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에펠 타워 (Tour Eiffel) – 철의 혁명
프랑스! 하면 제일 먼저 떠 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에펠 타워일 것이다.
지금은 그 많은 화려한 것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 된 에펠 타워지만 그의 시작은 그리 축복받으며 탄생한 것만은 아니었다.
공학기술자의 신념에 의해 새로운 소재, 철을 도입하여 우아한 자태의 탑을 걸설하는 ‘철의 혁명’으로 시작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 박람회를 파리에서 열기로 계획을 결정하고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방문할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의 설계를 공모하였다.
결과 600여개의 공모 안들 중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 1832년 12월 15일 ~ 1923년 12월 27일)의 “샹 드 마르에 300 m 높이의 철제 구조탑 건설안”을 채택하여 세계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건축을 의뢰하게 되었다.
에펠은 이미 ‘자유의 여신상’ 공동 작업 등에서 가볍고 우아하고 극도로 강한 철 구조물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능력을 입증 받은 바 있지만 그 때까지의 건축 방식이나 관습에 생소한 철골 설계 도면이 발표되자 당시의 신문은 파리 예술 협회가 실은 비난조의 글들로 도배되어 졌었다.
"향후 20년간 우리가 도시 전체에서 보게 될 이것은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온 도시 미관을 위협하고 있고, 우리는 철판으로 엮인 역겨운 기둥의 검게 얼룩진 역겨운 그림자를 보게 될 것이다."라며 그 당시의 유명인사들이 연서로 반대 의견을 주장하였었다. 이 문서의 공표에는 장 루이 에른스트 메소니에, 샤를 구노, 기 드 모파상, 샤를 가르니에, 장레옹 제롬,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 그리고 알렉상드르 뒤마등이 참여하였었다.
지역 주민들은 탑이 자기 집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국가와 도시에 소송을 제기했고, 에펠은 직접 비용을 대고 위험을 감수한다는 조건으로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에펠은 스스로 공사 비용을 조달해야 했고 국가는 단지 150만 프랑의 보조금만 지불했다. 그 대신 향후 20년 간 단독 사용권을 얻었다.
결국 국가의 보조금으로는 650만 프랑에 달했던 경비의 4분의 1 정도만 해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재정적인 난관이 있었지만 건축가, 구조 공학자이자 사업가 기질을 가진 에펠은 당대의 프랑스 과학자 · 공학자 · 수학자 중에서 72명의 조력자와 함께 그 당시로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324 m(1,063 ft)나 되는 철탑을 건축할 수 있었다.
만국박람회 중에만 이미 200만명의 방문객이 찾았고, 이후로도 관람객들이 쇄도해 완공 1년 만에 흑자로 돌아서 모든 건축 경비를 되 찾을 수가 있었다.
결국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 건설 프로젝트 자체가 또 하나의 다른 혁명, 즉 공학 기술자의 기술력, 사업관리자의 진취적인 태도가 바탕이 되어 성공시킨 철의 혁명이 된 것이다.
탑을 지탱하는 4개의 거대한 다리가 곡선으로 된 것은 미적(美的)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란다.
에펠과 함께 구조 설계를 한 토목공학자 쾨클랭이 철로 된 가장 작은 부품에 대한 압력까지 계산한 결과 설계를 그렇게 곡선으로 해야 했기 때문이란다.
2년 동안 과학적인 설계에 의해 300명의 작업자가 정련된 부품 총 7,300 톤의 철제 조각18,038개를 250여 만 개의 리벳을 이용해 당시 인간이 세운 가장 높은 탑, 예술과 기술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에펠탑이 완성된 것이다.
쇠로 만든 탑이다 보니 금속의 열적 팽창. 수축에 따라 가장 낮은 온도에서 탑의 높이는 위로부터 18 cm 가량 줄어들게 되는데 이런 팽창과 수축을 130년 간이나 견디어 내도록 견고하게 조립 되었으며 주로 녹을 방지하기 위해 7년에 한 번씩 도색작업을 하는데, 한 번에 50에서 60톤의 페인트를 칠한다고 한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탑을 싫어했던 소설가 모파상은 탑이 완성된 후 거의 매일, 점심을 의도적으로 탑 안의 식당에서 해결했단다.
“탑을 반대하더니 왜 지금은 매일 이 곳에 오느냐?” 는 기자들의 질문에
“파리에서 유일하게 이 탑을 볼 수 없는 곳이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라는 그의 답변 역시 문인다운 현답으로 기자들의 가십을 잠재웠었다.
그리하여 완전 철골조의 에펠 탑은 완공 시점부터 1930년,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될 때 까지 41년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군림하며 오늘날까지 프랑스의 대표적인 상징물역할을 하며 매년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효자가 되었다.
1889년 9월 10일 토머스 에디슨이 탑을 방문했다.
에디슨과 에펠이 마주 앉아 담소하는 밀랍인형이 탑 안에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에도 한국의 봉이 김선달 같은 사람이 있었나 보다.
1925년 빅토르 루스티히가 탑을 두 번에 걸쳐 고철로 팔았었단다.
탑은 아직도 서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는 돈을 날리고 말았을까? 아니면 되 찾을 수가 있었을까? ㅎㅎㅎ (Letcher, Piers (2003). 《Eccentric France》. Bradt Travel Guides. 105쪽. ISBN 978-1841620688)
1940년, 파리가 독일에 점령 중이었을 때, 승강기 케이블이 프랑스군에 의해 끊겼으나 전쟁 때문에 복구가 불가능했다.
파리로 시찰을 나 온 아돌프 히틀러도 탑에 오르려 했지만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포기하고 올려다 보는 것으로 만족하였단다. 사람들은 이것을 일컬어, 히틀러가 프랑스는 정복했으나 에펠 탑은 정복하지 못하였다고 회자한다.
1944년 8월, 연합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히틀러는 파리의 군정장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에게 에펠 탑과 도시 전체를 파괴하라고 명령했지만 폰 콜티츠가 이 명령을 어겨 에펠 탑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파리의 해방 불과 몇 시간 뒤 끊어 놓았던 승강기 케이블을 복구해 운행을 시작하였다. 명령 불복종 죄를 지은 장군의 그 후는 어찌 되었을까?
밤이 되면, 매 시각 정각부터 약 10분간 에펠탑이 반짝 거리는 쇼를 볼 수 있다.
탑 아래 세워진 에펠 동상
2014년 10월 에펠탑을 걸어 다닐 수 있게 조성하였고, 바닥은 강화유리로 만들었다.
유리를 통해 보이는 먼~ 아래. 어떤 사람은 오금이 저려하고, 어떤 사람은 펄쩍 뛰기도 한다.
에펠탑과 마주보고 있는 샤이요 궁에서 본 에펠탑. 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뷰 포인트이자, 포토 존이다.( 샤이요 궁은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용으로 지어진 건물로 지금은 해양박물관, 인류 박물관, 프랑스 문화재 박물관이다.)
파리 시에서도 20년의 허가 기간이 끝난 후 탑을 무너뜨릴 계획이었으나, 그 동안 발전 된 통신 방법이 높은 곳에 설치 된 안테나를 필요로 하던 차에, 이 탑을 통신용도로 사용할 수 있음이 증명되면서, 또 동시에 건립 초기에 반대하던 여론도 점차로 수그러 들며 오히려 탑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자 기한이 지나서도 그 자리에 남아있게 되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55피트의 텔레비전 안테나가 덧붙여져서 텔레비전의 송신탑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일 높은 전망대에서
엄청 춥고 무척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바람 타고 날라 가지 말라고 하늘까지 가린 철조망이 튼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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