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던 그 모리아 산에 지금은 회교 사원이 황금옷을 입고 서 있다. 허기사 이슬람도 이스마엘의 후예,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나팔 불 때 빨리 일어나서 먼저 들어가려는 욕심은 죽어서도 성문 밖에 줄을 서서 기다리게 하였으니.... 이는 산 사람의 욕심일까? 아님 죽은 사람의 욕심일까?
천사가 내려 올 때 동하는 그 물 속으로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고 하던 베데스다 연못가의 오늘 모습
주님께서 기도 하시던 겟세마네 동산 올리브 언덕. 이 표시판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알까?
이 올리브 나무는 주님의 기도 소리를 들었을까? 수령이 2000년은 됨직한데...
오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잡히셔야지....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슬픔의 길, 비아 돌로로사....쓰러 지신 자리 마다에 세워진 기념교회들
그 고난의 언덕길이 지금은 장사꾼들로 뒤 덮인 장터가 되고....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교회 안에 안치된 예수님의 시신이 눞혀 졌던 돌
그 교회의 외양
예수 승천자리에 세워진 승천 교회 안. 재림을 방해하기 위해서 지붕이 돌로 씌워 졌단다.
승천교회 안에 승천하시기 전에 밟았다는 돌
주기도 교회 벽에 그려진 주기도 문.
예루살렘,
그리고 동방박사가 와 본 베들레헴!
"나 어제밤에 잘 때 한꿈을 꾸었네……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노래로 부르던 거룩한 성 예루살렘, 사진으로만 보아 오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어제 저녁 늦게, 언제 지났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베들레헴으로 들어 왔었다.
예수님 당시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산을 내려가서 골짜기를 지나 다시 산을 올라가서 성문을 들어서야만 하는 적지않이 먼 길이었다.
지도에서 본 직선거리만도 약 10km 정도가 되니 약 25리 길이다.
그 길이 산을 내려 오고 또 올라가야 하니 그 거리는 그냥 25리 길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가 있겠지.
왜 그 당시에는 모든 도시들을 산 등성이에다 지었는지 모르겠다. 비도 안오는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모든 촌락들이 산 기슭에 형성되었는데…
이렇게 서로 산등성이에서 마주 보며 멀리 있던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 요즈음에는 맞 붙어 있는 도시가 되었다.
마치 토론토로 치면 토론토와 미시사가처럼 붙어 있는 도시가 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은 다른 나라를 가는 것 만큼 까다롭다.
높이 세워진 콩크리트 담장 위에는 감시초소가 있고, 도로에는 꺼꾸로 가다가는 자동차 타이어가 다 찢어 지도록 날카로운 쇠붙이가 부착되어 있다. 모두가 다 그 검문소를 거쳐야 베들레헴으로 들어 가고 또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관장하고 있지만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직도 많아 그네들이 관장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무장한 군인들이 버스에 올라와 여권을 조사하곤 통과 하란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안에 함께 살면서도 서로 사는 구역에 따라 팔레스타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은 이렇게 이스라엘로부터 심하게 통제를 받는다고 한다.
한 나라 안에 두개의 나라가 있는 셈이다.
이 장벽을 기준으로 양쪽의 사는 수준이 현저히 차이가 나고, 또 물자의 풍요와 빈곤이 극명히 나타나는 것을 몸으로 느끼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가 않았다.
우리가 묵기로 되어 있는 베들레헴 인터콘티넨탈 호텔,
참으로 으리으리하게, 고풍스럽게 잘 지어진 건물이다.
가구도 하나 하나 다 무게가 있는 고급가구였다.
그런데 음식은 영 부실하다.
사연인즉은 이렇다.
100년이 넘은 건물에 이어서 아름다운 호텔이 베들레헴에 지어지자 마자 장벽이 쳐 졌단다. 그리곤 베들레헴을 팔레스타인들의 거주지로 만들어 놓았단다.그래서 어제 우리가 들어 오면서도 여권을 검사하게 된 연유인가보다.
그후 5년간 영업을 못 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군인들이 막사로 사용하면서 많은 상처를 남겼단다.
그러다가 2년전쯤부터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조금은 호전이 되어서 한쪽을 수리하곤 이렇게 단체 손님들을 받는 것이란다. 모든 물자가 유대인 지역에서 담장을 넘어 와야 되고 보니 그 교류가 원활하지 못 할 수 밖에….
베들레헴의 거리에는 문을 닫은 가계들이 즐비하였지만 예루살렘에는 문을 닫은 가계는 하나도 없었다. 그네들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제외하곤….
이스라엘에서 쩍하면 물과 전기 공급을 중단하기도 한단다. 다행히 우리가 있는 동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모든 일들이 노아의 홍수 이후 함께 살아 남은 노아의 후손들로, 서로 형제지간이었건만, 축복이 무언지…..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한 행실로 인하여 누구는 저주를 받고, 누구는 조금 더 축복을 받고, 누구는 거기서 제외되고….
그러다가 그나마 선택받은 족속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믿음의 조상,아브라함의 부인, 그 사래의 웃음으로 인하여 생겨난 정실과 후실, 그리고 태어난 적서간의 갈등, 이 둘을 다 함께 축복하신 하나님의 공평함(?) 때문에 오늘까지 이어지는 반목과 전쟁의 역사가 이제는 4000년이 넘게 되었으니, 그 세월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오늘, 우리가 무얼 어떻게 할 수가 있으리요! 오호 통재라!
지난 4000년의 역사를 드려다 본다는 건 나의 재주로는 엄두를 못낼 일이기에 간단히 남이 정리 해 놓은 약사를 베껴 오는 것으로 접고 넘어가기로 하자.
• 이스라엘 약사
• 성전(聖殿)이전 시대
- 석기시대(6000,000-4,000 B.C.E)
• - 청동기시대(4,000-1,2000 B.C.E)
- 여호수아 인도로 가나안 정착후 사사(Judge)시대
• 제1차 성전시대(1,024-586 B.C.E)
- 최고의 번성기, 솔로몬왕(965-926 B.C.E)과 성전 건축(960 B.C.E)
• 제 2차 성전시대(538 B.C.E - 70 C.E.)
- 바빌로니아 포로시대(586-538 B.C.E):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후
민족의 이산(Dispersion) 및 포로(Exile)
- 헬라 시대(332-63 B.C.E):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과 헬레니즘
• 미쉬나, 탈무드시대(70-640 C.E.) 및 침략기(- 1,917 C.E.)
- 로마시대(63 B.C.E-324 C.E.): 예수의 활동시기(6 B.C.E- 30 C.E.)
- 미쉬나, 탈무드 시대(70-640 C.E.): 로마 시대에서 비잔틴 시대로
- 비잔틴 시대(324-640 C.E.): 로마제국 콘스탄틴 황제의 천도와 기독교 의 국교 인정(323 C.E.)
- 초기 이슬람 시대(640 - 1,099 C.E.): 모하메드(570-632 C.E.)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교는 페르시아 제국과 비잔틴 제국을 격파하고 예루살렘
정복(638 C.E.)
- 십자군시대(1,096-1,291 C.E.)
- 마멜룩 시대(1,291-1,517 C.E.): 기독교와 유태교에 대한 강력한 박해
로 종교적 쇠퇴기
- 오토만 터키 시대(1,517-1,917 C.E.): 수에즈운하의 건설(1,859-1,869)
등으로 팔레스타인 황폐, 인구 감소
• 근대 및 현대 이스라엘(1,917 C.E.-현재)
-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 터키의 패배와 U.N에 의한 영국의 팔
레스타인 위임통치 결의 및 예루살렘 입성(1920)
- 세번째 알리야 - 주로 동부 유럽에서(1,919-1,923)
- 네번째 알리야 - 주로 동부 유럽에서(1,924-1,932)
- 다섯번째 알리야 - 주로 나찌 독일의 난민(1,933-1,939)
- 제 2차 세계대전 및 유태인 대학살(홀로코스트)(1,939-1,947)
- U.N의 팔레스타인 내 유태인 국가(Jewish State)와 아랍국가(Arab
State) 양분 독립안
- 영국군 팔레스타인에서 철수(1948.5.)
- 이스라엘의 독립(1948.5.15.)과 독립전쟁(제 1차 중동전쟁)(1948-1949)
이렇게 생겨난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위치를 잠시 살펴 보자.
이스라엘을 방문하면 먼저 이스라엘의 좁은 면적, 여름에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기후와 돌 투성이의 척박한 땅에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는 기름지지도 않고, 광활하지도 않아 쓸모없어 보이는 이 땅에 유대인들은 왜 이천 년이나 지난 후에 다시 돌아와서 나라를 세웠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느 민족이나 그들의 역사는 지리, 기후, 토양 등의 영향을 받는다.
이스라엘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역사 과목의 첫 시간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많이 들어왔던 비옥한 초생달 지역과 태양신을 섬기던 이집트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이스라엘을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스라엘의 북동쪽에서 달의 신을 섬기는 초생달로, 또 나일강을 중심으로 한 이집트 문명은 이스라엘의 남서쪽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며 시작된 태양의 문명이다. 이스라엘은 이 양대 문명 사이에서 두 문명을 연결해 주는 교두보의 역할을 해 왔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을 연결해 주는 이스라엘의 지리적 조건은 때로는 무역의 통로로, 때로는 전쟁의 길목으로 사용되면서 강대국들의 침략대상이 되었다.
고대 동방의 국제도로가 교차되는 곳에 자리잡은 이스라엘에는 토산물을 가득 실은 카라반(약대상)이 정기적으로 왕래하여 무역과 상업을 발달시켜 주었으며 무역상들에게 안전한 길을 제공함으로써 도로변의 도시들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북쪽의 앗시리아, 바벨론 제국이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거쳐야만 했으며,마찬가지로 남쪽의 이집트가 북진정책으로 진군을 하면 무장한 군대는 이스라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은 역사상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은 폐허로 남겨졌다. (낯의 해와 밤의 달도 우릴 해치 못하리….복음성가의 가사가 의미심장하다.)
바벨론 제국 이후에도 페르시아 제국, 헬라, 로마가 차례로 이스라엘을 정복했다.
주후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함으로써 유대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주인이 될 수 없었고,유대인은 전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나라 없는 민족이었지만 그네들의 강인한 생활력과 또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절규로 그네들이 생존할 수는 있었지만 그 반대급부로 생겨난 반셈족주의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온주의를 태동케 하였고 이에 자극 받은 유대인들은 유대국가 건설을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독립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주변 아랍국과 전쟁을 해 온 이스라엘은 1993년 PLO와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갈등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간의 평화는 단순히 중동지역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세계는 늘 이 지역을 주목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산재해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요즈음 신문지상에 계속 나오는 팔레스타인이란 말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주후 70년경에 성전이 파괴되고도 또 60여 년이 지났으나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꿈은 사라지지 않았었다. '별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 코크바를 중심으로 하여 로마에 대한 반란이 다시 시작되었다.
랍비 아키바는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민 24:17)라는 구절과 연관시켜 그를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야로 선포하였고 이는 로마를 향한 성전이 되어서 로마는 마지막 요새 베타르를 진압하는 데 무척 고전하였다.
허나 반란의 결과는 참혹했다. 유대인의 마을은 훼파되고 많은 이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알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 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워 지며 유대인 거주가 금지되고, 오직 성전 파괴일(아브월 9일)에만 방문이 허락되었다.
이 때의 하드리안 황제는 지금까지 유다로 부르던 속국의 이름을 시리아 - 팔레스티나로 바꾸었다. 더 이상 유대인이 이 땅에 대한 애착을 갖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고, 이후로 이 땅은 이스라엘이나 유대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런 참혹한 역사 속에 여러차례에 걸친 포로생활과 수없이 많은 전쟁, 더군다나 티토장군에 의해 완전히 허물어 진 성전으로 유대인의 구시점이 없어지는 듯 하였으나 그로부터 60년 후, 하드리안 황제 때 다시 봉기된 유대인의 반란(독립?)을 완전 진압한 로마의 마지막 정벌은 유대인 말살정책이었기에 순수한 유대인의 피는 더이상 이 세상에 존속할 수가 없었는데도, 어머니의 혈통이라도 유대인으로 인정하면서, 또 개종하는 사람들도 영입을 하면서까지 그 유대인이라는 명맥을 유지하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네들이 믿고 소망하는 메시아 사상의 발로였을까?
아님 하나님이 애초에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또 후에 이스라엘이 된 야곱에게 하신 그 축복의 효험이 아직까지 이어져 와서인가?
그도 아님 그네들이 받은 박해와 고난이 오히려 그네들을 더욱 더 결속하게 만들어 준 것일까?
팔레스타인이 처한 상황을 보면 야곱과의 약속 때문만은 아닌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이스마엘하고의 약속 또한 지켜 져야만 할 것이 아닌가?
나의 짧은 생각은 이렇다.
기독교가 공인되고부터는 예수를 죽인 유대인으로 지목되어 더욱 심한 박해를 받으며 나라없이 살아 온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는 지방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곤 만약을 대비해서 언제든지 줄행랑을 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어느 곳에서든지 또 쫒겨나게 되면 금방 가방 하나만 들고 나와도 되도록 모든 재산은 금융화되었고 금붙이에 투자를 하여 재산의 부피를 최소화시키노라니 결국 할수 있는 것은 장사였나보다.
그 장사를 위해선, 또 좋은 정보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어디에 뭐가 필요하고, 세상돌아가는 상황이 어떻게 변할 것 같고…
이를 알기 위해서는 남보다 좀더 많이 공부를 하여야 했겠지. 그래서 교육열은 자연히 높아지고…
그러다 보니 각자의 재능이 개발되고, 발견되어 과학과 문학과 예능과 철학에 특출난 사람들이 배출되게도 되었을 것이고….
20세기를 풍미한 공산주의도 유대인의 머리에서 나왔고, 자본주의도 유대인의 머리 속에서 나왔고, 신은 죽었다며 무신론을 들고 나온 사람 또한 유대인의 혈통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초 강대국이라는 미국의 금융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유대인이요, 매스메디아를 주름잡은 것도 유대인이요 정치에 입김을 작용하는 사람 또한 유대인이니 사방에 유대인으로 에워 싸인 느낌이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의 삶, 학대 받고 소외된 삶이었기에 그네들은 조금 더 결속할 수 있었고, 그 고난이라는 토양 속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손가락질을 받기는 하여도……
그냥 가만히 놔 두었더라면 저희들끼리 바리새요 사두개요 하며 물고 뜯는 싸움이나 하였을 테인데….
마치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엔 지하로 스며 들며 더 열심히 믿고 전도하곤 하던 순수한 열정이 있었는데, 그 교회가 정부의 비호를 받으면서부터 타락하기 시작하여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암흑세상이라는 Dark Age, 시대를 만들어 놓은 것 처럼 말이다.
이렇게 세계 여러나라에 방황하던 유대인들이라는 민족(결코 단일민족은 아니리라…)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부터 각국의 정치에 입김을 불어 넣게 되고, 그 결과 2차대전 후에는 독립이라는 구호아래 저희들의 나라를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우던 그 지역에다가 세우면서 그 지역 사람들을 몰아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우리 말로 지나는 객을 좀 쉬게 하여 주었더니 처음에는 엉덩이만 조금 붙이고 앉아 있던것이 조금씩 조금씩 올라와 이제는 아예 아랫목을 차지한 것과 같은 형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유대 멸망 후 2000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들이 저들이 살던 땅을 빼았긴 후 가만 있겠는가?
서로 공존하면 좋은데 어디 사람들의 욕심이 그런가…
항상 전부 아니면 전무를 요구하도록 우리의 심성이 되어 먹은 것을….
이런 땅에 우리가 온 것이다.
그리고 이런 땅에 우리가 꿈에 보며 노래 부르던 그 거룩한 성이 있는 것이다.
그 거룩한 성에는 어떤 거룩한 것이 있을까?
오늘의 일정은 예수 승천지점에서 시작해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끝을 맺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었다는 바위돌 위에 자그마하게 지어진 교회, 원래는 지붕이 없었다는데 이슬람들이 예수의 재림을 방해하기 위하여 지붕을 씨워 놓았단다.
나의 얄팍한 지식으로는 조금 생소한 지점이었다.
감람산을 거쳐,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었기에 스테반 문이라고도 한다는 그 성문을 통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후, 베데스다 연못 자리에도 서 보았고,그리곤 가장 중요한, 예수님이 걸으신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의 순례를 시작 하였다.
라틴어 비아돌로로사 (Via Dolorosa)는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의 십자가 수난의 길을 말한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 m 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 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다. 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시스컨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란다.
제1지점은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던 빌라도 법정이다.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정 (Praetorium, 마 27:11 ~ 14)으로부터 시작되며 예수께서 사형이 확정된 곳이다. 헤롯 대왕이 그의 친구 마가 안토니를 위해 지은 안토니아 성채 내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 당시의 로마 총독부는 가이사랴에 있었으나, 당시 총독 빌라도는 유월절 기간 동안에 자주 일어났던 반로마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선고교회 (Church of Condemnation)가 서 있다
제2지점은 가시관을 씌우고,홍포를 입혀 희롱한 곳이다.
이곳으로부터 도시의 거리를 지나 골고다로 향하셨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조롱하였다. 빌라도는 십자가를 메고 나오시는 예수를 보고 "보라 이 사람이로다" (Ecce Homo, 요 19:5) 라고 했다. AD 135년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가 세운 에케호모 아취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제3지점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이다.
1856년에 세워진 아르메니안 기념교회가 서 있다. 십자가의 무게와 모양에 관하여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제4지점은 슬퍼하는 성모마리아를 만난 곳이며
제5지점은 구레네 사람 시몬 (Simon of Cyrene)이 십자가를 대신 진 곳이다.
초대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시몬의 아들들은 '알렉산더와 루포 (막 15:21)로 알려져 있으며,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 " (롬 16:13)라 부르고 있다 1895년에 세워진 프란시스칸 교회가 있다. 이곳으로부터 계속되는 비아돌로로사는 비교적 가파른 경사지를 따라 올라간다.
제6지점은 성베로니카 여인이 물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는 곳이다.
성베로니카(St. Veronica)가 예수님의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드렸는데 돌려 받은 손수건에 예수의 초상이 새겨졌다는 전승에 따라 1882년에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제7지점은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진 곳이다.
1875년에 두 개의 예배실이 세워졌다. 이 곳은 예수 당시 성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히 13:12 ~ 13)
제8지점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 라고 말씀하신 곳이며
제9지점은 예수님이 세 번째로 쓰러진 곳으로, 곱틱교회가 서있다.
제10지점은 예수님의 옷을 벗긴 곳이며,(요 19:23 ~ 24)
제11지점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곳이며, (눅 23:33)
제12지점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곳이며, (마 27:45~ 51)
제13지점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내린 후, (마 27:59)
제14지점에서 그가 자기의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냈다.(마 27:60 ~ 61)
※ 제10지점 에서 제14지점까지는 처형의 목적지인 골고다 언덕 위로써 지금의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안에 있다
로마 병정들이 희롱하며 장난질 친 자욱을 남긴 돌을 보면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였다.
가다가 보니 그 지점 지점마다에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한참을 줄을 서 있다가 들어가 둘러 보며 잠시 설명을 듣곤 또 다음 사람을 위해서 빨리 나와야 하고, 또 혼잡한 골목길을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부리나케 걸어가다가는 줄을 서고, 들어가고, 나오고….
마지막 지점으로 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가 서 있었다는 골고다 언덕도 보고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싼 자리라는 돌도 만져보고, 예수님의 시신을 뉘었던 무덤도 보았건만 이 모두가 다 한 교회 안에 있어 좀 의아하게 만든다.
십자가가 섯던 갈보리 산 언덕은 어디 갔을까?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막은 돌을 어찌 치울까?" 고 걱정하며 향유를 들고 온 그 무덤은 어디 갔을까?
그 모두가 다 한 교회 안에 있을 정도로 그 거리가 이것 밖에는 안되었나? 교회가 좀 크기는 크다마는…..
여지껏 걸오 온 길은 좁은 골목길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줄줄이 이어졌고, 그 주변에 늘어 선 장사꾼들의 호객 소리로 골목안은 소란하였다.
거기에다 시작하기 전 부터 귀에 못이 밖히도록 들은 주의 사항!
소매치기 조심, 단체에서 떨어져 미아 안되도록 조심하라고…..
이 두가지를 지키려니 정신은 세군데로 나누어 진다.
소매치기 조심하랴, 단체에서 떨어지지 않으랴, 또 여기 온 목적이 무엔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체취를 느끼며 고난에 동참해 보려는것이 아니었나? 오랜 기억을 위해서는 사진도 찍어야지…..
그 고난의 길을 걸어 다니는 동안 나를 잡아 끌어내어 대신 십자가를 지라는 험상궂은 로마병정도 보지 못하였고,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거하리라"는 자애의 목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려 해도 눈에 보이는 것은 천사가 내려와 동하는 물이 아니라, 이젠 잡초가 무성히 자란 폐허밖에는 보이지가 않으니 나의 영의 눈이 완전히 멀긴 멀었나보다.
그런데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시는 자애로운 말씀조차 들리지 않음은 우리의 행선지에 실로암이 끼지 않아서일까? 아님 나의 욕심이, 나의 죄된 마음이 아직 눈을 뜨기에는 더 많은 참회의 순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
아마도 주님에게 육신의 양식을 조금 더 잘 대접을 하여야 겠다는 일념으로 마음이 분망한 마르다 처럼 조금 더 보고, 조금 더 느끼겠다는 나의 분망한 마음이기에 또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장소 장소 마다에 지어 놓은 기념교회들,
그걸 보랴, 설명을 들으랴 사진 찍으랴, 소매치기 조심하랴.. 그러다 보니 지금 여기가 어디지?
너무나 많은 교회들을 너무나 짧은 시간에 돌았기에 좀 돌았나 보다.
그런 와중에 어찌 주님의 체취를 느낄 수가 있으리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 "두 주인을 한꺼번에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 어찌 그리 명언인지….
기대를 가지고 아침에 떠났는데 저녁에 돌아 왔을 때에는 순간 순간 온 몸을 전율하게 만들던 감흥과, 또 무엇을 보았는지 혼동되는 많은 교회의 건물과 벽화와 번쩍이는 제단, 그리고 아우성치던 골목의 장사꾼들로 머리가 꽤나 복잡해져 있었다.
언제인가 다시 음미하며 하나 하나 정리를 해 보아야 할까보다.
아무래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 드리려 뉘었던 그 산, 그 자리에 지었던 성전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지금은 이삭대신 이스마엘을 뉘었었다며 이슬람을 창시한 모하메드가 말을 타고 승천한것을 기념하며 지어진 황금사원이 있어서 우리가 말하는 거룩한 성의 기를 꺽어 놓아서인가?
아님 원래는 지붕이 없던 예수 승천교회에 재림을 막는다며 지붕을 씨워 놓은 모슬렘의 주술 때문인가?
생존을 위한 혼돈으로 길을 막아 담장을 쌓고, 영생을 위한 혼돈으로 서로가 좋은 자리에 사원을 짖노라 뺏고 뺏기는 혼돈이 한테 어우러져 공존하는 성, 예루살렘이 되어 버린것 같다.
예루살렘에서는 "샬롬" 하여야 하고, 베들레헴에서는 "살람" 하여야지 이게 잘못 꺼꾸로 되었다가는 따가운 눈총 밖에는 돌아 오는 것이 없도록 삭갈리게 복잡한 땅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유대인의 하나님과 모슬렘의 하나님과 천주교의 하나님과 희랍 정교회의 하나님과 이집트 캡틱교회의 하나님과 영국 성공회의 하나님과 독일 루터교의 하나님과 그리고 이스라엘 한인교회의 하나님과……..
그 맑고 청아한 소리로 노래 하며 호산나를 외치던 그 성에 이렇게 많은 하나님이 있으니….
우리들이 본, 사람들이 지어 놓은 성전과 사원과 교회가 결국은 하나의 바벨탑이 되어 하나님께서 다시 혼돈을 주시었는가?
그래,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하신 말씀, 돌위에 돌 하나도 제대로 놓이지 못하리라는 그 때가 올것 또한 기다려 지는 시간인것 같다.
이런 혼돈이 오래 지속 될 수는 없을 테니까….
한 낯이 되어 이스라엘 한인 교회에 가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데 익숙해진 우리에겐 토요일에 대예배를 드리는 이곳의 예배가 어째 하루 빠른것 같으다.
허기사 요일 또한 우리 인간이 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니 그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하루의 순례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누우니
파랑새를 찿아 한 평생을 헤메고 다니다 늙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와와 누워보니 집 마루에 걸린 새장 안에 파랑새가 있더라는 말이 실감난다.
허나 그 늙고 지치는 과정에서 쌓여진 경험과 경륜은 무시할 수가 없는 귀한 자산이 되었으리라.
마치 시내산을 오르기 전에 서 있던 그 자리에, 올랐다 내려와서 다시 섰을 때, 그 사람은 같은 사람이로되 더이상 같은 사람이 아닌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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