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예루살렘 - 거룩한 성의 애가(哀歌) 1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예루살렘, 거룩한 성.
지형적으로 서쪽에는 티로펀 골짜기(Tyropoeon Valley)와 동쪽에는 남쪽으로 흐르는 기드론 골짜기(Kidron Valley)가 남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유대광야를 거쳐 사해까지 이르는 힌놈 골짜기(Hinnom valley)에 이어지며 자연으로 방어해 주는 산 정상에 있던 “시온의 성”이라는 도시였으나, 다윗이 정복하여 왕궁을 짓고 수도 삼은 후 다윗성(City of David)이라고 부르던 곳입니다.
그보다 더 오래 전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장작짐을 지운 채 정상에 올라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하던 “모리아 산”이기도 한 곳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구약성경을 믿으며, 아직도 나타나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교의 본고장이요,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 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성지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믿으며, 지금의 황금 돔 바로 아래에 모셔져 있는 바위 위에서 신에 의해 천지가 창조되었으며,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이 곳에서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믿음과, 또한 이 바위 위에서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하였다고 믿으며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기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 Old Town 인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1054년에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한 동방 정교회와, 451년 칼레돈 공의회 이후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로 독립된 교회였다가1373 오리엔탈 정교회의 한 지파가 된 아르메니안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분리된 개신교까지 합하면 세계 인구의 반이나 되는 35억명의 신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여기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은 곳이 되었고, 그 우여곡절은 아직도 진행형인 상태입니다.
모든 종파들이 믿고 바라는 메시야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요.
그 우여곡절의 흔적을 찾아서 조금은 딱딱하겠지만 예루살렘의 역사이자, 성전의 역사를 드려다 보는 것도 앞으로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이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어진 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성소가 천막에 지나지 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주님께 바칠 집을 짓고자 계획했으나(사무엘하 7:2) 선지자 나단을 통해 여호와께서 다윗의 제안을 거절하셨습니다. 대신 그에게서 태어날 씨, 즉 후일의 솔로몬이 집을 건축하도록 하시었습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후 곧바로 다윗이 준비하여 놓은 자재들로 성전 건축에 착수하여 통치 4년 차에 성전 기초를 놓았으며, 7년 반 만인 BC 1005년경에 화려한 솔로몬 성전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여호와께서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6)고 다윗과 약조하신 약속은 성전이 완공된 후 34년, 솔로몬이 죽은 지 불과 5년 후부터 그 영광을 잃기 시작하였지요.
다윗과 약속하시며 주신 조건을 지혜의 왕이라는 솔로몬이 우상 숭배하는 여인들의 유혹에 미혹되어 “여호와를 떠나는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다시 애굽의 압제를 받으며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 (왕상 14:25~26)
기강이 무너져 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면서, 북 왕국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5세에 의해 멸망하였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남 왕국, 유다는 BC 58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2세에게 정복되어 성전과 왕궁은 물론 귀인들의 집까지 불살라졌으며,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이 무너지고, 유다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에 억류되어야 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에서는 관용 정책을 펴서 유대인 포로들을 이스라엘로 돌려보냈고, 성전도 재건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유대 여인 에스더가 왕비의 위에까지 오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부족한 자재들로 성전을 재건할 때의 지도자가 유다 왕실의 후예인 “스룹바벨”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복원된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제2의 성전이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에스라”와 “학개”에 기록된 문맥으로 보아 아마도 처음의 화려함을 재현하지는 못한 채 훨씬 축소된 규모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복원된 성전을 가진 유대 지역을 신흥 세력인 헬라인들이 점령하여 여러 신상들을 세우며 성전을 더럽히자
BC 164년 마카베오의 주도로 혁명이 일어나 자치정부를 이루며 신상을 제거하고 부서진 성전을 수리하였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절기가 “하누카”, 우리 말로 “수전절”이지요.
초라하게 겨우 성전의 명맥을 이어가던 중, BC 63년, 유대지방이 폼페이우스의 로마 공화정에 정복된 이래로 원래의 하스몬 왕조와 일진일퇴 끝에 BC 37년 로마의 지원을 받은 에돔 사람 헤롯이 유대 지역을 로마령으로 확정하고, 자신은 헤롯 대왕으로 즉위함과 동시에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성전을 크고 화려하게 개축하였습니다. (일설에는 개축이 아니라 새로운 재건축이라고도 합니다.)
이 성전이 제 2성전으로, 혹은 사람에 따라 제 3 성전으로, 예수님 당시 제자들이 보며 그 화려함에 놀랐던 성전인 것입니다.
AD 66년과 70년, 두번의 봉기가 진압당하며 성벽과 성전은 완전히 무너지고 철저히 약탈을 당한 후, 서쪽의 벽 일부만이 남겨지게 된 비운의 예루살렘이 되었고, AD 135년에 있은 마지막 봉기 때 로마군에 의하여, 유대인들은 전부 쫓겨나 세계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온갖 박해 속에 스스로 생존해야만 하였으니 성전 건축은 생각할 수도 없는 세월이었습니다.
AD 638년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으나, 그들은 기독교의 성지로 존중하여 기독교 공인 후 지어진 여러 교회들은 놔둔 채 솔로몬의 성전 터에 이슬람 사원을 세웠습니다. AD 691년에 준공한 모스크의 돔을 황금색으로 칠하였던 것이 1016년에 지진으로 무너져 내렸던 것을, 1319년 맘루크 칼리프 안 나시르 무함마드(An Nasir Muhammad)에 의해 재건축이 되어 우리가 오늘날 보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황금색을 칠한 돔이었으나 1993년 요르단의 후세인 왕이 650만 달러의 사재로 약 500 Kg의 24 K 순금으로 돔을 씌우게 하여 오늘까지도 찬란하게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황금 돔이 되어 예루살렘의 대표적인 건물이 되었습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으나, 1187년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재 탈환하였고, 1260년 훌라구의 몽골군이 예루살렘 근방까지 육박했으나 바이바르스가 이들을 몰아냄으로써 맘루크 왕조의 성지 관할권이 확립되었습니다.
1516년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400년 동안 지배하던 중 크림 전쟁(1853년부터 1856년까지 약 3년간 러시아 제국에 맞서 오스만 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4국 연합국간에 벌어진 전쟁) 중에는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등이 서로 성지 관리권을 주장하는 논쟁의 초점이 되었으나 결정을 못 보던 중, 1차 대전 중인 1917년 영국에 점령되어 위임통치령으로 확정된 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이민이 시작되었습니다.
2차 대전 종전 후인 1948년, 이스라엘이 중동의 작은 나라로 건국되는 우여곡절의 역사는 아직도 곡절의 구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나 봅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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