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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마사다(Masada) 4 비극의 전말

천천히 chunchunhi 2013. 2. 8. 09:20

53 마사다(Masada) 4 비극의 전말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통치를 시작한 때로부터 1,179년이 지나,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도 무너진 뒤, 더욱 황량하게 변한 유대 지방에서 악명을 날리던 시카리(Sicarii)라는 집단이 그때만 하여도 점령군인 로마 군인들이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기에 경비가 허술하던 마사다를 습격하여 진을 치게 되었었다. 이것으로 그렇게 큰 사건의 빌미를 만들어 주리라고는 그 아무도 상상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일단 이 곳에 근거지를 둔 시카리들은 끊임없이 로마군에게 반기를 들며 점령군들을 괴롭혔다. 그때 티투스의 후임으로 유대지방 총독으로 부임한 실바( Flavius Silva)가 티투스가 남겨 놓고 간 로마군 제10군단(일명 Fretensis)에게 진압을 명령하였다.

 

 

1만5천 명이 넘는 로마군이 진격을 하였으나 워낙이 험준한 요새요, 또 오를 수 있는 길은 시카리들이 효과적으로 방어를 하기에 다른 진입로가 없는 마사다 성채를 공성하기에는 그 막강한 로마 군단도 속수무책이었었나 보다.

그래서 로마 군들은 요새의 외곽 둘레에 토성을 쌓고 그 어느 누구도 마사다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오지도 못하게 포위하여 스스로 손을 들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성을 함락시키는 1차적인 포위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성 안의 사람들은 거의 2년을 용케도 버텼으니 속이 타는 것은 오히려 로마군들이었다. 성 안에 헤롯이 지어 놓고 비축해 둔 그 큰 곡식 창고와 저수조 덕이었다.

결국 로마군 사령관 실바는 2차적인 공성 방법으로 로마군과 노예들을 동원하여 토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높이가 200규빗(약 100미터)이나 되는 토성을 완성한 후 그 위에 사방이 철판으로 입혀진 60규빗(약 30 미터) 높이의 망대를 세우고는 베스파시안(Vespasian 네로가 신임한 로마의 장군. 일차적으로 유대 점령을 위해 파견이 되었으나 네로가 죽자 로마로 돌아가 황제가 되고 유대 점령은 그 아들 티투스(Titus)가 마므리 하게 된다.)이 고안해 내고, 후에 티투스가 수정 보완한 공성 장비를 배치하여 마사다를 공략하기 시작 하였다.

이것이 효과가 있어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자 시카리들은 이에 신속히 대처하여 나무와 흙으로 새로운 성벽을 구축하였는데 오히려 이 새로운 성벽이 탄력성 있게 충격을 흡수하여 로마의 공성장비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를 지켜 본 실바는 3차적인 공성방법으로 화공을 하기로 작정하고 횃불을 쏘아 올려 나무로 된 성벽에 불을 붙였으나 때마침 바람이 로마군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자, 오히려 로마군들의 공성장비가 불 탈 것처럼 위험하게 되었다. 어찌 할 줄을 몰라 전전긍긍할 때 무슨 조화인지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불어와 전세가 호전 되었을 때는 벌써 밤도 깊은 늦은 시간이었다.그리하여 실바는 그 다음날 총 공세를 하기로 결정 하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물론 한 사람이라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밤새도록 엄중하게 감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도 않았겠지.

이 밤에 마사다 성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마사다 비극의 클라이맥스다.

 

 

 

 

유대 역사학자 요세프스의 기록에는 두 페이지에 달하는 엘르아살(잔인하기로 유명했던 시카리들의 지휘자)의 연설문이 있는데···.이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하나 도망치려 하지 않고 다 자결에 참여하게 된다. 모두 다 자결 한 후인데 어떻게 연설문을 구하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명연설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960명의 시카리(Sicarii)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그 방법 또한 일본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하던 전체가 모여 함께 할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비를 뽑아 10명을 선출한 후 그네들이 자신의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을 먼저 죽이는 방법이었다.

전회에서도 잠시 언급을 하였듯이 시카리라는 집단들이 그동안 온갖 못 되고 악한 일들을 다 자행한 전력이 있는 자들이기에 아마도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이 일은 결국 후에 그 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싸우던 애국선열이 아니라 깡패, 건달의 집단이었다는 이야기가 회자 되는 원인을 만들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이렇게 10명이 모든 사람들을 다 죽이고 나서 다시 제비를 뽑아 남은 한 사람이 그 9명을 죽이고, 스스로 자결하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AD 73년 4월 15일 새벽, 로마 군인들이 성 안으로 들어 왔을 때에는 아무 저항이 없었다.이미 엘르아살이 지휘하던 시카리라는 집단이 이미 다 죽어 식은 시체들뿐이었으니까····

엘르아살은 그 연설에서 남은 곡식이나 무기들을 하나도 태우지 말고 다 남겨 두자고 하였다. 이는 그네들이 굶주려서 죽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명예를 위해서 자결하였다는 것을 로마 군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고···.그러나 항상 예외는 있게 마련인가보다.

수로에 숨어 살아남은 2명의 부녀자와 어린이 5명이 있어 그네들로부터 이 비극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