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즈부르크(Salzburg) 소금의 성
짤즈부르크(Salzburg) 소금의 성
그림과 같은 블레드를 떠나서 짤즈부르크로 가는 길은 알프스의 동편 자락이어서인지 산세가 험준하고 모든 산 봉우리들이 아직도 힌 눈을 이고 있었다.
청명한 공기에 투명한 햇빛, 울창하게 푸른 숲 저 뒤로 깍아지른듯한 바위산은 힌 머리를 반짝이고….
가까운 산기슭에는 파란 초원을 배경으로 빨간 지붕들은 인 집들과 한가롭게 노니는 소와 양 떼들. 이 또한 그림과 같은 풍경이었다.
이제 우리가 가고있는 짤즈브릌크.
우리가 알기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도시, 그리고 몇년 전에 모짜르트 탄생 250년 기념으로 떠들썩 하였기에 우리 귀에 조금 더 익은 음악의 도시정도인것이다.
이 도시에는 아직도 모짜르트가 탄생한 생가가 있어 관광객을 불러 들이고 있단다.
죽기는 비엔나에서 비참하게 죽어 지금은 그 묘소가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르는 불운의 천재 모짜르트.
그는 과연 어떤 인간이었을까?
그를 태어나게 한 짤즈브르크는 과연 어떤 곳일까?
짤즈부르크는 직역하면 '소금의 성'이라는 뜻이다.
알프스는 수 천 만년 전 바다 밑바닥이 융기작용에 의해 위로 솟구쳐서 형성된 산악지대. 솟구칠 때 바닷물이 같이 따라 올라와 고인 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 굳어져 암염이 되었단다.
짤즈부르크의 북쪽에는 지금도 거대한 암염이 존재하고 있단다.
짤즈부르크의 기원은 소금을 채취하기 위해서 짤자흐 강을 따라 오는 배들을 해적 질 하던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형성되었다.
그 후 중세의 봉건시대에 들어 이웃 지방뿐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소금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게 되었고, 이곳의 영주이자 대주교는 소금을 채취하여 나가는 상인들에게 염세(鹽稅)를 부과해 많은 부가 축적됨으로서 높은 곳에 요새처럼 성을 만들고는 귀족들과 함께 이곳에 거주하며 이곳을 다스려 도시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지은 성을 호엔짤즈부르크라고 부르며 1070년경에 처음 건설되었고, 그 후 1500년 초와 1700년대 후반의 두 번으로 나뉘어 개축, 확장되어, 중부 유럽에서는 가장 큰 성으로서 오늘날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주교보다 높은 곳에 살 수없었기에 자연스레 마을은 이 성 아래에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성내의 옛날 집들에는 아직까지도 오리지널 짤즈부르크인 들이 실제 생활하고 있으며, 중세에 사용되었던 고문실과 고문도구, 그리고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성의 가운데의 조그만 광장에는 커다란 보리수가 두 그루 있고 그 앞에 우물이 하나있는데, 후에 슈베르트는 이곳을 방문한 다음 비엔나로 돌아가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작곡했다는 일화가 있다.
"...성문 앞 우물 곁에 서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아래 단꿈을 보았네..."
이 성은 밑에서 보기보다 꽤나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위에 올라가면 짤즈부르크의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옴은 물론 뒤로는 알프스의 지붕들이 가슴에 몽땅 안길 듯이 다가온단다.
짤자흐 강 건너 신시가지의 뒤에는 숲으로 우거진 높은 언덕이 있고 그곳에 조그만 성당과 마을이 눈에 잡힌다.
이곳은 현재 성지로 보존되었는데, 중세 때 화재로 인해 마을의 모든 것이 한줌의 재로 변해버렸으나, 마을 한 쪽에 세웠던 성모 마리아상만은 불에 그을리지도 않은 채 온전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후에 이곳에 성당을 세우고 성지로 보존하게 되었는데, 이 성당은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곡이 처음으로 연주되었고, 나중에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게 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짤즈부르크는 유네스코에 의해 유럽의 민속촌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이런 역사작인 성이 있는 짤즈브르크로 가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곳 사람들은 그래서 지금도 바위소금을 먹는다는데, 맛은 바다 소금과 같지만 성분이 달라 몸에는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별도로 진짜소금을 따로 섭취한다고 한다나…?.
또한 해발 500미터의 높은 고도에 위치한 도시라서 기압이 낮기 때문에 혈압이 높은 사람이 살기에는 좋다고 한다. 고도로 인해 자주 현기증이 발생하므로 이곳 사람들은 커피를 진하게 마시고 음식을 짜게 먹는단다.
음식을 짜게 먹다 보니 모두가 다 짠돌이가 된 모양이지?
이곳이 중부유럽에서는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도도하고 고집 세며 자존심 강한 도시라니 말이다.
지금도 '짤즈부르크 사람' 하면 비엔나를 비롯한 나머지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고 한다.
심지어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전 유럽을 지배할 때도 이곳만은 마음대로 손을 대지 못할 정도였단다.
이곳을 다스리던 대주교는 당시, 군주대주교라고도 불리였을 정도로 종교상의 권위자일뿐만 아니라, 한 지역의 정치상의 군주이기도 했단다.
대주교는 문자그대로 이곳의 수장으로서, 교회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이곳의 모든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를 다스려왔다. 수도인 비엔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짤즈부르크. 오죽하면 한 때 오스트리아로부터 분리독립을 하려고 까지 했을까.
모짜르트의 고향이니 모짜르트에 대해 조금 드려다 보는 것도 괜챤겠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바로 대주교의 위세가 등등하던 시기, 1756년 1월 27일 아버지 레오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의 사이에서 7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볼프강 아마데 모차르트'라고 자기 스스로 불리길 좋아했던 그의 두 번째 이름을 오늘날 우리는 '아마데우스'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그 쪽이 리듬이 좋고 '볼프강'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데우스'라는 말은 '신의 은총을 입어'라는 뜻인데, 과연 신은 그에게 은총과 천직을 내려주셨던 것일까?
음악적인 재능으로만 본다면 그건 틀림없는 은총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의 삶을 보면 그렇게 행복하였던 생활만은 아닌것 같으니 과연 이를 은총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조금 망설여 진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일찍부터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기에 충분하였기에 6살의 나이에 비엔나의 쇤브른 궁전에 연주 초청을 받을 수가 있었겠고, 그리고 그 곳의 거울의 방에서 후에 유럽의 역사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하게 되는 당시의 또래,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청혼을 하였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을 보면 결코 범상한 아이는 아니었을 터이나, 그런 천재에게 천재를 보필할 수 있는 부인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만일 그 때 그 청혼이 이루어 져 마리 앙투와네트가 부인이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 속에 또 하나의 소설이 쓰여지게 되겠지.
모짜르트는 다섯 살 때 짤즈부르크에서 가장 가까운 바이에른의 도시 뮌헨을 필두로 비엔나와 체코의 프라하, 파리와 이탈리아 등지로의 많은 연주여행을 시작한다. 그의 천재성은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궁정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고뇌에서 나타나듯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아홉살때부터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짧은 생애동안 50여개의 교향곡을 남기었고,열두살때부터 오페라를 쓰기 시작해 당시의 음악장르를 거의 다 섭렵하다시피 하였다.
그의 초기의 오페라는 대중들에게 그리 큰 환영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련되며 깊은 맛을 내는 그의 오페라는 중량감과 형식적 완성감이 더해져 간다.
그는 쉴 새없이 대본을 쓰고 곡을 붙여갔다.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형식에만 치우쳐 살았던 인물들에 극적인 독자성을 부여했으며, 로렌초 다 폰테가 쓴 대본으로는 '코지 판 투테'와 '돈 지오반니'를 원작의 의도 이상으로 완성시킨다.
원래 '돈 지오반니'의 주제는 모든 한계를 무시하고 신비한 사랑을 파괴하는 방탕아의 잡스런 쾌락으로서, 기존의 '돈 환(돈 지오반니)'이 색마와 범죄자로 그려진 반면 모차르트는 그를 한 남자의 사랑을 구도의 절대성으로까지 상승시킨다.
이 '돈 지오반니'는 프라하에서 초연되어 프라하시민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게 된다.
이외에도 많은 교회음악과 미사곡, 그리고 장송곡을 남겼고, 주옥같은 피아노협주곡, 클라리넷 협주곡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모차르트에게 시련은 끝없이 찾아왔다.
자신을 아껴주고 음악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대주교 지기스문트 대주교가 서거한 후 후임으로 짤즈부르크를 다스리게 된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대주교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 인색하고 고집스러우며 형식적인 사람이었다. 후에 결국 모차르트와 대주교는 결별하게 된다.
1782년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버가의 둘째 딸 코스탄체와 결혼한다. 그러나 사실은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의 언니인 알로이지아를 사랑했었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바램이기도 했던, 부자로 한평생 살고 싶어했던 뜻마저 이루지 못한 채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새벽 비엔나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만다. 향년 35세였다.
12월 6일 오후, 그의 주검은 콘스탄체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발인하여 콘스탄체와 혼례를 거행했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최후의 성수를 맞은 뒤 공동묘지로 향했다.
모진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 묘지까지 운구마차를 따라간 것은 개 한 마리뿐이었다고 한다. 불운한 천재 모차르트는 결국 천민들이 한꺼번에 묻히는 공동묘지에서 최후의 안식처를 찾았다.
오히려 남의 나라인 체코의 프라하 시민들이 모차르트의 죽음을 더 슬퍼하여 12월 8일 3천명이나 되는 많은 인파가 프라하 시내의 성 니콜라스 성당에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장례미사를 거행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어쨌든 콘스탄체는 그로부터 7년 후 동거했던 남자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망부의 묘에 참배하려고 했지만 묻힌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그 장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런데도 정년 그에게 신의 은총이 있었다고 주저없이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아니, 어쩜 행복에 대한 개개인의 정의가 다르니 그럴수도 있기는 있을 것이다.
산길을 누비고, 돌고 오르내리다가 도착한 짤즈버그의 호텔앞에 내릴 때에는 사위가 어두운 밤이 되었었다.
방을 배정받고 골아 떨어진 다음 아침에 호텔을 나서보니 멀리 산정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고, 가까이 보이는 산정에는 무슨 레이더 기지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는 아주 한가로운 곳이었다.
이제 오늘도 맑고 좋은 아침을 주셨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여정을 즐겨야지.
처음으로 찿은 곳이 미라벨 정원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대위의 집으로 나오는 어마어마하게 큰 대 저택이다.
미라벨정원과 구 시가지
정문을 들어서자 오른쪽에서 하얗게 눈을 부시게 하는 빌딩앞에는 . 아름다운 정원이 카펫처럼 펼쳐져 있고 왼쪽까지 펼쳐진 정원 그 너머로는 구시가지 위로 짤즈브르크 성이 보이고…..
정원 중앙에서는 분수가 시원스레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정원 곳곳에 세워진 조각들을 그 자태대로 조형미를 한껏 뽐내고, 그 주위로 잘 단장된 정원수들…..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 수가 있었을까?
이 곳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도 이제는 다 죽어 역사에 묻힌 채 오늘의 우리처럼 찿아 온 방문객에게 그 옛날의 영화로웠던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에 그치고 말았으니…..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옸던 장소들을 몇군데 보여준 후에 자유시간이란다.
사진 찍기에도 바쁜 자유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구시가지로 들어 섰다.
한 곳에 이르더니 여기가 유명한 카라얀의 생가란다.
짤츠강변에 있는 아담한 집 정원에는 카라얀의 동상이 서 있었다.
짤츠강을 건너 성 안으로 들어서니 사람들로 꽤나 북적거린다.
골목을 몇개 돌아 들어 가더니 여기가 모짜르트의 생가라고 한다.
다닥다닥 붙은 6층 건물 중에 노란 색을 칠한 빌딩이 모짜르트의 생가라고 한다. 그가 태어 난 곳은 4층의 한 방이겠지.
우리는 거기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단지 그 방으로 연결된 초인종(요즈음 말로 초인종이지 그 당시에는 종을 울리는 줄이었겠지)을 보면서 요즈음 간판의 거리라고 불리우는 번화한 거리를 지나 광장으로 나왔다.
성채가 있는 언덕 바로 밑에 있는 카피텔 광장이다.
광장 주위에는 많은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줄지어져있고, 그 많은 자리들이 전부가 다 차 있으니 관광객인지, 현지 사람이던지 하여턴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광장을 지나 짤즈브르크 성으로 들어가니 오른쪽에 보이는 암벽을 파서 만든 극장이 있다. 이 안에 영화에서 경연대회를 하던 극장이 있다나….
우리 보고는 거저 겉만 보고 상상하며 가란다. 허허허
이것이 단체 구릅 관광의 단점이기는 한데…..
혼자 다니려면 교통편 하며, 숙식을 구하는 일, 또 관광지를 찿는일, 이 모두가 내가 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여로를 내 혼자 오려면 이 짧은 시간에는 택도 없으니 아쉬운 대로 따라 할 수 밖에는 없는 모양이다.
정신없이 끌려다니면서 기억에도 안 남는 설명을 듣고(이건 나만의 고민인지도 모르겠다.어차피 기억이 다 안되니 나중에 집에 가서 다시 자료를 찿아가며 회상하겠다는 생각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끌려가고….
비운의 천재음악가 모차르트의 빛나는 음악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영원한 음악의 고향 짤즈브르크의 짧은 관광은 이렇게 끝이났다.
다음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 뮨헨으로 떠나야 하니까.
내일 아침에는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니 뮨헨관광은 오늘 오후에 다 끝내야 한다.
그러니 서두를 수 밖에….
바삐 뛰어 다닌 짤즈브르크를 떠나면서, 빠른 리듬의 경쾌한 터키쉬 마치가 아니라 클라리넷 콘첼트의 아다지오가 흥얼거려지는 것은 나만의 템포였는지도 모르겠다.
짤즈브르크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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