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교회, 그리고 나

2008-11-08 구술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천천히 chunchunhi 2008. 11. 30. 06:44

구술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야고보서 2장 14 - 18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광야의 만나가 사도행전을 지나 11월 달에는 야고보서로 들어 섰읍니다.
약탈자라는 의미를 가진 야고보라는 인물이 성경에는 4 등장 합니다.

12사도 중에 야고보와 작은 야고보가 있지요.

야고보는 너무나 유명한 요한의 형이고, 작은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사도중의 한사람인 다대오의 부친 이름이  또한 야고보였읍니다.

 

오늘 읽은 야고보서를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보잘 없는 나사렛 마을의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하기는 했지만 신실한 부모와 형제들 사이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대교의 엄격한 생활 습관을 익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 생활하면서도 야고보는 그가 사랑하는 형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것 같읍니다.

자신보다 남을 위하여 선행을 하며 사는 예수의 모습이 그에게는 단지 자랑스러운 형의 모습일 뿐이었겠지요

 

자랑스럽던 형의 모습도  예수가  공생애 기간에 집을 떠나 그의 사역을 수행하는 것을 보면서부터  세속적인 혈연 관계만을 생각하는 야고보에게는 가족을 버리고 객지를 전전하며 이상한 짓을 하는 미친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처형되는 데에도 찾아가지 않는 무정한 동생이 되었었는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없는 부활 사건이 있은 ,

그의 영혼을 덮고 있던 불신의 구름이 걷히자  예수는 더이상 "육신의 " 없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그의 마음 점령하게 되었겠지요.

 

뜨거운 믿음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 야고보의 인생은 오순절날 성령세례를 받고 놀라운 변화를 일으켜 예수의 동생 아닌  그리스도의 으로서의  믿음의 행진을 하는 야고보로 변하였고,

이렇게 변화된 야고보의 활약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에게는 별명이 있었읍니다.  무엇이지요?

, 낙타 무릎입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였던지 무릎이 마치 낙타의 무릎처럼 굳은 살이 배기였기에 붙여진 별명이었읍니다.

 

지난 성지순례 , 캄캄한 오밤중에 낙타 등에 타서 시내산을 오를 때에는 몰랐었는데, 내려오는 길에 말로만 듣던 낙타를 자세히 기회가 있었읍니다.

낙타는 땅에 앉았다가 일어날 무릎으로 일어 섭니다.

그러다 보니 무릎 살이 까지고 아물고 하다가 아여 발바닥처럼 굳은 살이 배긴 것이지요.

전에는 낙타무릎해도 감흥이 없었는데 낙타의 무릎을 순간 ! 얼마나  엎드려 기도를 많이 하였으면….이래서 그런 별명이 붙여졌구나…! “하는 이해가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처럼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는 복음서입니다.

갈라디아서(3:1-5)에서 설파하는 사도바울의 “이신칭의” 사상,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다는 것과는 정면으로 상반되는 복음서입니다.

 

 “이신칭의” 사상은 후에 종교개혁의 출발점이면서 핵심 원리가 되었지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는 야고보서의 결론과, 우리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도저히 이룰 수가 없기에 구원은 믿음으로 밖에는 얻을 수가 없다는 결론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또한 뗄래야 없는 유기적인 관계가 있읍니다.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말씀을 드리도록 하고 오늘은 행함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보기로 하겠읍니다.

 

우리 속담에 구술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읍니다.

아무리 구술이 많아도 그것이 꿰어져서 목에 걸려지지 않으면 구실을 못하는 것이라는 말이겠지요.


우리들이
주머니 속에 아무리 돈을 많이 갖이고 있어도 돈을 사용하여 한그릇의 밥을 사기 전에는 우리 배가 불러지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많은 재물과 보화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거저 있다는 자체 뿐이지 보화로서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년
겨울이었나요?

토론토에서  길에서 잠을 자던 노파가 얼어 죽었읍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시장구루마에 온갖 살림살이를 꾸려 싣고 다니다가  아무데서나 잠을 자는 그런 Street Woman이었지요.

그의 소지품을 정리하던 경찰이 주머니에서 $2,000.00정도되는 현금을 발견하였다는 기사였읍니다.

막상 돈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추위에 길에서 얼어 죽었는데…..

여인이 가지고 있던 돈이 돈가치를 한것입니까? 아니지요.

비단 뿐이겠읍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치를 살려서 값어치를 하여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가장 즐거우십니까?

언제 보람을 느끼십니까?

내가 하는 일을 내가 하고 싶을   하였을
즐거움을 느끼고,

내가 일에 대해서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들을 보람을 느끼게 되지 않읍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누구에게나 그에 걸맞는 재능을 한가지씩은 주셨읍니다.

그래서 누구나가 남보다 있는 일이 한가지씩은 있게 마련입니다.

굼벵이도 기는 재주는 있다라고 하지 않아요?

 

내게 주어진 재능을 �기 위해서 우리는 초등학교, 고등학교를 거쳐가면서 부단히 노력하고 그래서 나의 재능을 발견하고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재능을 무시한 욕심에 따라서

없는 재능을 있는 하다가 괴로운 인생을 마치게 되는 것을 우린 경험으로 보아오기도 하였읍니다.

 

내게 주어진 재능이 아닌데 남이 하는 것이 보기 좋와서, 아니면 부러워서 것을 마치 내가 가진 재능인양 억지로 하다 보면 인생은 즐거운 인생이 없고,

행동은 성공하는 행동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발이 손이 되려고 노력을 한들 거기에는 고난만 따를 뿐이요,

귀가 눈이 되어 보려고 노력한들 결국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아 내는 , 중요합니다.

 

그런데 재능을 �아서 키우는 행동이 거저,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린 연습을 하지요. 훈련을 합니다.

 

운동선수들은 조금 좋은 기록을 위해서 땀을 쏟으며 연습에 몰두하지요.

군인들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혹독한 훈련의 과정을 되풀이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끊임없이 붓질을 하면서 연습을 합니다.

시인은 한편의 시를 쓰기 위해서 수많은 밤을 지새우기도 합니다.

목사님들 또한 쉬임없이 묵상하시면서 설교 연습을 하시지요.

 

세상에 거저 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읍니다.

아니, 한가지 있읍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머나의 젖을 빠는 능력, 이것 한가지는 아무 연습없이, 아무 훈련 없이 있는 일입니다.

외의 모든 일에는 연습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연습이 뒷받침 하지 않으면 재능은 빛을 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지난 주에 한국의 김연아가 세계 휘겨 스케이팅 대회에서 1등을 하였읍니다.

녀에게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신체 조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마는 그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하였읍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치를 �아서 이곳 토론토에까지 와서 연습을 하지 않았읍니까?

여러분들이 즐겨 하시는 골프, 연습없이 되는것 보셨읍니까?

모든 운동이 이렇게 연습이 필요하듯 믿음 역시 연습이 필요하고, 믿음의 행동 역시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이 무엇입니까?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예요?

기도도 반복해서 하고,

헌금도 반복해서 하고,

이웃 사랑도 반복해서 하고,

교회의 부서에서 맡은 직분도 즐거운 마음으로 반복해서 하는 모든 것이 믿음의 훈련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 없읍니다.

연습을 통해서 숙달되어지고  자신의 행동에 자신감이 심어질 행동이 자연스러워 지는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면 기도하는 시간이 즐거워 지고

교회에 나오는 시간이 기다려지며

교회에서 맡은 일을 기쁨을 느끼게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바꾸어 놓게 이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우리의 몸을 통한 행동으로 나타나게 하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주시었읍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 한들 아무 행동이 없으면 우리가 믿겠읍니까?

 

20 즈음이었을 것입니다.

세간에 영화가 떠들석한 화제가 되었지요.

Last Temptation of Christ.라고 원작은 그리스의 소설가 Nikos Kazantzakis 라는 사람이 소설을 영화화 것이었읍니다.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 오시어서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여 아들 딸을 낳고 살아간다는 것이었읍니다.

최근에 유행하였던 다빈치 코드는 아마도 이의 후편인 셈이 되겠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고, 부활을 하신 후로 이런 유의 이야기들이 많이 되었고, 신학자들 가운데에서까지 거론이 되어 왔읍니다마는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옷을 달라거던 속옷까지도 벗어주라!’시며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신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 상의 마지막 유혹이라는 소설에 그려진 대로

내가 벌써 죽어, 결혼도 하고, 애들도 낳고.. 살아야지….아직 일이 많은데…” 하시면서 십자가에서 걸어 내려 오셨더라면 그의 모든 가르침은 허망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읽고 묵상하는 성경은 허구에 지나지 않을 입니다.

 

그가 가르친 사랑을 몸소 실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상에서 죽음의 행동을 보여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상식으로는, 우리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없는 부활이 오게 되었고  믿을 없는 부활을 믿기에 우리도 소망을 가지고 천국을 바라보며 열심히 믿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그리고 많은 사도들이 행동으로 보여 살아 있는 믿음을 믿으면서, 묵상하면서 살아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우린 우리의 믿음을 어떤 행동으로 보여 수가 있을까요?

어떤 행동을 하여서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인 것을 보여 수가 있을까요?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의 친구들에게,
우리를 보고 있는 사회에게 말입니다.

우리 함께 나의 행동을, 나의 행위를 돌아 보며 생각하는 아침이 되었으면 합니다.

함께 기도 드리겠읍니다.

'나의 이야기 > 교회, 그리고 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8-08-06 만남  (0) 2012.05.31
2010년 사순절에  (0) 2010.03.24
2008-12-6 구유에 나신 까닭은?  (0) 2008.12.10
2006-03-25 기대치  (0) 2008.10.07
2005-07- 13 기적  (0) 2008.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