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여행기

79 콜럼버스의 무덤

천천히 chunchunhi 2015. 2. 9. 10:12

79 콜럼버스의 무덤

 

세비야 대성당 안에는 그 당시 스페인을 대표하던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나바라 의 왕들인 4명의 왕에 의해 떠메어진 채 아직도 허공에 떠 있는 콜럼버스의 관이 있다.  앞의 두 왕은 콜럼버스를 지원해 준 카스티야, 아라곤 왕이라 고개를 들고 있고, 뒤의 두 왕은 콜럼버스의 계획을 거절한 왕이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라 한다. 왜 그의 관은 허공에 떠 있는 것일까?

 

지동설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화형을 당하던 1480년대에 "저 바다 끝으로 나가면 그 비싼 향신료의 원산지이며 금..보화가 가득한 인도로 갈 수가 있다."며 배를 달라는 콜럼버스의 주장은 미친 광인의 외침에 가까워 아무도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었다.

더구나 그의 고향인 도시국가 제노아에서는 그가 원하는 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술조차 없었기에  1484, 그 당시 해양 강국이던 포르투갈에 가서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에스파냐로 갔다.

당시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 레온, 나바라로 구분되어 있었고, 이중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며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1486 1, 콜럼버스를 만나 그가 요구하는 사항들을 듣게 되었다.

콜럼버스는

1.기사와 제독 작위

2.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

3.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

이라는 조건을 제시하자 포르투갈에서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집과 집념이 대단한 독설가이기도 한 콜럼버스가 여왕 앞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 "여왕님은 그래도 나이보다 젊어 보이십니다."

이 한마디의 말 때문 이어서였던지, 아니면 당시 포르투갈 교회에 대한 경쟁의식으로 더 넓은 선교지가 필요했던 스페인 교회의 성직자들이 여왕을 설득했던 이유에서인지 결국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였고, 그가 발견하는 것의 10%를 콜럼버스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 하에 선박 2(핀타호와 니나호) 을 내주고 과거에 죄를 지은 자들은 면죄해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 주었으며, 또 팔로스항(Palos)에 사는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은 이슬람 세력의 최후 보루인 그라나다 공략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으므로 콜럼버스의 계획에 대한 최종결정은 그 후 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어, 실질적인 항해는 6년이나 지난 1492 8 3일에야 세비야에서 제1회 항해의 출범을 할 수가 있었다.

같은 해 10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Bahamas)에서 과나하니 섬(추정)에 도달했고, 이곳을 인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 콜럼버스는 신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의 섬)이라 칭하였다. 이어서 그는 쿠바와히스파니올라(오늘의 아이티와 도미니칸 리퍼블릭)에 도달하여, 이곳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칭하였다.

 

완전한 성공이라고 판단된 첫 번째 항해 덕분에 2번째 항해(1493. 9. 25 출발) 때는 17척의 배에 1,500명에 달하는 승무원이 경쟁적으로 승선했다. 그러나 히스파니올라 섬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의 희망과 기대는 실망과 불만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금광채굴에 징발되었던 원주민의 반란도 만성화되어 있었다. 콜럼버스는 황금과 향료 대신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들을 노예로 본국에 송환했으나(1495) 이사벨 여왕의 분노만 사고 말았다.

이같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3번째 항해(1498. 5. 30 출발)에 나서 향료가 나는 섬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무 성과가 없게 되자 1500 8월 그의 통치능력을 심사하기 위해 섬을 방문한 시찰관 보바딜리야에 의해 콜럼버스는 족쇄가 채워진 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렇게 해서 콜럼버스의 시대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502년 니콜라스 데 오반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된 뒤 마지막인 4번째 항해(1502. 5. 9 출발)를 하여 파나마 지협 일대를 배회했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이 귀국했다(1504. 11. 7).

결국 약속대로 이사벨 여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신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하며 많은 금과 노예들을 유럽으로 데려오게 되나 그를 후원하던 이사벨 여왕이 죽자 대신들은 콜럼버스를 처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뒤를 이은 페르디난드 2세는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콜럼버스는 궁지에 몰린 상황이 되었다.

이에 콜럼버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내 시신을 신대륙에 묻어 달라""죽어서도 절대 관에서조차 스페인 땅을 밟고 싶지 않다"고 유언을 했다고 한다.

콜럼버스는 1506 5 21일 스페인의 바야돌리드에서 죽었다. 이미 몰락한 가문이 된 그의 시신은 처음에는 스페인 세비야에 묻혔으나, 후손들에 의해 1542년 히스파니올라(현재의 도미니칸 리퍼블릭)의 산토도밍고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후에 스페인이 이 섬을 빼앗기게 되자 그 시신을 다시 스페인으로 옮겨 가 세비야의 대성당에 안치하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산토 도밍고 성당에서 콜럼버스의 유골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듯이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상기한 설이 지금까지는 가장 정설로 여겨 진다.

일반적으로 "미대륙 발견"은 백인들의 시각에서는 1492년의 콜럼버스의 중남미 제도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다른 설로는 1421년 명나라 정화가 미 대륙을 발견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서쪽으로 간 바이킹의 한 갈래가 아이슬란드를 거쳐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캐나다 북동부에 상륙하여 콜럼버스보다 500여 년 전에 신대륙을 발견했음을 오슬로에 있는 바이킹 박물관 앞에 흉상이 전시된 고고학자 안네 스티네 부부가 고고학적으로 연구하여 입증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은 이곳을 식민지화 하지를 않은 채 돌아  갔지만 유럽인들은 미대륙에 상주하며 약탈하여 자신들의 부로 이용하였기에  미 대륙은 콜럼버스가 발견하였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네들이 유럽으로 가져간 금, 은 보화와 진귀한 식물들, 감자, 담배, 그리고 많은 노예들이 결국에는 유럽의 근대화를 이루어 주었고, 풍족한 살림살이는 문예부흥을 주도할 수가 있었지만 동시에 남아메리카에 있었던 잉카와 마야의 문명은 몰락을 하고 말았다.

진정 "발견"이라는 말은, 그리고 "발전"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비야 대성당에 있는 콜롬버스의 관.

높이 3m 가로 2m 세로 2,5m 규모로 거대하게 제작돼 있다. 하지만 그의 무덤은 땅에 묻혀져 있는 것이 아닌 4명의 사람이 관 하나를 떠받들고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앞의 두 왕은 콜럼버스를 지원해 준 카스티야, 아라곤 왕이라 고개를 들고있고, 뒤의 두 왕은 콜럼버스의 계획을 거절한 왕이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라 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해서 세운

헤라클레스의 기둥과 콜럼버스 기념탑

세비야의 무리요 공원에 있다.

배에 새겨진 이름, "이사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