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교회, 그리고 나

2010년 사순절에

천천히 chunchunhi 2010. 3. 24. 22:50

2010 사순절에

 

금년에는 부활주일이 4 4일로 빠른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금년 사순절은 예년에 비해 날씨가 너무나도 포근하다.

양지 바른 곳에 심겨진 라일락은 벌써 봉우리를 틔우려고 한껏 부풀었는데

저러다가 꽃샘 추위에 얼지를 말아야 겠는데…. 하는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포근한 날씨가 좋다.

 

햇볕이 따사로운 밖을 내다 보면서 사순절에 이는 상념들….

금년 봄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자꾸 연상키우는 이유가 무엇일까?

 

본디오 빌라도.

아마도 이사람 만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리면서 비아냥을 받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주일날 마다 수많은 교회에서 수많은 교인들이 함께 외우는 사도신경.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요즈음에는 많은 교회들이 사도신경을 함께 외우지 않는 것이 하나의 조류가 되어 조금 할지 모르겠지만 본디오 빌라도, 아마 꽤나 아펏을 것이다.

 

허기사 사도 신경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종교회의를 거쳐서 만들어 놓고, 서로 외우자고해서 외워 지는 것이니 거기에 거론되어지는 이름에 무슨 그리 의미가 있으리요.

  설사 있다 한들  많은 사람들 중에 정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뜻을 음미하며 마음으로부터 신경을 외우고 있겠는가!

그러나 이름이 좋은 느낌으로 거론 되어지는 일이  비록 본인은 죽었다고하나 어디에서인가 영생을 누리고 있을 본인에게, 그리고 지금도 지상 어디엔가 살아가고 있을 후손들에게  즐거운 일이 수는 없을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

그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에서 유대지방 총독으로 부임해 정치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유대 지방이 로마의 변경이었다 하더라도 넓은 땅을 통치하는 총독이라면 분명 보통의 사람들 보다는 뛰어난 정치가요 수단가였을 것이다.

그런 총독이 유대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고 있었을까?

아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사회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무얼 원하는지, 그리고 혜성처럼 나타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예수라는 사람이 있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점령된 사회를 통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국민들이 하나의 생각을 가지고, 점령하고 있는 로마가 하는 일에 협조해주는 것을 바라겠지만 어디 사람들 사는 세상이 그러한가.

항상 추종세력이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세력이 공존하는 것을….

그러나 두가지 세력이 있을 경우에는 세력이 모두 비슷비슷하여지기를 바라는 속성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가 견제하기에 힘을 서로에게 소모하다 보면 막상 정부에 반기를 힘이 적어지게 테니까.

물론 사회야 괭장히 씨그럽겠지만 사회라는 우리 집이 아니요 우리 사회가 아닌 속국중에 하나인 변두리 유대이니 씨끄러운 무슨  대수겠는가.

 

로마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것도 아니기에 그에게는 예수님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구지 미워 해야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노력을 하였었나보다.

노력이 4 복음서인 마태, 마가,누가, 요한복음에 묘사 되어 있다

 

23:4 ..내가 보니 이사람에게 죄가 없도다하니

23:14-15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사람에게서죄를 찿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23: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23:22 …이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죽일 죄를 찿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이렇게 노력한 흔적이 여실히 보이는 그를   300년도 지난 후에 사도신경을 만들면서 새삼 거론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게 하였을까?

 

다시 한번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힘없고 나약하고 소외된 자들 뿐이었다.

기껏 배운 사람이라 하여도 당시 로마의 앞잡이라고 지탄 받아 오던 세리에 지나지 않았다. 외에는 정치적으로는 유대 독립은 원하는 열심당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낚으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어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네들이 뫃이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고 하나 그네들에게는 무리를 조직적으로 움직일 있는 능력있는 지도자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자기네들이 믿는다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님이 세를 키워가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두려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네들은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선동할 있는 지도 알고,

어떻게 하면 정치권을 움직일 있는지도 아는  똑똑한 기득권층의 사람들이 아닌가.

 

빌라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없는 예수를 죽이려 하나 자기가 놓아주게 되면

기득권층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영화를 빼았기지 않으려 필사의 노력을 것이 분명함을 !

그래서 그들이 로마에 탄원서를 내거나 사람을 보내어 자기를 모함하게 되면?

나의 앞으로의 정치생명을 어떻게 될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요즈음 속된 말로 무지랭이에 지나지 않으니 그를 죽인다 한들 무슨 조직적인 사단이 일어나서 나의 정치적인 생명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 못하리라는 계산이 생각 밑에 깔려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그가 없다고 생각 하면서도 기득권자들의 음모가 두려워서

예수를 그네들 손에 넘겨 주면서

이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7:24)”라고 하였나보다.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네들의 눈에 가시인 예수를 죽여야 했고.

빌라도 역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보다는 자신의 총독의 자리와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자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그네들 손에 내어 것이리라

 

  자리라는 , 기득권이라는 도대체 무얼까?

 

때나 지금이나 능력이 있고, 그래서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못된 결정을 하고, 못된 길로 가게 때에는 그로 인해서 피해를 보는 나약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아니 경우에는 자리라는 생각에 어패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쩜 자리 보다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생각과 이념의 차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 실질적인 생각이 아닐런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그들에게 전하여 내려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지킴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배워왔기에 그것만을 지키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속박이 되고, 그러다 보니 형식에 치우치게 되기도 하였겠지만 그네들이 배워 것은 뿐이었는데, 자신들을 그르다고 정면으로 도전하는 세력이 생길 그네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마치 한국에서 개화기 때에 한의들과 양의 들이  서로 다투던 양상하고 별반 다름이 없으리라.

객관적인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전부 내가 있는 범주내의 것들 뿐인데, 그리고 새로운 생각을 수용할 여지가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생각이 옳으니 생각을 지키기 위하여 세를 만들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과연 나쁘다고만 수가 있을까?

단지 그럴 능력이 없어서 당하는 사람들이 한탄 스러울 뿐이지….

 

만약에,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설은 성립될 수가 없겠지만 정말로 만약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빌라도가 그의 심중에 이사람이 하는 일이 옳고, 그의 세상이 도래할 것을 확실히 믿을 수가 있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제사장들을 제압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기에 그의 생각에 편안한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에까지 이름이 별로 좋은 뉘앙스로 주일마다 뇌어지는 것이 되었고…..

 

그러나 모두가  결국에는 땅에 오신 예수님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그때 필요한 배역들이었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도 없고, 장로들의 유전에도 없는 우리들의 본향,하늘나라!

우리들이 땅에서 죽는 것이 삶의 끝이 아니라, 땅에서의 삶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이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 하실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기껏해야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모두가 엘리야가 아님을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땅에서의 삶이 끝난 죽음 이후에, 영생이 하늘나라에서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증명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시었다가

우리처럼 죽으시고, 그리고 다시 사셔서 부활을 해야만 하는 과정이 아니었겠느가!

그래야 우리도 우리가 다시 살아서 부활을 있다는 믿음을 가질 있게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런 모습이 보여 졌기에 초대 교회의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순교를 당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당시 지도층에 있던 제사장의 모습으로 오시었다면 조금 조직적으로 가르칠 수는 있었겠지만 그건 증명을 없는 가르침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요, 비록 제사장의 모습으로 죽은 후에 부활을 하였다 하더라도 제사장이 아닌 많은 우리들에게는 부활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심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잡아 죽인 후에 의기 양양하게 기뻐하던 제사장들이 그렇게도 지키고 싶어 했던 그네들의 생각과 기득권도 불과 얼마 후에는 소멸되도록 유대라는 나라가 지상에서 없어지게 되었고, 영화를 꿈꾸던 빌라도역시 꿈을 이루지 못한 죽어 갔으니 과연 추구하는 이상은 무엇이고, 바라는 영화는 어떤 것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살려면 죽을 것이요 죽으면 살리라는 대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은 죽음으로 인해서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였고, 오늘에 이르기 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많은 무리들을 만들어 놓으셨는데….

 

물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무리들 중에도 예수님 살아 생전에 따르던 제자들이 서로가 높아지려고 다투었던 처럼, 서로가 바라는 세상이 다르고 원하는 바가다른 것을  가슴 속에 숨기고 앙앙불락하고 있지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누가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맞는 말인것 같다.

 

사람들이 약속하여 정해 놓은, 그래서 매년 바뀌는 부왈절이 얼마 남았다.

금년에도 교회마다, 교파마다 나름대로 고난 주일을 지키고 부활절 예배를 드리겠지.

 

부활절을 통하여 만약  예수님이 다시 땅에 오신다고 하면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예수님을 자기 교회의 목회자로 모실수가 있을까?

 

세상에는 서로가 바라는 예수님의 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갈라지고,

서로가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이 다르다고 갈라지기 시작해서 만들어   많은 교파 있는데,  많은 교파들이 하나로 모일 수가 있을까?

과연 어느 길이 바른 길로,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일까?

도착하기 까지는 결코 수가 없도록 수없이 나뉘어 길들이 혼란 스럽다.

 

어릴 학교 앞에서 상품을 타기 위해서 귀한 주머니의 동전을 야바위 꾼에게 투자한 접혀진 미로의 하나를 고르던 생각이 떠올라 고소를 머금으며

부활절을 통해 다시 부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본다.

 

 

(사도신경을 조금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가 외우고 있는 사도신경의 번역 때문에 본디오 빌라도가 그렇게 한것처럼 오해를 받고 잇다는 것을   수가 있겠지만 깊이를 모르고, 배운 대로만 알아야 하는  우리 보통사람들에게는 본디오 빌라도, 그가 고난을 사람이니 이를 어쩌리원문에는 빌라도 시대에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시대라는 단어가 들어갔을 때와 들어 갔을 전해주는 내용은 엄청 다른 내용이 아닌가!

 

나는 여지껏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배워 왔고, 그래서 그렇게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그의 입장을 , 당시의 상황을 조금 깊이 드려다 보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빌라도 후에 시대라는 단어가 빠졌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알아서….” 하는 퓨념을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