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앙코르 여행기

7 작은 킬링 필드– 캄보디아, 씨엠립

천천히 chunchunhi 2011. 6. 2. 01:17

 이것이 우리의 Hardware다.

이 속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가에 따라서 시인도 되고, 사진작가도 되고, 정치하는 사람도 되고, 선한 사람도 되고, 악한 사람도 되고....

 

붉그스레 누렇게 변한 것이 여자들의 해골이다. 

 

 이 뼈에 근육이 붙으면 누가 얼마나 센가...? 하고 자랑하겠지?

 

 

 

 

이런 잔학성의 유산위에 더 잘 살아 보려는 몸부림,

새로 지은 호화로운 호텔들 

 

 정원에 아름답게 핀 꽃들은 그 땅속에 스며든 피맛을 보았을까?

 

 옛 전통 민속 쇼

 

 우리를 태우고 다닌 오토바이거. (인력거 대신)  여기 말로 뭐라고 했는데...영 기억이

 

 한동안 한국에서 효도 선물로 인기를 끈 상황버섯. 선물은 비싸야 한다는 인식때문인지 무지 비샀다. 당연히 안 샀지.

 

 니북(이북이 아님)에서 와서 채린 복한 음식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와서 부동산 붐을 너무 올려 놓았기에 여기 사람들이 매우 싫어 한단다. 이제는 자기들의 능력으로는 집을 장만할 수 없게 되었기에.... 곳곳에 있는 노래방과 소주집.

 

 한쪽에서는 노래를 하며 소주를 마시는데... 한쪽에서는 이렇게 석유를 사다가 호롱불을 밝히고...

 

 오래전 우리네도 이런 넝마주이가 많았는데.... 그래도 이네들은 자전거를 이용하니 옛날의 우리보다는 나은 모양이다. 우리는 어깨에 메고 다니었었는데....

 

 

 이제는 한국도 원조해 주는 국가가 되었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원조에 의존하였었는데....

 

 

 

 

길거리의 소도 이렇게 삐쩍 말라 있었고....

 

 두 여인의 대조.

 

 곳곳에 파인 도로

 

 재래시장

무엇을 먹는 것일까?

부화가 되기 직전의 계란이란다.. ㅇ으으~~~어찌 먹어? 근데 저네들에게는 별미라나....

 여기서는 보기 드믄 열대과일들....

 

찍혔다. ㅎㅎㅎ

작은 킬링 필드캄보디아, 씨엠립

 

1985, 킬링필드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전세계인들을 경악케 하였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 영화이기에 더욱 리얼하게 관객들에게 다가왔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화라는 것도, 누가? 어느 곳에서? 어느 방향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보는가? 따라서 생기는 왜곡되고 굴절된 영상이 맺히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정사라는 역사 마저도 쓰는  사람과 시대에 따라서 왜곡되기도 하고 미화되기도 하니까….

킬링필드가 되었던 이곳 캄보디아 역시 잔학성에는 모두 치를 떨지만 그런 일이 일어 나야만 하였던 것을 거저 숙명으로 받아드리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곳곳에 작은 킬링필드라는 납골당을 만들어 놓고 있는 같다.

 

시엠맆의 왓트마이(Wat Thmei) 사원 마당에 만들어 작은 킬링필드.

보드에 전시된 사진과 설명들은 읽기조차 힘들 정도로 햇빛에 바래있었고, 유리로 만들어 납골당에는 사람들의 뼈가 마치 마른 장작더미처럼 차곡차곡 놓여 있는 위에 해골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프놈펜에 가면 큰게 있단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마른 뼈와 해골.

섬찟하다기 보다는 인생무상이 먼저 마음에 다가왔다.

결국 저런 마른 뼈에 살짝 입혀진 살과 가죽이 우리라는 말인가?

그것을 가지고 미인이라 뽑내고,  뽑내고 싶어져서 이렇게 저렇게 성형수술을 하는 여자들….강건한 육체를 과시하기 위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6 복근을 만들려는 남자들….

정녕 그것만이 우리는 아닐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말하는 처럼 마른 뼈에 덧입혀진 살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과 혼이 들어가야만 우리 인간이 되어지는 것일텐데 나는 과연 영과 혼을 담을 그릇이 되어 있는가…?

 

눈에 보이는 뼈의 색갈이 다르다. 

어떤 뼈들은 조금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가이드 말이 그건 애를 낳은 여자들의 뼈란다.

여자가 애를 낳는 것이 그만큼 힘든 일이란다.   세상에….

없이 어머니가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우리 모두는 이런 힘든 일의 산물이라는 말이 되는 셈이다.

각설하고 킬링필드의 역사적인 배경을 조금 기술하기로 하자.

 

앙코르왕국이 13세기 자야바르만 7세의 치세가 끝난 점차 약화되어 14세기에는 서쪽의 아유타야와 남쪽의 퉁구 왕조 (현재의 미얀마), 그리고 동쪽의 베트남 사이에서 약소국으로 연명했다.

1431년에는 아유타야의 침공으로 수도 앙코르를 함락당하고 현재의 프놈펜으로 천도하기도 했으며  18세기 말에는 베트남에서 일어난 타이손 당의 난과 미얀마인의 아유타야 침공의 여파로 국토가 황폐화되기도 하였다.

 

1863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이후 계속해서 식민지로 남아있다가 1954 프랑스 공동체 내의 자치국으로 독립했지만, 베트남 전쟁등의 영향으로 인해 크메르 루즈가 득세하는 계속해서 정권이 불안정했다.

 

킬링필드란 1975년에서 1979 사이, 민주 캄푸차 시기에 캄보디아의 군벌 포트(본명 살로트 사르) 이끄는 크메르 루주(Khmer Rouge: 붉은 크메르)라는 무장 공산주의 단체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을 말한다.

원리주의적 공산주의 단체인 크메르 루즈는 3 7개월간 전체 인구 700 1/3 해당하는 200 명에 가까운 국민들을 강제노역을 하게 하거나 학살한 사건을 일컷는 말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생겨나게 되었을까?

캄보디아에  ‘평등주의’ 이상향을 꿈꾸던 포트(본명 살로트 사르)라는 젊은이가  있었단다.

1950 파리 유학 시절  반삭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어 캄보디아로 돌아 왔단다.

당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던 정치무대에 뛰어 들면서 베트남파와 정적들을 제거하는 일들이  격화될 수록 비등하는 잔학성은 다른 잔학한 행위를 부르고….

결국은 정권을 완전하게 장악하기 위하여 완전하게 잔학한 방법을 사용한 일들을 말하는 것이란다.

영화도 있었지만 영화는 서방의 시각에서 서방의 입맛에 맞게 각색이 되어진 것이라는데…..

그일 이후 캄보디아 국민들은 자녀들을 공부를 안시키었단다.

포트같은 인간이 생겨 날까봐. 

그래서 매우 높은 문맹률은 국민들의 역사를 다시 앙코르시대의 무지몽매한 인간들로 바뀌어지게 하였단다.

어린 아이들은 거리로 구걸을 다니고…..

그러던 것이 정권이 안정 요즈음에는 많이 개화되어 이제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동냥을 주지 말라고 홍보한단다. 그래야 들이 학교로 돌아 있다고

 

1989 이후 베트남군이 철군하였고, 1991년에는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고 유엔의 임시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1993년에는 망명해 있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를 다시 불러오고 보통 선거를 통해 정체를 입헌군주제로, 국명을 캄보디아왕국으로 바꾸었다. 이후 총리 센에 의한 쿠데타가 차례 있었지만, 1993 이후로 정치는 대체로 안정되어 왔다.

 

 

과연 정치는 무엇일까?

정권욕의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

그리고 인간은 얼마만큼 잔인해 수가 있는 것일까?

수많은 국민들의 삶과 생활의 질과 미래를  불과 안되는 사람들이 좌지 우지하게 있는 정치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인지….

비단 이것은 이네들만의 일이 아닌 모양이다.

가끔 보는 한국의 여의도 의사당의 결투를 보면서 느끼는 허탈함.

그래서 점점 잃어 버리는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

그러면서도 선거철이 되면 선거를 하는 나란 사람은, 아니 우리라는 국민은 과연 어떤 성향의 집단일까?

다행히 한국은 이제 경제 대국이 되어 세계에서 인정받는 나라가 되고, 그래서 한국사람이라는 것이 어떤 부분을 제외하고는 자랑스럽기까지 하지만

아직도 가난으로 기아선상에서 헤매이는 이네들을 보며 호화롭게 여행하는 나의 작태가  모순되는 같기도 하다.

허나 또한 이네들의 삶을 향상시켜줄 있는 하나의 관광 수입도 있겠겠지라고 자위를 하며 캄보디아를 수가 있었다.

입국할 때부터 돈을 달라하던 입국 심사위원들의 작태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