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라틴 다리
다리 밑을 흐르는 흙탕물
내전의 상혼
내전의 결과
사라예보
아 참, 산길에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국경을 넘으면서 또 한참을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빼먹었나보다.
보스니아 또한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입국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을 보니 아직 유럽연합에 속하지를 못한 모양이다.
머슬림이 인구의 태반인 유럽 속의 모슬림 나라가 보스니아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외곽에 새로 지어진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런데… 이게 뭘까?
방에 싱글베드 두개가 붙어 있는데, 그 사이로 12인치정도의 높이로 나무 담이 서 있는 것이…..
밤새 옆에 자는 사람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인 모양이지? 허허허
아무리 모슬림의 나라라고 하여도 자식을 낳을테인데….우리야 피곤에 절어서 옆에서 거들치는 것 없이 편안히 잠을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은 잔뜩 흐려 있고, 금세라도 비를 쏱을 기세다.
버스로 처음 간 곳이 라틴 다리다.
라틴 다리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한 장소로서 유명해진 곳이다,
다리 자체는 별 특이한 것이 없으나 이 위에서의 사연이 기가 막힌 것이니까.
마치 개성의 선죽교처럼 말이다.
내용인즉은 이러하다
1914년 6월 28일,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가장 맑게 갠 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가 보스니아라는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8세의 청년이자 대학생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된 사건이다.
프린치프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로, 전 남슬라브인들의 통일, 구체적으로는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독립하여 독립국인 세르비아와 합칠 것을 원하였다(남슬라브 운동).
그러다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군사연습을 보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프린치프와 네디엘코 카브리노비치 및 4명의 혁명가 학생들이 음모를 준비했다.
황태자 부부가 탄 차는 일차적으로 카브리노비치가 던진 폭탄을 맞아 테러를 당했으나, 혈기왕성한 황태자는 폭탄을 주워 테러범에게 도로 던져 위기를 면했다. 밤이 되어 차를 타고 가던 중 황태자는 아까 자신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 것이라며 걱정하였고, 폭발 사고로 부상당한 관리를 방문하기 위해 병원으로 차를 몰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운전사는 길을 잃었고, 이 틈을 타서 저격범 프린치프가 차 앞으로 뛰어들어 총을 쏴 먼저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고 다시 총을 쏴 부인 조피를 암살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는 나중 심문에서 프린치프는 조피가 아니라 보스니아군 사령관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장군을 겨냥했다고 한다.
그러니 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장소에 있었던 황태자가 죽음으로서 도화선에 불이 붙은 셈이다.
세르비아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은근히 부추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했다.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 동맹국 독일의 협조를 요청했고, 여기서 외교사 최대 실수로 평가되는 “백지 수표”를 빌헬름 2세가 약속한다. 오스트리아를 무조건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1878년에 체결된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래 이 동맹은 독일이 주도하고 오스트리아가 따르는 구조였음에도,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 때부터 오스트리아가 주도하고 독일이 따라가는 것으로 전도되어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일찍이 이것은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독일이 건네준 백지 수표를 믿고 7월 23일 세르비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낸다. 답변 시한은 48시간이었다.
1.모든 반(反)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할 것.
2.암살에 관련된 모든 자를 처벌할 것.
3.반(反)오스트리아 단체에 관련된 모든 관리를 파면할 것.
4.여기에 관련된 당사자를 조사하는 데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로 들어가 도울 것을 허용할 것.
이 조항들을 내민 오스트리아의 속셈은 세르비아가 최후통첩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 최후통첩이 노린 것이 무엇이었냐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많다.
각 조항들이 세르비아의 주권과 자존심을 짓밟는 항목들이어서 전쟁을 의도했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오스트리아가 보낸 최후통첩에는 최후통첩을 거부했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르비아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이 최후통첩을 "시한이 정해진 요청문"으로 분류해서 세르비아 정부에 전달했다.
생길지도 모를 파국을 피하고 싶었던 세르비아 정부는 1, 2, 3항까지는 굴욕을 참고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4항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고, 결국 세르비아는 이 최후통첩을 거부한다.
오스트리아는 바라던 바를 이루었기 때문에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러시아가 7월 29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러시아와 프랑스에 동시에 최후통첩을 발했다. 러시아에 대한 최후통첩은 “총동원령을 해제하라. 안 그러면, 전쟁 상태로 간주한다. 12시간 내 답변하라.”였는데, 러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에는 “만일 독일이 러시아와 전쟁 상태로 들어가면 프랑스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18시간 내 답변하라.”라고 발했다. 프랑스는 프랑스의 국가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고 답변했다.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후 각국은 서로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전쟁은 7월 28일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것이 세계 1차 대전으로 확대되었고, 이 전말의 시작이 사라예보 사건인 것이다.
아직도 간간히 뿌리는 비, 어제 내린 비로 인하여 라틴 다리 밑을 흐르는 물은 뻐얼건 황토물이었다.
이런 황토물도 시간이 흐르고, 비가 그쳐 안정이 되면 산에서 흘러 내리는 맑은 물, 시원한 물이 될 수도 있겠지?
어째 흐르는 강물이나 사람사는 인생이나 그 인생이 쌓여 이루는 역사나 다 매 한가지인 모양이다.
탁류로 휩쓸다가는 잔잔한 맑은 물이 되기도 하고….
한 때에는 서로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또 시간이 지나면 다정하게 지내는 나라들 처럼 개개인의 삶의 변화 또한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런데 왜 아직 종교에서의 반목만은 그 반목이 다시 변하여 하나로 될 수 없는 것일까?
다리에서 벗어나 골목를 몇개 도니 이 곳이 사방 반경 200미터안에 세계의 4대종교, 즉 유대교, 이슬람교, 캐토릭교, 개신교가 함께 공존하는 곳이란다.
한 곳에는 모슬렘 사원이 있고, 그 옆에는 유대인 회당이 있고, 조금 너머에는 성당의 종탑이 있고… 그 어디엔가 있을 교회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좁은 골목이 굽이 굽이 이어진 구시가지에는 은과 구리로 세공하는 세공 업소가 많았다.
여럿의 갈림길이 한 곳으로 모이는 곳에 넓은 광장이 있고 그 중안에는 분수대가 있었다.
세빌리라고 불리우는, 분수 보다는 음수대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 겠다. 흐르는 물은 마음껏 마셔도 괜챤을만큼 깨끗하다니까…
그 주위에는 수 많은 비들기들이 던져주는 모이에 따라 날라 올랐다가는 내리고…. 평화스로운 모습이었다.
이런 곳에서 왜 그리 살벌한 전쟁이 일어나고, 내전이 생기고 한 것일까?
결국 이 평화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을까?
평화가 왔을 때에는 그 평화를 위해 싸우던 사람들은 다 죽은 다음인데…..
점심을 먹기 전까지 자유시간이란다.
골목길의 편의점에 들어가 콜라를 사려 하니 여기는 유로를 통용하는 곳이 아니지 않는가?
5 유로를 내고 콜라를 한병사니 잔돈을 이곳 돈으로 준다. 그래서 이것 저것 주워 넣으면서 그 잔돈을 다 쓰다 보니 5유로로 소프트 드링크 2병과 물 한병, 포테이토 칲 2개를 사고도 동전이 하나 남는다.
허허 물가가 엄청 싸다.
그동안 고속도로 주면에서는 콜라 한병에 2유로씩이었는데….
그래서인가?
남자 옷 파는 가계에서 골텍스 쟈켓을 걸어 놓았기에 가격을 물어 보니 60유로란다.
그럼 카나다 돈으로 $90.00정도인데 이렇게 쌀 수가 있나.
하나 사고 싶은데 왜 내게 맞는 사이즈가 없는지…..
아무리 입어 보아도 내게는 좀 너무 컸다. 결국 아쉬웁게 놓고 나왔지만 참 안 떨어지는 발길이었나.
내가 골텍스를 얼마나 좋와 하는데….
점심을 먹고는 드브로브닉을 향하여 비오는 사라예보를 떠났다.
보스니아
(보스니아어: Bosna 보스나, 세르비아어: Босна 보스나)는 북쪽과 동쪽 국경을 만드는 사바 강과 드리나 강 그리고 파노니안 평야의 남쪽 국경까지 이르는 지역을 나타낸다. 크게 디나르알프스 산맥에 놓여 있다. 남쪽의 지중해쪽은 헤르체고비나 지역이다.
1908년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뒤
1914년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Sarajevo)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암살되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구성하는 공화국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1992년 3월 분리 독립하였다.
사라예보
사라예보(Sarajevo, 세르비아어: Сарајево, 문화어: 싸라예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다. 인구는 1991년의 조사에 따르면 429,672명이며 현재는 약 40만명으로 추산된다.
발칸 반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14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세워진 이래로 긴 역사를 자랑한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암살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라예보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민국에는 1973년 이에리사가 주축이 된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의 단체전 우승으로 알려진 도시다. 1984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이며,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 포위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사라예보 국제 공항이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1531년 처음 대학교가 세워진 교육의 중심지이다. 종전 후 안정을 되찾으면서 관광지로도 다시 부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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