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서유럽 대가리

11 루브르 박물관( Louvre Museum,Musée du Louvre)

천천히 chunchunhi 2018. 12. 5. 07:53


11루브르 상.pdf


11 루브르 박물관(  Louvre Museum,Musée du Louvre)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라는데 누구도 이견을 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확고하게 박물관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이 원래는 바이킹의 침입으로부터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요새였었다. 이후 16세기에 이르기까지 궁전으로 새롭게 증축되며 개조되었으나 루이 15(Louis XV)가 베르사유로 궁전을 옮기고 나서 루브르는 주인 없는 궁전으로 방치되며 그동안 왕들의 후원으로 그려진 수많은 그림들, 그리고 유럽의 관습대로 이웃나라 왕실과 정략 결혼을 하면서 지참금처럼 가지고 온 많은 예술품들의 창고 역할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왕정이 무너지며 사회가 변혁되던 혼란의 시기에 혜성처럼 나타나 권좌를 차지한 나폴레옹 1세가 수없이 많은 원정 전쟁을 통해 예술품을 약탈하기도 하기도 하였지만, 때론 선물이란 형태로 받고, 그리고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매입도 하면서 모은 물품들이 많아 지게 되자 대규모 박물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입장료를 받는다. 그리고 박물관에 등록된 가이드가 아니면 박물관 안에서 가이드를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매일 들어 가려는 사람들이 많아 시간대별로 표를 구입하곤 항상 줄을 서야 한다.

 

루브르 미술관의 전시 작품은 크게 인류의 4대 문명의 시원을 나타내는 고고학 유물과 그리스도교 전례 이후의 서양 문명, 중세 예술, 르네상스 예술, 근대 미술 및 극동 지역 미술품으로 나누어진다.

워낙에 소장품이 많다 보니 며칠을 둘러보아도 다 섭렵할 수가 없기에 여행객들은 한나절 동안 유명한 작품들을 골라 보면서 루브르 방문을 마치고 만다.

그나마도 유명한 그림들이 많아 전시작품들을 때때로 바꾸어 달기도 하고 또 외국으로 순회 전시를 나가기도 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 하나 밖에 없는 유명한 그림을 항상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루브르는 BC 7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으로는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상”, “밀로의 비너스”, “모나리자등이 있다.

 

1981,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루브르(Grand Louvre) 계획으로 전시를 위한 공간 확보를 위해 전시관이 확장되고, 1989년 박물관 앞에 건축가 I.M. 페이(Ieoh Ming Pei)의 설계로 유리 피라미드를 세우면서 루브르는 대변신을 하게 되었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프랑스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중국계 미국 건축가에게 증축을 의뢰 하였는지, 그리고 수 세기에 걸쳐 유럽의 여러 건축양식으로 증축 된 루브르 앞 광장에 얼핏 어울리지 않을것 같은 강철과 유리로 된 피라미드를 건설하게 되었는지…. 그 이면 이야기도 재미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이 증축으로 인하여 관광버스 주차장, 식당, 사무실, 상점, 전람실, 창고, 주차장 등을 수용한 거대한 지하단지가 나폴레옹 궁과 카루젤 궁의 중앙 정원 밑으로 조성되어 많은 관광객들의 입장을 조금 더 수월하게 하여 주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입장권도 들어 갈 수 있는 시간대 별로 팔며 입장객 수를 제한하기에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면 현지 가이드를 따라 다니는 것이 시간도 많이 절약하며 효과적으로 관람을 할 수 있기에 권하고 싶다.

우리 일행들도 아침 일찍 도착한다고 하였는데도 벌써 많은 관광버스가 많은 사람들을 내려 놓은 후였다.  여기에 더해 삼삼오오 개인적으로 온 사람들까지 합하여 매표소 앞의 줄이 장사진이다.

유리 피라미드 아래에서 현지 가이드를 만나 오늘의 주요 관람작품과 동선을 듣고는 입장하려 서 있는 줄 옆으로 앞으로 나간다. 검표원과 포옹하며 인사를 하더니 그 옆으로 들어 가란다.  옆에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좀 미안해 지었지만 시간 예약을 하고 온 현지 가이드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이란다. ㅎㅎㅎ

밖에서 보기 보다도 엄청 크게 느껴지는 화랑과 회랑. 가이드가 없다면 미아가 되기 딱 좋을 만큼 넓고 크고 사람도 많았다. 벽에 걸린 그림들 또한 그 크기가 미술책에서 보던 크기와는 비교할 수 없도록 엄청 큰 대작들이다. 어떻게 저렇게 큰 캔버스를 만들 수가 있었을까? 저 큰 그림들을 그리기 위하여 화가들은 얼마나 많은 물감들을 샀어야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드는 것을 보면 미술에는 문외한인 계리사인 나의 직업병이 먼저 도지는 모양이다. ㅎㅎㅎ  

허긴 궁중화가에게 하사하는 금액은 그 당시 절대 권력을 쥐고 있었던 군주들에게는 푼돈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상

1863년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견되어 승리의 여신상으로 명명된 이 조각상은 해전(海戰)을 기념하기 위해 BC 203년쯤 로도스 사람들이 세운 듯하다고 한다. 발굴현장을 보면 이 조각품은 마치 물에 떠 있는 듯이 보이게 설치한 기함(旗艦) 위에 세워져 있었단다. 헬레니즘 시기를 대표하는 조각으로 기울어진 날개의 각도, 왼쪽 다리의 위치, 바람이 불어 여신의 다리를 휘감은 듯한 옷의 표현은 조각을 보는 사람들에게 상이 날아오르는 듯한 인상을 준단다.

승리의 여신상인데…. 사라진 머리는 그 승리를 취할 때 없어 졌을까? 아니면 발굴하기 전에 도굴꾼들에게…?

 

 

 

 

밀로의 비너스

기원전 2세기경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으로 알려진 이 상은 그리스인의 예술적 표현이 도달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인체를 철저하게 균형과 수학적 비례에 충실하게 조각함으로써 이상적 인간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려고 했단다.

비례는 당시 그리스 미학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서, 가장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비율로 생각한 ‘1:1.618’의 황금비가 적용되어 있단다.

이 비너스 상에는 여러 부분에 황금비가 담겨 있단다. 배꼽을 기준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이 이 비율이다. 상반신만 놓고 보면 머리끝에서 목까지와 목에서 배꼽까지의 길이의 비율, 하반신에서는 발끝부터 무릎까지와 무릎부터 배꼽까지 길이의 비율이 그러하단다.

결국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에도 수학이 적용되는가 보다.

그런데만약에 두 팔이 붙어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유명한 모나리자도 요즈음에는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선을 만들어 놓은 그 안에  방탄유리 뒤에 숨어 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앞에 모이기에 제대로 감상하기가 불가능하다.


 

자크 루이 다비드 의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캔버스에 유채 / 621×979cm / 1806~1807년 제작

   

그림 자체의 크기에서 보듯이 방대한 스케일로 이미 시선을 끈다.

그는 무려 204명이나 되는 인물들의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엄청난 스케치를 반복했고, 주연급 인물들의 경우에는 밀랍 인형까지 만들어 그것을 모델 삼아 작업했단다.

그림은 황제의 대관식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본으로 하지만, 참석하지도 않은 나폴레옹의 어머니를 정중앙에 배치하거나, 나폴레옹의 키를 훨씬 크게 그리는 등의 아부성 조작도 감행했다.

그 당시에도 교황이 황제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줌으로써 세속의 왕권도 결국 교회에 복종해야 함을 천명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례였으나, 나폴레옹은 손으로 왕관을 받아 스스로 쓸 정도의 당찬 면모를 지니고 있었단다.

다비드는 그런 나폴레옹의 심중을 파악하고 대관식 장면을 황제가 아내인 조제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워 주는 장면으로 바꾸었고, 교황 피우스 7세를 그저 자리에 앉아 무력하게 축복이나 내리는 존재로 그렸다.

물론 실제 대관식 행사에서는 황후의 관을 씌워 주지 않았다.

이렇게 조작된 그림도 그림으로서는 대작 이어서인지 아직도 루브르에 걸려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마치 실제 역사적인 장면이었던 것 처럼….

허긴 역사와 예술은 또 다른 차원일 테니까!

 

 


11루브르 상.pdf
2.2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