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동 유럽 여행기

보스니아 - 모스타 - 스타리모스트, 드리나강의 다리

천천히 chunchunhi 2010. 8. 25. 04:30

 보스니아 -  모스타 - 스타리모스트, 드리나강의 다리

 

 

 

 

 

 

 

 

 

 

 

 

 

 

 

 

 

 

보스니아 -  모스타 , 드리나강의 다리

 

사라예보를 떠나서 다음 행선지인 드브로브닉으로 가면서의 일이다.

차창으로는 마을마다에 있는 많은 공동묘지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그리고 또 나타나고…. 길가의 건물들에는 수없이 많은 총알자국이 아직도 선명한데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집들은 폐허가 되어 잡풀이 무성하고….전쟁의 흔적이 너무나도 선명한 지역이다.

대체로 보스니아 내전 때의 상흔이라고 한다. 얼마나 많이 죽고, 죽이고 했으면……

심란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이드가

우리가 조금만 돌면 드브로브닉으로 가는 길목에 아름다운 다리가 있는데 여기에 들릴 수가 있단다.

예정 외의 관광을 하기 위해서 운전수에게와 자기, 가이드에게 한사람당 35유로씩 내면 들려 수가 있단다.

조금 쉬는 시간에 이야기 하던 드리나강의 다리라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품의 배경이 곳으로 경치가 좋단다.

떠나기 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하던 곳이라 사전지식이 하나도 없는 나이기에

조금 자세하게, 그리고 그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지  설명을 달라고 부탁을 하니 설명은 안하고 단지 한사람이라도 반대를 하면 안가겠단다. 허허….

그런 가이드에게 뭐라고 말을 하겠는가!

가만히 있었더니, 안가겠단다.

씁쓸한 기분으로 창박의 공동묘지와 폐허가 집들을 보며 앉았노라니 사람이 와서 가자고 한다.

나야 물론 조금이라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기에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만 가이드가 그런식으로 답을 하니 결국 보여 것에 자신이  없다는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밖에….

일행중에 한사람이 와서 동행한 분이  옛날에 소설 드리나강의 다리가 연상키워 보았으면 좋겠단다. 결국 내가 무엇이 볼만한 것인가를 물은 것이 내가 싫다고 해서 안가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허허….. 나의 욕심은 하나라도 보자는 것이요, 단지 무엇이 있는가 하고 물은 뿐인데….

나는 좋다고, 가자고 했지.

사람이 가이드한데 가서 가자고 하니 다시 물어 본다.

절대로 한사람이라도 반대를 하면 안가겠다고하며 모두가 좋으냐고 묻는다.

내가 언제 반대를 하였나?

곳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달라고 하였지. ㅉㅉㅉ

마지 못한 하면서 그럼 곳에 가겠노라며 먼저 돈을 걷으란다.

(아마도 예정에 없던 옵션으로 조금 너무 과하게 요구한 자격지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블레드에서 호수 가운데 성당으로 때의 그의 행동을 보면 다분히 그런것 같으니까그래도 그가 가이드이니 어쩌리요. 허허허)

그러는 동안에도 버스는 농촌길을 계속 달려 가고…..

한참을 가서 어느 조그마한 동네에 내려 놓는데….. 관광버스가 꽤나 많이 주차해 있는 것이 아닌가!

무언가 볼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렇담 진작에 조금 설명을 것이지…..성질하고는….

 

버스에서 내리니 높다란 콩크리트 종탑이 있는 성당이 보인다.

지금까지 돌로 멋있게, 그리고 높고 크게 웅장하게 지어진 성당만을 보다가 이런 콩크리트 성당을 보니 요즈음 사람들의 집짓기는 정말 형편이 없는 같으다.

이렇게 세멘트로 지어진 건물이 과연 얼마나 오래 갈까?

일행들이 길을 건너는 동안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 보니 벽의 채색유리도 어설프고….

허기사 하나님이 교회의 치장을 보고, 웅장함을 보려고 임재하시는 분은 아니니까 그게 무슨 대수리요마는 주님의 집을 짓는 사람들의 성의가 문제가 아닐까?

아무래도  요즈음의 장인정신이 옛날만은 못한 같다.

 

길을 건녀 골목을 조금 내려가니 아름답게 아치형으로 지어진 다리가 나온다.

드리나 강의 다리란다. 밑에 흐르는 강이 드리나강이니까.

(나중에 사실이지만 드리나 강의 다리소설에 나오는 다리는 다른 곳에 있는 , 다르게 생긴 다리였다.)

 

스타리모스트라는 이름의 다리는 16세기에 지어 졌는데 내전으로 인하여 1993 11월에 붕괴되었다가 다시 재건되었단다. 그래서인지 다리를 이루고 있는 돌의 색갈이 다른것이 눈이 띄었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양쪽 강변에는 전혀 다른 두개의 마을이 생겨났다고 한다.

한쪽은 카토릭이고 한쪽은 이슬람.

그래서인지 이곳으로 걸어 오면서는 성당을 보았는데 다리 저편에는 모스크가 높게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다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들 하는데 이유는 외관때문만이 아니라 그에 얽힌 역사적 사실 때문이라고 한다.

 

1990, 내전이 일어 났을 때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합동하여 이 곳을 공격하였을 때 항상 으르렁 대면서 싸우기만 하던 강변의 두 마을이 이 때 처음으로 종교와 이념의 벽을 깨고 서로 합심하여 이 지역을 지켜 내었기 때문이란다.

다리 중간이 높게 둥근 아취를 이룬 그 밑으로는 파랗다 못해 초록빛이 감도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몇명의 젊은이들이 빨간 모자를 쓰고 카약을 타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정경이었다.

다리 교각 옆으로는 자그마한 폭포가 흐르고…..

다리를 넘어가니 옛날에 이곳을 점령하였던 터키 사람들이 살 던 곳이다. 지금도 터키 영사관이 이 골목에 있었다

특이한 것은 집들의 지붕이 전부 돌로 되어 있는 것이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전부 가게로 변하여 지나가는 관관객들을 부르는 골목길을 누비며 옛 정취를 맛보고는 다리를 건너와 강가로 내려가 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는 물도 꽤나 맑았고, 물살이 제법 센 축이었다.

사진 몇장을 찍고는 다음 행선지로 향하였다.

모두들 잘 왔다는 감탄을 발하면서….

그러니 내용을 물어 보았다가 괜히 못올뻔하게 나는 머쓱해 졌나? ㅎㅎㅎ

 이 글을 쓸 때 즈음에야 알게 되었지만 단체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가이드의 농간에 놀아나야만 할 때가 있나보다.

나중 안 일이지만 엄청 바가지를 썼던 것을 모두 알가나 할까? ㅎㅎㅎ.

 

후기를 쓰면서 드리나강의 다리에 대해 알아보게 되었다.

모스타 다리 밑을 흐르는 이 강은 드리나강이 아니고 네레트바(Neretva) 강이었다.

이 곳에서 약 3시간 거리인 230km 정도 떨어져 있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도시 비셰그라드라는 작은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드리나 강 위에 놓인 다리가 소설의 배경이 된 드리나강의 다리인 곳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아름다운 다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도시 이름인 모스타  Bridge Keeper, 다리 지킴이라고 하니 결국 이 다리를 지키기 위해서 이 도시가 이름지어진 모양이다. 

 

이 다리가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드리나강의 다리이다.

 

소설드리나강의 다리1961 '조국의 역사와 관련된 인간의 운명과 인류의 문제를 철저히 파헤치는 서사적 필력'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이보 안드로비치”가 스웨덴의 한림원으로부터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책이다.

16세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도시 비셰그라드와 이 작은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드리나 강 위에 놓인 다리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400여년의 인간사를 조명한 대하소설이다. 특히 11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석조 다리가 이야기 구성의 구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드리나 강 위에 세워진 다리를 중심으로 나누어진 마을 카사바에서 세대를 가로질러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한 연대기일뿐만 아니라 종교에 의해 나우어진 주민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연대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슬픔보다 더한 진실, 고통 보다 더한 현실’을 극복 하고자 했던, 조국의 독립을 도모하다 체포되어 적들의 감옥을 전전하던 시절 외세에 강점당한 조국 보스니아의 슬픈 현실을 잘 반영한 책이기도 하다.

여기에 인터넷에서 빌려 이보 안드로비치의 드리나강의 다리 독후감을  싣는 것으로 당시의 배경 설명을 대신 하기로 하자.

 다음은 석기자에서 퍼온 글이다.(KBS 김석기자의 블러그에서)

 

미국의 저널리스트 피터 마쓰가 보스니아 내전을 취재하고 < 이웃을 사랑하라> 앞부분에는 세르비아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인용한 대목이 나온다. 하나는 터키의 지배를 받던 시절 라디사브라는 이름의 세르비아인이 다리 공사를 방해한 죄로 끔찍한 사형을 당하는 장면, 다른 하나는 1 대전 발발로 비셰그라드의 평화가 깨지는 상황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다.

 

 “약 2.4m 길이의 참나무 막대 끝에는 날카로운 쇠촉을 달고 막대 전체에 돼지기름을 바른다. 그런 다음 이를 위해 미리 칼로 도려 입구를 넓혀 놓은 사형수의 항문에 막대를 박아 넣는다. 집행인은 사형수가 오랜 시간 살아 있으면 보너스를 받게 되므로 나무망치로 막대 끝을 치며 서서히 조심스럽게 사형수의 복부 부분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는 중요한 장기에 구멍이 나지 않도록 최대한 애를 쓴다. 막대가 복부를 비집고 올라가 , 비장, 횡경막, 폐를 지나 심장을 살짝 스치고 사형수의 등에 있는 어깨 근육을 통해 밖으로 나오게 되면 성공한 것이다. 다음 막대를 45 각도로 들어 올려 모든 사람들이 있게 하는데 사형수는 이때까지도 살아 있어야 했다. 고통으로 몸을 비틀며 사형수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렇게 매달려 있었다. 그의 적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마을 개들은 흘러내리는 피를 핥아 먹는다. 안드리치 소설 속의 세르비아인 사형수는 거의 하루 동안을 살아 있다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고문자들에게 장렬한 마지막 말을 내뱉는다. “다리 위의 터키 놈들아… 너희는 개처럼 죽어라… 개처럼!””

  

“사람들은 박해받는 사람들과 이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의 부류로 갈라진다. 인간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으며 법과 인습이라는 장벽이 사라질 때까지는 감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던 야수가 이제 자유의 몸이 된다. 장벽은 무너지고 신호가 보내진다. 인류 역사에서 자주 나타났듯이 이제 상위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갖고, 정해진 룰에 따라, 특정 부류에 속하거나 특정 종교를 가진 일부 집단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폭력, 약탈, 심지어 살인에 대해서까지도 무언의 허가가 내려지는 것이다.... 수세기의 전통 위에 세워진 상업 지역은 안에 자취도 없이 파괴돼 버린다. 적대감, 시기, 종교적 반감, 야비성, 잔인함 등이 가려진 채로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용기, 동지애, 절도와 질서에 대한 의식도 공존하여 이러한 부정적인 본능들을 통제하고 진정시켜 그런 감정들이 공동 생활의 보편적 이익에 굴복하도록 했던 것이다. 상업 지역을 40 동안 이끌어오던 사람들은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죽은 듯이 사라졌고 그들이 표방했던 관습, 관행, 제도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소설은 드리나 강의 다리를 중심으로 4백여 넘게 보스니아의 비셰그라드에서 대대로 삶의 터전을 일군 사람들의 연대기다.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혼재된 작은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드리나 강의 양안(兩岸) 잇는 다리는 “훨씬 부유하고 발달한 도시들에서도 찾아볼 없는 유일한 () 갖춘 건축물인데다 드리나 강의 , 상류에서 유일하게 안전하고 확실한 횡단로이며, 보스니아를 세르비아와 잇는 길을 연결시키고 게다가 터키 제국의 다른 지역들과 심지어는 이스탄불까지 잇는” 중요한 관문으로 묘사되어 있다. 드리나 강의 다리는 발칸의 복잡다단한 부침의 역사를 고스란히 목도한 증인이 된다. 그러므로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드리나 강의 다리다. 다음의 대목을 읽어보면 다리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단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모든 위대하고 아름답고 유용한 건축물의 기원과 생명은 그것이 세워진 장소에 따라 운명이 정해지듯이 안에 다양하고 신비스러운 역사를 종종 안고 있다. 그리고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다리 사이에는 수백 동안 이어오는 긴밀한 연대가 있다는 것이다.

다리 가운데 불룩 나와 있는 일종의 전망대 같은 역할을 하는 ‘카피야’에서 사람들은 삶과 역사와 철학과 운명을 이야기했고, 연인들은 사랑을 속삭였다 한다. 진정 다리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바로 그곳을 묘사한 작가의 표현을 따라가다 보면 드리나 강과 주변으로 펼쳐진 유서 깊은 도시 비셰그라드의 풍경을 ‘카피야’에 서서 둘러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다리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은 그런 신비감을 더욱 부채질한다.

 

“물 속에서 ‘뭔가’가 석공 라데에게 스토야, 오스토야라는 이름의 쌍둥이 남매를 찾아 다리의 중앙 교각에 묻어버리라고 속삭이며 일러주었다. 이내 보스니아 전역에는 그들을 찾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쌍둥이를 찾아 데리고 오는 사람에게는 상금이 수여될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보초병들이 조금 떨어진 어느 마을에서 쌍둥이 남매를 찾아내자 베지르의 부하들이 그들을 강제로 빼앗았다. 그러나 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자 어미는 욕을 해대거나 구타를 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울며 사정을 하며 아이들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며 급기야 그들을 쫓아 비셰그라드까지 오게 됐다. 그곳에서 그녀는 석공 라데에게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다.

 

그들은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교각 속에 넣고 벽을 둘러쳤는데, 사람들 말에 의하면 라데가 불쌍한 어미가 자신의 희생된 아이들에게 젖을 먹일 있도록 교각에 구멍을 남겨놓도록 했다고 한다. 그것들은 총구멍처럼 좁고 훌륭하게 깎아놓은 막힌 창들이었는데, 지금은 들비둘기들의 둥지가 되어버렸다. 일을 기억하기라도 하듯이 벌써 몇백 동안이나 벽에서는 어미의 젖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바로 년에 한철 흠잡을 없는 건축물로부터 흘러내리는 백색의 가는 물줄기였는데, 물줄기는 위에 지울 없는 흔적을 남겨놓았다. (여자의 젖에 대한 생각은 아이들의 의식 속에서 아주 친근감 있고 강한 향수를 느끼게 하며 베지르나 석공처럼 막연하고 신비스러운 동시에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거절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교각들마다 젖의 흔적을 갈아내어 아이를 낳은 후에도 젖이나오지 않는 여자들에게 효험 있는 가루로 팔았다.

  

터키 제국이 ‘혈세’라는 명목으로 어린 소년들을 세금 대신 징집해가자 어머니와 할머니와 모든 여자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해야 했고, 다리 건설을 방해한 죄로 붙잡힌 라디사브는 불에 달군 쇠사슬이 발가벗겨진 몸에 둘리고 집게로 발톱을 빼는 고문을 당한 끝에 인용문에 묘사된 것처럼 끔찍한 방법으로 처형을 당했다. 비셰그라드를 끝없는 갈등과 반목으로 몰아간 뿌리 깊은 종교 분쟁은 다음 대목에 묘사되어 있다.

“땅과 권력과 인생관과 질서를 위해서 종교 사이에 세기를 두고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어마어마하고 기이한 전쟁에서 양쪽들 각각 여자와 , 무기뿐 아니라 노래마저 서로 빼앗았던 것이다. 많은 노래 구절들을 아주 귀중한 전리품인 이쪽에서 뺏어가고 저쪽에서 뺏어오고 하였던 것이다.

일상화된 폭력에 사람들이 무심해졌음을 묘사한 다음 대목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세르비아에서 폭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카피야에는 개의 목이 걸려 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 때에는 감각이 둔해지고 무뎌지는 속도도 빨라져서 사람들은 얼마 잘라진 목이 너무 눈에 익어서 옆을 무관심하게 지나가게 되고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고 그래서 머리가 없어져도 언제 없어졌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전쟁을 피해 마을로 흘러든 피난민 행렬과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을을 없는 공포로 몰아넣곤 했던 서로 다른 국가의 군대들, 사람들의 일과 사랑과 결혼과 술과 도박 같은 소소한 일상들, 모든 삶의 변화는 사람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타났다가는 이내 사라져갔다. 분명한 것은 살아 있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뿐이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 앞에 인간은 얼마나 하잘 없는 존재처럼 여겨지는가. 작가는 이렇게 쓴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다리와 카사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그런 사건들이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이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가장 평범한 삶의 모습 아닐까.

 

드리나 강의 연대는 1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끝난다. 어느 세르비아 국수주의자의 암살이(사라예보의 라틴다리에서 있었던 ) 촉발한 거대한 전쟁이 자신들을 덮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마을 사람들에게 역사의 소용돌이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삶의 일부였다. 그것은 발칸의 운명이었고, 드리나 강의 다리의 숙명이었다. 피터 마쓰가 인용한 1 세계 대전에 대한 작가의 ‘시공을 초월한’ 설명은 번역자가 서로 다르고 번역의 원전이 서로 다른 이유로 소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겨져 있다.

 

“사람들은 핍박을 하는 자와 받는 자로 나뉘어졌다. 사람 안에 살고 있는, 그리고 감히 모습을 드러낼 없는 굶주린 짐승이 좋은 관습과 법의 장벽을 넘어서 이제는 자유의 몸이 것이다. 신호가 떨어지고 장벽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흔히 일어나듯이 만일 그것이 이익을 위한 것이고 확실한 통제 하에서 정해진 수의 사람들과 정해진 명분과 확신이 있게 행해진 것이라면 포악, 약탈 그리고 심지어 살인까지도 묵인되었다. 시대를 살았던 맑은 정신과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사람들은 기적이 어떻게 행해지고 하룻동안에 인간 사회가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를 있었다. 적대감, 시기, 종교적 갈등, 그리고 잔인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모든 야만적인 본능을 억누르고 마침내는 이것을 안정시켜 사람들을 보편적인 인생의 목표로 훌륭하게 이끌어가는 용기, 동지애, 그리고 법률과 질서에 대한 추구가 살아 있던, 세기를 거듭해 오던 전통이 있는 장터가 만에 사라져버렸다. 장터에서 40 년을 주도해왔던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이야기하던 습관들과 의식들, 제도들과 더불어 죽어버린 것처럼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드리나 강의 다리를 축으로 펼쳐지는 비극적 삶의 연대기는 소설을 문학이 아닌 역사로 읽게 만든다. 이보 안드리치가 써내려간 인간과 역사에 대한 수난의 기록은 그러므로 발칸이라는 한정된 무대를 넘어서는 인류 보편적 담론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허리가 잘린 비극의 역사를 간직한 우리에게 그것은 누구보다 익숙한 경험일 있다. 언젠가 드리나 강의 다리 위에 서서 이보 안드리치가 써내려간 역사와 인간의 삶의 문제를 차분한 마음으로 사유할 있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