이가 자그마치 6.8km라는데  너무나 곧게 파여서인지 그 끝이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6.8Km면 우리 이수로 시오리가 넘는 길인데

 

이 운하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경비가 절약되는 지 모른단다.

옛날 사람들이라고 이런 경제 효과를 몰랐을까? 

아니지. 그들도 알았었기 때문에 여기에 운하를 파서 고린도지협과 이오니안해와 에게해를 연결하겠다는 아이디어는 고대 고린도의 창설자인 참주(僭主) 페리안더(Periander)에 의해 최초로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워낙이 굳은 지반에다가  과업의 장대함으로 그 시대에는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 사이 많은 지도자들, 즉 알렉산더대왕, 칼리귤라 등이 운하 계획을 가졌으나 실현하지 못하였었다가, AD67년 네로황제 때 비로서 실제 작업에 들어가 6,000명의 유태인 노예를 동원하여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나 이 또한  갈리아인들의 침입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 후 오랜 세월 방치 되었다가 마침내 19세기(1883~93)에 가서야 프랑스 엔지니어회사에서 이 운하를 성공시킴으로서 결국 2 600년 만에 처음의 계획이 이루어진 것이다. 반도를 잘라내어 섬으로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 졌다는 말이다.

허허…. 장구한 세월에 장관이로고….

~~~ 밑에 지나는 배 위에 탄 쪼그마하게 보이는 사람이 더 작게 보이는 손을 흔들며 올려다 본다.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지. 이제는 이 운하를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으니까.

 

운하를 지나서 신 고린도 시내를 거쳐 옛 고린도 유적지로 향하였다.

 

바울이 2년을 선교하여 교회를 설림한 고린도.(18:1-8).

사회는 음행에 젖어 있었지만 교인 전체의 수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예상되는     고린도(고전1:26).

바울의 동역자 그리스보 (18:8) 가이오, 에라스도(16:23), 스데바나 (고전1:16)등의 거주지였던 고린도.

바울이 처음으로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시작한 곳이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이 전도했던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서 국제적인 도시요,  천혜의 지리적인 조건을 갖춘, 아카 지방의 수도였었다.

번창한 항구 도시가 다 그랬듯이 고린도역시 심한 빈부의 차이와 퇴폐적인 윤리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했다.

고린도 전,후서를 통하여 나타난 이 시대의 퇴폐상을 우리는 오늘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을 보면서, 또 땅에 널려진 부서진 돌 무더기를 보면서 유추해 보려는 것이다.

 

현재 고린도라고 하는 시는 신 고린도로 1858년과 1928년의 대지진 후에 세워진 곳으로 아테네에서 서남쪽으로 80 Km 되는 거리에 있다.

 

고린도 옛 성터로 가는 길에 멀리 보이는 높은 언덕, 아니 언덕이라기 보다는 야트막한 산 위에 성채가 보인다.

그 보이는 성채가 600피트  산상에 1000여명의 여 사제들을 두고 모든 남성들을 유혹하던 프로디트라의 신전이란다.

이곳 역시 이 지방의 신전을 높은 곳, 즉 아크로 에 지어놓았다.

지금은 부서진 신전터에 기둥들만 남아있고, 또 버스가 올라갈 수 없기에 우린 거저 밑에서 올려다 보기만 한단다.

허기사 성지 순례라는 이름으로 떠난 우리가 음행의 원천지인 신전에 올라갈 필요야 무에 그리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나도 남자이어서일까? ㅎㅎㅎㅎ

아니 그 보다도 그 산이 바로 시지프스가 그리도 힘들여 바위를 굴려 올리어 정상에 다 이르면 다시 굴러 내리고, 또 올리면 굴러 내리는 일을 평생 하여야 하도록 형벌을 받은 바로 그 산이라기에 조금 더 흥미가 일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신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 산 정상에는 육체의 쾌락을, 삶의 쾌락을 부추기는 유혹이 있는데(여자가 있는데왜 유혹!하면 거기에는 여자가 있는지 한 평생을 살면서도 아직 잘 모르겠다.ㅋㅋㅋ) 올라 갔다 하면 다시 내려 와야만 하는 숙명. 힘들여 올라 갔다가 한 순간에 다시 굴러 떨어지는 운명이 우리 인생에게 말해주는 교훈 말이다.

그 곳이 쾌락의 원천이 아니라 영생의 원천이라 할지라도 다시 세상으로 내려와야만 하는 게 우리 인간의 생존적인 삶이라면 그 삶 속에서 좀 더 높아지려는 욕망, 좀더 즐기려는 욕망 또한 결국은 한시적인 순간의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 많은 노력을 기우려 돌을 굴려 올렸는데도 결국은 다른 힘에 의해 다시 떨어지고 마니 말이다.

아마도 이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변한 모습을 보면서

이 곳이 좋사오니 초막을 세개 지어….” 하던 베드로의 욕심이나, 나의 욕심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의 욕심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그 마음에서 욕심을 버리고 겸허히 내려 올 때, 우리를 제어할 수 있는 힘과 담대히 증거할 수 있는 권능을 주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땅의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 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곳은 이 땅이니 구지 그 무거운 돌을, 그 무거운 욕심을  산 정상을 향해 굴려 올릴 이유가 무엇이랴!

산세를 보니 내 체력으로는 걸어 올라가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힘들여 올라 간들 지친 몸에 녀자가 무슨 필요일까? 허허허

뛰어도 뛰어도 닿지 않는 포도를 보고 저건 신 포도야!” 하며 체념한 이�의 여우가 되는 편이 편하리라.   (옆에는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부인이 지켜 보고  있으니까….ㅋㅋㅋ)

이런 공상 속에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목이 없는 많은 대리석상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우리로 하여금 목 없는 사열을 받게 한다.

목이 없는 몸이라.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히는 육신으로 사는 것이 편하기는 편한 모양이다.

2000년을 넘게 서 있으면서도 앉을 생각 없이 여직 서 있어 우리에게 사열을 베푸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실내 전시실로 들어 서니 또 많은 조각들이, 부서진 토기 그릇들이 진열 되어 있다.

가장 눈을 끄는 것이 제법 잘 보존되어진 스핑크스였다.

사람의 얼굴에 사자의 몸을 하고,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반인반수의 괴물.

가이드의 말이 피뜩 떠 오른다.

그리스의 신화에서는 그 많은 신과 신이 결혼하면 신이 태어나고

신과 인간이 결혼하면 영웅이 태어나고

신과 동물이 결혼하면 괴물이 태어 난다는데…..

이 스핑크스는 누구와 누구의 합작품일까?

 

 

이 스핑크스 때문에 이디프스 콤플렉스라는 말이 생겨나고, 이 것이 아직도 건재하게 진열되고 있는 고린도이기에  고린도 전,후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주의를 주도록 이 지역이 음행이 심해진 것일까?

산 위의 프로디트라 여신, 땅 아래 스핑크스…… 어쩜 잘 맞는 조화일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찍는데 전시된 조각과 함께 찍지는 말란다.

조각품만은 찍어도 되는데….

이 또한 무슨 해괴한 법인지 모르겠다.

옆에 사람을 놓고는 찍지 말고, 사람 없이는 찍으라니…..어디 헷갈려서 ���     그게 다 사람이 만든 우상인데…….

 

엄청 큰 발굴터에는 시장도 있고, 바울이 예수님의 도를 설파하던 유대인들의 회당도 있고, 목욕탕( 그 당시에도 때미는 습관 하나는 기가 차게 발달하였나 보다. 가는 곳마다 목욕탕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도 있고, 또 원형극장도 있고, 또 그네들이 섬기는 산 아레의 신전도 있고…..

커다란 돌로 다듬어 진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그 당시에는 저 아래 항구까지 이어졌었다는데 그 동안 역사에 묻혀, 지금은 남의 집 아래로 끊기어지고  말았다.

아직 발굴이 다 않되었다는 데도 이 정도이니 정말 엄청 큰 유적지였다.

듣던 말대로 무너진 고린도식 석주가 여기 저기 뒤둥그는 유적지를 돌아보는 동안 하늘이 조금씩 개어 오기 시작하는 것 같다.

 

점심을 먹고 옆의 교회로 올라가 보았다.

책에서 본 사도바울 기념교회인가? 하였는데, 기념교회이기는 하지만 책에 있는 그 교회는 아니란다. 그건 저 아래 신 고린도에 있단다.

 

점심 후에 지금은 희랍정교회로 사용되고있는 그 사도바울 기념  교회로 갔다.

신 고린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지진 후에 지어진, 별로 오래 되지 않은 건물이라는 이야기이듯이 교회는 깨끗하게 조금은 현대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교회 정면 문 위에 공간에는 두 사도의 모습이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는데 한쪽은 열쇄를 들고 있는 사도 베드로의 모습이고, 다른 쪽은 편지들을 손에 들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란다. 두 사도께서 이곳을 다녀가셨지만 한번도 이곳에서 만난적이 없기에 서로 맞은편에 세워지게 되었단다.

 

입구의 오른쪽 벽에는 바울사도의 유명한 고린도 전서 13장이 그리스어로 대리석에  기록되어 벽에 고정되어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제 1대 담임교역자 사도바울을 비롯하여 현재까지 88대 담임 교역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대리석이 붙어있다.

88대가 이어진 2000년이라….. 평균 22년씩 목회를 담당하였다는 이야기가 되나?  어떤 사람은 좀 더, 어떤 사람은 좀 더 짧게 하였겠지.

 

친절하게도 교회 안을 들어가게 하여 준다.

들어서자마자 천정 빼곡히, 한치의 빈틈도 없이 그려진 성화들이 눈을 어지럽힌다.

그 성화 하나 하나가 다 의미가 있고 뜻이 있어 그 것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과 감화를 주었을 터인데 올려다 보는 나의 눈은 매우 현란하다 못하여 어지럽기까지 하니 이 무슨 조화일까?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상이나 사도들의 모습 또한 볼 때마다 다 틀리니 결국 우리가 마음에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마음에 따라 바뀔 수가 있다는 말인가?

너무나도 변화가 많은 천장화이기 때문에 비록 그 그려지는 형식, 즉 이 돔에는 예수님, 이 기둥에는 사도, 이 벽면에는 교부들….처럼  그 위치는 교회의 교리로 정하여 같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려지는 예수님은 한분인데 그 모습이 모두 다르게 그려 졌기에 나에게는 거저 천정화로만 다가오는 모양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또 다시 아테네로 돌아가야할 시간이다.

저녁 후에 밧모섬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피레우스 항구로 가야하니까.

보름을 향한 상현달을 보면서 지중해의 밤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을 토론토에서부터 그리며 기대하고 고대하였는데 하늘이 별로 도와 주지를 않는 것 같다. 걷히는 듯 하던 하늘이 다시 아테네에 왔을 때에는 구름으로 되 덮여 졌으니 말이다.

아직도 시간이 좀 더 남아 있으니까 기다려 보아야지….. 하면서 아테네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동양화와 서예작품들로 벽면을 메운 서울하우스라는 한식당에서 먹었다.    조금씩 뿌려지는 비를 보면서…..

~, 안온다는 비는 왜 오는지…..

작년에 유대 광야를 달릴 때 늦은 비가 축복의 비가 되어서 와디의 참 진 수를 맛볼 수가 있었는데 아테네에서 맞는 늦은 비는 우리에게 어떤 맛을 남기려는지…. 좀더 생각해 보아야 겠다.

 

버스를 타고 이제는 비 걷힌 아테네를 빠져 그 옆의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동안 고린도 전 후서를 되 새겨 보았다.

그 편지가 그렇게 쓰여 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을 생각하며 다시한번 사랑장을 되 되어 보았다.

그래, 사랑은 이런거야.  말초신경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니 나는 아직도 말초신경의 느낌으로  사랑한다고 한단 말이야. 이게 나와 사도바울의 다른 점인가보지….?

 

[개역]고전 13:1- 10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