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예루살렘 - 거룩한 성의 애가(哀歌) 2
세계 인구의 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음 이후의 영생을 위해 믿는 믿음인데, 그 믿음의 기원을 이루는 예루살렘을 놓고 저마다 차지하려 하는 그 열망을 무슨 힘으로 제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루살렘 Old Town은 아직도 넷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948년 영국이 팔레스타인 보호령을 떠나면서 4종파로 구역을 나누어 주었던 것을 아직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쿼터(Islam Quarter), 유대인 쿼터(Jewish Quarter), 아르메니아인 쿼터(Armenian Quarter), 그리고 크리스천 쿼터(Christian Quarter)로 나누어 놓은 것을, 각 나라별로 국경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마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서로 존중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인 아르메니아인 쿼터 란 어떻게 생겨난 것이기에 이 중요한 자리의 한몫을 차지한 것일까요?
313년, 로마제국의 전 영토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밀라노 칙령이 공표되며,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모두 반환되었고, 그리스도 교인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이 폐지되자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예루살렘 성 안에도 교회들이 지어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들 중 바돌로매(Bartholomew)와 소 야고보의 동생, 다대오(Thaddeus)가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하자, 로마제국보다도 먼저인 301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아르메니아 왕국(Kingdom of Armenia)에서 시작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지령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공동체 지역입니다.
451년, 동 로마제국의 영토인 지금의 터키 땅, 칼케돈(Chalcedon)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에서는 치열한 종교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로마 교구와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서방파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교구의 동방파 사이에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동방파는 하나님만을 신으로 모시고, 예수는 인간과 신의 중간적 존재로 보는 단성론을 지지하였는데, 아르메니아 교회는 이 회의에서 동방파를 지지하였답니다. 이때부터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로부터 이단자로 몰려 독자적인 교회로 떨어져 나갔다가 1198년 로마 공의회에서 복귀를 선언했지만 실현하지 못하고 1373년에 로마 카톨릭교회와 완전히 결별을 한 후 현재 오리엔트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의 한 분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만 이야기를 맺으면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와 혼동이 생기겠기에 조금 더 사족을 붙이면, 동방 정교회는 본래 로마 카톨릭교회와 하나의 기독교 교회로 우리가 요즈음에도 주일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의 기초가 채택된 니케아-콘스탄티노풀 신경을 공유하였으나, 교황의 수위권을 둘러싼 교리적 분쟁 때문에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로 갈라섰기에 영어로 Eastern Orthodox Church, 한글로 동방 정교회라고 부르는데, 현재 약 2억 5천만명의 교세를 가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교세가 큰 교단입니다.
비슷한 이름으로 우리를 혼동시키는 오리엔트 정교회, 영어로는 Oriental Orthodox Church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의된 교리를 거부한 서아시아, 이집트, 에티오피아의 전통 기독교 교회들로, 실은 동방 정교회보다도 먼저 태동된 종단이 되어 비칼케돈파 교파로 불립니다.
현재는 칼케돈파 교파로 불리는 성공회,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개신교회와 신학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져 많은 분야의 교류가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완벽한 성사(聖事)교류가 이뤄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르메니아인 쿼터를 크리스챤 쿼터에 포함하기도 그렇고, 또 포함을 안 하기도 그런 상태였기에 영국이 떠나면서 한 부분을 할애했나 봅니다.
오리엔트 정교회를 과연 또 하나의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믿는 종교라고 해야 할지….
저의 영역 밖의 일이니 종교학자들, 혹은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남겨두기로 하고 우리는 그냥 지금의 예루살렘 성을 둘러보기로 하지요.
예루살렘을 설명하는 거의 모든 사진의 중앙에는 황금 돔이 번쩍이고 있습니다.
원래의 이름은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이지만 “황금 돔”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명물입니다.
제가 찾아 다니는 흔적들과는 크게 관계되는 곳은 아니지만 예루살렘 Old Town의 마스코트처럼 보여지는 “황금 돔”이기에 먼저 설명 드린 후 계속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돔은 현재 이슬람의 사원이거든요.
이슬람 역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섬기기에 먼 옛날에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뉘었던 모리아산의 그 바위를 상당히 중요시합니다.
그들 역시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그 바위를 제단으로 사용하였다는 구약을 믿기에 움마야드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인 661년에 바로 그 돌을 중심으로 계획하여 691년에 모스크를 준공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마도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는 솔로몬의 성전 자취도, 한참 후에 지어진 헤롯의 성전 자취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슬람 들이 와서 축조한 성곽의 위치로 보면 그 당시 약 23m 정도 지하에 묻혀 있었을 터이니까요.(좀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 주에)
그러나 그들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함께 신성시하는 “이삭을 누였었다는 바위”를 이 모스크 안에 안치한 후, 이 돌 위에서 신이 천지를 창조하였고, 그들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하였다고 믿고 있으니 “바위의 돔”이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불리게 되었나 봅니다.
그러나 1016년에 지진으로 무너진 후 1023년에 재건하였으나 1099년에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예루살렘왕국을 세우며 또 한 차레 파괴되었겠지요.
그러나 먼 곳에서부터 온 원정군인 십자군의 예루살렘왕국 또한 오래 가지 못하고, 1187년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격변하는 세계정세 속에 1260년에는 훌라구의 몽골군이 예루살렘 근방까지 육박했으나 이슬람의 장군, 바이바르스가 이들을 몰아냄으로써 맘루크 왕조의 성지 관할권이 확립되었으며, 1319년 맘루크 칼리프 안 나시르 무함마드(An Nasir Muhammad)에 의해 재건축이 되어 우리가 오늘날 보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돔이 황금으로 씌워진 것은 1993년의 일이었습니다.
유대교의 믿음에 따르면 성전 터가 바로 신이 직접 선택한 자리이고, 그 자리에서만 율법에 따른 제사를 올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흔적도 없이 무너졌던 성전을 다시 짓다 보니 그 자리가 과연 얼마나 정확하게 재건축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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