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마사다(Masada) 5 비극의 종말
이렇게 반란이 평정 된 후 로마 제국은 재발을 막기 위해 2개의 로마군 군단을 이 지역에 상주시켰다. 이런 세월이 약 60년 흘러, 130년 유대지방을 방문한 하드리아누스는 두 가지의 정책을 실시함으로 유대인의 분노를 샀는데 그 하나는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도시를 예루살렘 바로 북쪽에 건설하여 그의 10군단을 상주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에게 할례를 금지한 것이었다.
또한 70년 예루살렘 함락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의 자리에 로마의 신 유피테르(영어로 주피터, 그리스의 제우스 신에 해당) 신전이 지어졌는데 이와 같은 조치들은 유대인들의 반(反)-로마 감정을 고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AD132년, 당시에 유대인으로부터 존경받던 랍비 아키바 벤 요셉은 유대지방에 거주 하던 유대인들 사이에 반란의 기운이 팽배함을 느끼던 차에 시몬 바르 코크바라는 사람이 무리들 가운데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이를 대장으로 하여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항쟁의 구심점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바르 코크바는 아람어로 "별의 아들"을 뜻하는데 이는 구약성서 민수기 24:17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중에서 별이 나올 것이며...”라는 구절과 맞물려서 코크바가 진정한 메시아라고 여겨지게 되었고, 랍비 아키바 벤 요셉은 랍비로서 이를 확인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코크바의 항쟁은 급속하게 유다 전역으로 퍼졌으며 급기야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고 코크바는 이스라엘의 "나시"(왕, 통치자 라는 뜻)로 자처하며 "이스라엘 해방 제1년"이라고 새겨진 동전을 발행했고 아키바 벤 요셉은 유대교의 부흥에 나섰다.
그러니 또 로마가 가만히 있겠는가?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브리타니아에 있는 섹스투스 율리우스 세베루스를 지휘관으로 하여 다뉴브 근처의 군단을 돌려 진압에 나섰다.
세베루스는 유다북부에서부터 차례차례로 공격에 성공하고 134년 대대적인 공세를 펴서 유대인들의 항쟁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였다.
바르 코크바는 베르타에서 완강히 저항했으나 끝내 자결하고 136년 그 잔당은 전멸했다.
랍비 아키바 벤 요셉 역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연구자들은 하드리아누스가 원로원에 의례적인 승전보고만 하고, 로마제국의 권위를 과시하는 개선식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3년에 걸친 전쟁으로 로마군의 손실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오래 전에 티투스는 유대지방을 정복한 후 로마로 개선하여 거대한 개선문을 지어 오늘까지도 로마의 콜로세움 옆에 남아 있다.)
피점령지역에 가해지는 점령군의 잔혹행위는 무자비할 수밖에 없고, 살아남은 자의 신분은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진행되어 온 일들이었으니 이곳의 상황이라고 별 다를 일이 있겠는가! 새롭지도 않은 일일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유대인의 거점 요새 50개가 함락되었고 985여개의 마을이 폐허가 되었으며 사망자는 약 58만 명이라고 한다. 또한 수많은 유대인이 노예로 팔리고 강제로 다른 이역으로 이주해야했다.
예루살렘은 다시 한 번 철저히 파괴 되었고 그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완전히 바뀌어 철저하게 로마식으로 재건되었다.
예루살렘이 항상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항쟁의 진원지가 되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모든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했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다만 성전 파괴일(아브월 9일)에만 방문이 허락되었다.
AD 135년에 하드리아누스는 지금까지 유다로 부르던 속국의 이름을 “시리아 - 팔레스티나”로 바꾸어 “유대”라는 지명을 지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다. 더 이상 유대인이 이 땅에 대한 애착을 갖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던 것이다. 이후로 이 땅은 이스라엘이나 유대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더욱더 확산되었고, “예루살렘”은 이네들의 마음속의 고향이자 성지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때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고 부르게 되며 모슬렘이 중동을 장악하게 되자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황금을 입힌 돔으로 사원을 건립되었던 것이다.
2차 대전이 점점 확산되어 치열하여 질 때 영국을 도와 준 유대인들 디아스포라에게 영국은 종전 후 독립을 약속하게 되고, 이 약속은 후에 이곳에 살던 팔레스타인 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건국함으로 아직까지도 분쟁의 지역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마사다는 2세기에 유대인들이 잠시 탈환한 일이 있고 5~6세기에는 비잔틴 교회당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그 뒤 십자군들이 잠시 차지한 시기를 제외하면 방치되어 잊혀져 있다가 1838년, 아메리카의 여행가 에드워드 로빈슨과 E. 스미스에 의해서 정확히 확인되었다. 그동안 아랍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앗사바'(저주받은 곳)라고 했다.
그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팔레스타인 지역이 세계의 화약고 노릇을 하고 있으니
신의 강복을 받은 땅이 잘 못일까? 아니면 신의 선택을 받은 유대민족의 잘 못일까?
그도 아님 (유대인 입장에서) 아직까지도 오지 않은 메시아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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