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교회, 그리고 나

2008-12-6 구유에 나신 까닭은?

천천히 chunchunhi 2008. 12. 10. 12:08

구유에 나신 까닭은?   2008 12 6일 새벽

2:8-12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찬송가를 부르시면서 이 찬송을 부르기에는 조금 너무 이른데…” 하는 생각이 안드셨읍니까?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 되었읍니다.

오늘 아침에는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 왜 구유에 뉘이셨었는가를 여러분과 함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법 앞에 평등하다!”

여러분은 이 말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이니까 믿어야 하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한 평생을 살아 오시면서 여러분이 당하고 보아 온 세상은 어떠하였읍니까?

무전유죄, 유전무죄자는 말이 실김나는 경우를 한두번씩은 당해 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니 그런 험 한 꼴을 안 보고 살아 오신 행복한 분들도 많이 계시리라 믿읍니다마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진리가 항상 모든 인간에게 통용되는 진리는 아니더라는 이야기 입니다.

왜냐하면 그 법을 집행하는 것이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똑 같이 태어 났다.”

이 말은 믿으십니까?

허기사 누구나 다 벌거벗은 채로 으앙하면서 태어 났으니 다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 났겟지요.

그런데 그 태어나는 곳이 다 같읍니까?

아니지요.

그 태어 나는 곳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좌우 되어지기도 하는 것을 우린 경험으로 많이 보아 오지 않았읍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다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은 믿으십니까?

믿으시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께 간구하고, 찬양하며 소망을 그 하늘나라에 두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그런데 정말 누구나 다 똑같이 사랑을 하실까요?

왜 하필이면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우상을 만드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사람을 선택해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주시었을까요?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도 왜 요셉을 택하셨을까요?

왜 이새의 8명의 아들들 중에서 말째인 다윗을 선택하시었을까요?

누구나 다 똑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말이예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분명 인종차별주의자이신것 같읍니다.

이런 말을 하다 보면 거두 절미하고 이단으로 몰릴지도 모르겠읍니다. 허허허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겠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이 말은 믿으십니까?

모두가 다 믿으실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같은 육을 입으시고 오시었고, 또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을 직접 바라 볼 수 있도록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장막을 찢으셨지요,

그래도 믿지 못하는 우리의 의심을 말소시키기 위하여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었고, 이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이시니까 말입니다.

믿지 못하는 도마를 위해서 예수님은 그 앞에 상처를 드러내 보이시며 그로 하여금 믿게 하셨읍니다.

어찌 믿지 못하는 사람이 도마 한사람 뿐이겠읍니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그 전에도 있었으며 오늘도 있읍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산재해 있는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일일히 다 나타나시겠읍니까?

마치 손오공처럼 몸에서 털을 한줌 뽑아 후-ㄱ 하고 불면 그 털들이 다 원숭이가 되듯이 재주를 부리겠읍니까?  그런 재주라 한들 공간을, 시간을 초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어디서나 나타나시어 우리의 믿음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하여 부활 후 성령으로 다시 오신 것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기다리는 절기가 바로 대림절이겠지요.

 

 

 

 

 

 

이런 일화가 있읍니다.

 

어느 날 밤 런던 거리의 한 커피 숍에 몇 사람이 둘러앉아  길 건너에서 부유층의 사람들이 좋은 차를 타고 극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읍니다.

서로가 신세 타령을 하다가  우연히 인간의 평등에 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답니다.

 

한 미국인이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하자,

영국인 노동자가 “그것은 말뿐이야. 사람들이 평등하게 태어나기는 커녕 어떤 사람은 백만장자로 또 다른 사람은 양육원에서 태어났는데도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 하였읍니다.

 “옳아, 어떤 사람은 명석한 두뇌를 가지며 튼튼한 몸을 지니고 태어났는데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거든.” 커피 숍 주인도 맞장구를 쳤읍니다.

 

 “인간이 죽으면 모두 마찬가지야. 죽으면 누구 하나라도 물질 아닌 것이없기 때문에 인간은 물질의 집단, 즉 전체 사회라는 유일한 사실이 문제될 뿐 개개인의 생활이 이제는 더 이상 의의가 없어”라고  공산주의자가 말하였읍니다.

그러자 터어키 모자를 쓴 아랍인이 다음과 같이 말 합니다.

“인간이 예언자 마호메트를 진실로 믿을 때만이 자유롭고 평등한 거야. 평등을 주장할 수 없는 노예는 이교도인 까닭이며 이것은 알라의 뜻에 의한 것이고인솰라.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듣던 커피 숍 주인은 묵묵히 이네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노인에게 물어보았읍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러자 그 노인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모두 평등하다고 생각하오”라고 말하며 호주머니 속에서 한 줌의 동전을 집어서 탁자 위에 흩어놓았읍니다.

그리곤 하는 말이 “보시오. 여기에 동전이 있습니다. 반짝이는 것, 광택이 있는 것, 없는 것, 가지각색이지만 이것은 모두 똑같은 가치를 가지며 동일하게 왕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게는 똑같이 귀중한 것입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예화였읍니다.

그런데 이 노인의 말에도 또 어패가 있는 것 같읍니다.

마침 그 노인의 주머니에는 25c 짜리 동전만 들어 있었던지도 모르겠읍니다.

만약 그 주머니에 $1 짜리 루니나 $2짜리 투니가 함께 들어 있었어도 다 똑같다고 말 할 수 있었을까요?

 

그 가치에 따라서 달라졌을 것입니다.

 

세계의 명문 대학이라는 하버드 대학,

세계 곳곳의 수재들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다 일등을 하던 그 수재들이 함께 모이다 보면 거기에서 또 서열이 생깁니다. 그 일등들의 군상에서 또 일등이 생기고 2등이 생기고 꼴찌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인 가 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지 않았읍니까?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경기장에서 달리는 사람은 많아도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기에  우린 항상 좀 더 빨리 달리려고 노력을 하지요.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 가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그 높은 곳, 정상은 항상 한 곳 뿐인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나가 다 정상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정상은 하나 밖에 없는데 너 나 없이 서로 정상에 오르려 하다보니

인간의 비극이 생기고, 인생의 희노애락이 생겨나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왜냐하면 그 정상에 못오른 수많은 사람들은 그 정상에 오른 사람들로부터 다스림을 받고, 억압 당하고, 착취를 당해야 하니까요.

 

우리의 지나 온 과거로 볼 때 인간 집단이 모여 사는 사회는 항상 이렇게 한 정점을 이룬 극 소수의 부류와 그 정점을 향해 노력하는 조금 더 많은 부류 그리고 좀 더 높은 곳으로 나아 가려 지향하는 조금 더 많은 사람들로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는 모양을 띄우고 있읍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는 이런 삼각형의 모양이 가장 견실한 사회 구성이라고들 학자들은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그 만인에게 공평해야 할 법이 사람에 의해 운영 되어지다 보니까 이 삼각형에 균열이 오기 시작하였읍니다.

그래서 사회 모양이 절구처럼 중 상층이 많아지고,중류층은 적어지고, 다시 하류층은 많아지는 불안전한 형상으로 사회가 바뀌게 되어서 우리 모두가 걱정하는 현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보편적으로 지나온 역사를 보면 지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이 지극히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지배하여 왔기에 많은 사람들이 허덕이며 살아 왔읍니다.

 

 

지금 우린 교회 절기로 대림절에 들어 섰읍니다.

우리, 이 서민들의 소망을 이루어 주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이지요.

해마다 이맘때 즈음이면 우리 모두는 그 성탄의 기쁨을 서로 나누기 위해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 받고 하지 않읍니까?

이 카드를 자세히 드려다 보면 거기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 40년 전에 서로 주고 받는 카드에는 대체로 아기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이 마굿간에 둘러 앉은 모습들, 아니면 광야에서  양치던 목자에게 천사가 나타나는 모습. 아니면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는 모습에 영어로 Merry Christ and Happy New year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읍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서로 주고 받는 카드를 보면 이런 그림은 많이 줄어 들고 성탄 장식 한 나무나 아님 구슬 방울, 겨울의 눈 덮인 설경, 이런 그림들로 바뀌이면서 문구도 Merry Christmas가 아닌 Happy Holiday 로 바뀐 것을 볼 수가 있읍니다. 그것도 Holiday Holy Day로 즉 거룩한 날로  쓰여 졌다면 그런데로 이해가 되기도 하겠는데 그게 거저 노는 날이라는 Holiday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주님 나신 크리스마스를 보는 사회가 그만큼 변질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요.

이렇게 우리의 인식은 변하여 왔는데도 사회는 아직도 극 소수의 지도자계급과 수 많은 서민들로 구성되어 있읍니다.

불쌍하고 나약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이 아직도 훨씬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2000년 전의 시대도  별로 다를바가 없는 사회였었읍니다.

지극히 적은 사람들이 권좌에 앉아서 사치하며 호령하고, 그 밑에서 그네들과 공존하며 붙어 사는 중류층이 있었는가 하면 그네들에게 수탈을 당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생존해야만 하는 많은 서민들이 있었읍니다.

 

이제는 카드에서마저 많이 사라진

그 옛날 마굿간에서 태어난 어린 아기 예수를 보고 있는 마리아와 요셉 뒤로 문 틀을 통해 드려다 보는 목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은 왜 하필이면 마굿간에서 나시어 구유에 뉘어 지셨을까요?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부담없이 다가와 경배 할 수 있었던 것 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 같은 서민들이 부담없이 다가 설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서였을 것입니다.

 

꺼꾸로 한번 생각을 해 보면 어떨까요?
예수님이 만약에 헤롯 궁전에서 헤롯의 아들로 태어 났다면?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내노라 하는 고위직에 있는 선택된 사람들의 축하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허나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의 경배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그 당시의 가장 하층 생활을 하던 목자들이 왕이 나셨다고 궁전에 들어가 경배를 하겠다고 한들 어림이나 있었겠는가 말입니다.
부정 탄다고 문전 박대를 받은 채 엉덩이를 채여서 쫒겨 났겠지요.
그리고 그 삶은 풍요로움 속에 잘 배우고 잘 단련된, 세련된 인격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상류 사회에서 생활 하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도록 말입니다.
그러다가 언제인가 석가모니처럼 출가를 하였을 지도 모르겠읍니다.

 

우리 인간들의 삶이란 그 때나 지금이나 항상 답이 없는 의문 속에 내일을 모른 채 오늘을 살아 가며 생사병고의 굴레를 맴도는  존재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허나 그렇게 출가를 하여 세상을 주유하며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  즉 중생을 구출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내가 누구였는데…” 하는 무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을 수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구조가 그렇게 되어 먹었으니까 말이예요.

그래서 석가모니가 해탈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행을 하였읍니까?

성경에서도 석가모니보다  훠얼씬 이전에 벌써 모세라는 사람을 이용하여 비슷한 일을 보여 주시지 않으셨읍니까?   

모세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방황하며 연단 당해야 하였었읍니까?  그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에고를 지워 버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처녀인 마리아의 육신을 빌어 성육신 하신 일 또한 결국은 그 많은 손가락질과 수근거림과 수모를 받는 그 아픔을 체험하기 위해서인 것이 아닐까요?

왕비의 몸을 빌었던지, 아니면 정상적인 여념집의 아낙의 배를 빌어서 태어 났더라면 그 사역을 위해서는 또 어떤 극적인 장면이 인위적으로 필요하게 될 터인데, 동정녀의 몸을 빌림으로서 앞으로 있어야 할  그 모든 일들을 미리 다 이루어 노으셨으니까 말입니다.

마굿간이라는 곳,

사회를 이루 던 사람들의 대부분인 하층의 천민들 모두가 아무 제재 받지 않고 올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곳을 탄생의 자리로 선택하시었기에  목자들로 표현 된 지극히 나약하고 가난 하고 불쌍한  사람들도 주님 앞으로 나 올 수가 있게 되었고,

또한 동방박사로 표현된 지극히 높고 선택받은 사람들도 다 함께  예수님에게로 나 올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으며
동정녀의 몸을 통해서 태어 나심으로 그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의 섭리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면서, 어떤 모욕와 수근거림과 손가락질까지도 다 이겨 낼 수 있는 믿음을 우리들의 마음에 심어 주신 것입니다.

마굿간으로 오신 예수님.

인간들의 경쟁에서 인간들의 방법으로 이겼다고 자만하는 지극히 적은 수의 궁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비록 인간적인 경주에서는 져서 낙담하고 좌절하는 수 많은 우리들에게 절망하지 말라, “소망을 가지라,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 곁으로 다가 오시기 위한  예수님이 선택하신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열 손가락을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이 있지요.

요즈음 처럼 애들을 하나나 둘 밖에 안 낳는 세대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일지도 모르겠읍니다마는 부모님의 마음은 비록 인간들의 경주에서 진 자식이라도 그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돌아 온 탕자를 버선발로 뛰어 나가 얼싸 안는 아버지의 비유가 단지 비유가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임을 자식을 길러 본 우리가 아는 것 처럼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지어 이 세상에 보낸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면서 우리가 다시 그 품으로 돌아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절기가 대림절이 아니겠읍니까?

 

금년에도 주님께서는 마굿간의 구유안으로 오실 것입니다.

이 기다리는 시간동안

우리 마음 속의 구유를 조금 더 비우고 깨끗하게 만들면서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경주에서는 비록 상을 타지 못하여 정상에 서지 못하였지만

이제부터라도 남은 여생을 달릴 때,

나 자신이 혼자 달리는 인생의 경주가 아니라

나와 함께 달리시기 위하여,

나를 인도하기 위하여  성령님으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달림으로써

영혼이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기도 드립니다.

함께 기도 드리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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