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광야에 간간이 서있는 싯김나무
40년간을 방황하던 모래밭, 시내 광야
순례기 7
시내 광야
산길을 구비구비 돌아 오르며 보니 얼마 전에 보았던 와디와는 또 다른 모양의 광야가 나타난다. 드문드문 싯김나무가 서 있는가 하면 황량한 모래 언덕이 펼쳐지고… 그 구릉 뒤로 저~편엔 산마루가 걸려 있고…
또 다른 하나님의 창조 구역인것 같다.
요즈음 말로 하면 하바드,예일, MIT를 합한 유명한 애급 국립학교에서 40년동안 수학하며 왕실에서 지도자 수업을 착실히 받은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의 수도생활끝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이스라엘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2백만이나 되는 군증들을 끌고 출애급하여 처음 당도한 땅이 시내 반도라 불리우는 시내 광야였다.
이 광야에서 일어 난 일들.
그건 믿음과 불신의 극명한 인간적인 대결이었다.
그리고 그건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몇달이면 들어 갈 수 있었던 그 가나안땅을 눈앞에 놓고도 그 유명한 12명의 정탐꾼 사건은 이들을 광야에서 유리하며 출애굽한 1세대가 모두 죽고 새로운 세대로 교체되어서야 약속의 땅을 밟는 역사로 이끌어 간다. (민수기 13장)
10명의 손을 들어 준 모세 역시 결국은 눈 앞에 놓인 땅을 눈으로 보고 말아야 하는 비운의 인도자가 되었고…..
당시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산지길, 가까운 길을 이용하여 북상하여, 그곳 거민들과 한판 승부를 벌였었다면, 아마도 광야 38년의 고달픈 여정은 없었으리라.
부정적인 생각들은 부정적인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강화되어가고, 문제들은 확대경으로 보는 것처럼 실제보다 더욱 더 확대되어 나타나도록 아마도 우리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그렇게 되어 먹은 모양이다.
나부터 시작해서…
12명 중에 10명이나 되는 대부분의 정탐꾼들은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입니다”라고 메뚜기에 비교하며, 한정없이 비하시킨다. 그리고 상대방도 나를 그렇게 볼 것이라고 자기의 두려움을 외부로까지 전이시켰다.
그래서 그 많은 백성들이 밤을 지새우며 통곡을 하게 만들었으니까…
이들이 이토록 부정적으로 사태를 파악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의 눈에 보인 환경적인 여건들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애로, 풀 수 없는 문제들로 보고, 자신들을 극도로 비하시킨 그 밑바탕엔 무엇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두려움은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믿음의 부재 때문이리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이 싸움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주눅이 들었고,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이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고려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바라봄 없이 문제만을 보고 있었기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많은 이적으로 자신들을 이끌어 주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면서도 막상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 시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목으로 사물을 보았으면 그 결과가 엄청 달라 졌을 것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보고 듣기를 바란다.
그래서 모든 사물을 내 마음의 필터를 통해 원하는 것만을 선택하여 보고 듣는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내 기존의 편견들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사건을 해석한다.
따라서 내가 보는 사물이나 세상이 사실은 실제의 현실일 수가 없다.
그것은 나의 필터를 통해 본 세상일 뿐이다.
자신들을 메뚜기로 인식한 열 명의 정탐꾼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담대하게 나선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극과 극을 달린다.
똑같은 광경을 보았는데, 그들의 상황에 대한 해석은 정반대로 나타난다. 약속을 믿고 믿음의 눈으로 본 사람과, 약속을 믿지 않은 채, 육신의 눈으로 본 사람의 차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결국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차지한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 자신들의 패배를 믿었던 사람들은 그들이 말한 그대로 광야에서 죽음을 맞는다. 38년 동안이나 모진 고생을 한 연후에 말이다.
나는 어떠한가?
나도 이 열 명의 정탐꾼처럼 불신 때문에 얼마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제한하고 방해해 왔는지 모른다.
염려, 소심함, 내 스스로 해결한다는 자기 충족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이 신중함, 사려 깊음, 독립심, 신세 안 짐이란 그럴 듯한 포장으로 위장되어, 지나온 삶의 많은 부분들을 장식하고, 주님의 뜻으로 가려는 나 자신을 방해해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지금, 요모양, 요꼴일 테니가 말이다.
“하나님 저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열 명의 정탐꾼의 모습 속에서 저는 저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버리는 뿌리 깊은 불신 때문에, 내 안에 편만한 죄성과 고집 때문에, 나는 얼마나 많이 주님의 계획을 막고 방해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서로 돕기도 하고 도움도 받는 것이 살아가는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늘 독불장군 마냥 내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해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나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아니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우선 문제가 생기면 나 스스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나 스스로가 나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이 일하실 자리를 내 안에 만들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사전 봉쇄했던 이 죄인의 죄를 고백합니다. 용서해주세요.
내 스스로 모든 것을 하겠다는 교만의 죄에서 저를 해방시키셔서 참 자유함을 얻게 하소서.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었었는지요. 나의 짐을 주님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약속의 땅을 주신 하나님만을 굳게 신뢰하게 하소서. 주님 때문에, 주위의 문제를 더 이상 문제로 보지 않게 하소서.”(잠시 빌려온 기도문이다)
감사를 모르고 원망하고 불평할 때 내 영혼은 황폐해지고 소멸되어 버린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고, 소리높여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그들이 말했던 그대로 약속의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유리하다가 죽었다.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민수기 14장 2절] 되뇌이던 백성들은 결 국 그들이 말한 대로 광야에서 죽었단 말이다.
말이 씨앗 된다는 우리 속담, 틀린데가 하나도 없다.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수기 14장 28절]
이 광야를 유리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엄숙한 선포이신것 같다. 입 조심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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