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교회, 그리고 나

2005-07- 13 기적

천천히 chunchunhi 2008. 9. 30. 08:59

기적

14: 15-21
Miracle
오병 이어의 기적
우리들은 가끔 기적이라는 말을 잘 씁니다.
도저히 회복의 가망이 없던 사람이 병이 나았을 때,
절망과 좌절에서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안 보이던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서 크게 대성하였을 때 등등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기적 같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그 기적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 기적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가 있을까요?
국어 사전에 찾아보면 기적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일" 즉 우리의 지식과 경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증명할 수 없는 우리의 상식 밖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읽고, 또 모여서 성경을 공부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들이 "참 이해하기 힘들다." "참 믿기 힘들다," "믿을 수가 없다"는 말들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 천지 창조의 이야기는 워낙 원천적이고 거대한 이야기이니까 제쳐놓고라도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모세를 통하여 내린 열 가지 재앙이라던가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만나로 먹이어 주시던 일,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일, 물이 술로 변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감옥 문은 그대로 잠겨 있는데 그 감옥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회당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
이 모든 일들이 우리의 지식과 상식으로 어떻게 일어 날 수가 있는가? 고 자문을 할 때 거기에는 명쾌한 답이 없습니다. 수학 문제처럼 증명하여 보일 수도 없고, 물리나 화학처럼 실험으로 입증할 수도 없는 일들입니다. 단지 입증할 수 있는 것은 고고학을 통하여 그런 기록들이 실지로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 우리들의 지식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이것도 우리의 지식을 토대로 내리는 가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사역을 하시면서 보이신 많은 이적들. 문둥병 자를 깨끗케 하시고,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하며 눈 먼 자가 눈을 뜨고 손 마른 자가 손을 폅니다.
여기 까지는 오늘의 우리들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일들을 도무지 못 믿겠다고 하는 분들은 별로 못 보았으니까요.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의사들이, 또 경우에 따라서는 부흥사 들이 이런 병들을 고치는 것을 보아온 우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우리의 눈 앞에서 증명이 되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는 모릅니다. 허나 이루어 졌읍니다. 그래서 그걸 하나님의 은혜요, 그 권능의 결과라고 믿고 있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떡 다섯 덩어리과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일, 바다 위로 걸어오신 일, 심지어는 기독교의 근본 토대를 이루는 예수님의 부활마저도 믿기 힘들어하며 교회 생활을 하시는 분들 마저 적은 숫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허기사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 옆에서 이런 이적들을 직접 보고 있었던 제자들까지도 믿지를 못하였으니 어쩜 우리가 못 믿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병 이어의 이야기에서만 보더라도 믿기 힘든 것이 어찌 배불리 먹인 사실뿐이겠습니까?
모인 무리가 남자만 5000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 자리에는 여자도 있었고, 또 어린 아이들도 있었을 것을 암시하는 이야기이고 그렇다면 그 모인 무리의 숫자는 5000을 훨씬 웃도는 어쩜 7,8천명, 아니면 만 명이 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교회에 여성이 더 많은 것처럼 그 당시에도 여성이 더 많았을 지도 모르니까요.
5000명만 해도 엄청난 수입니다.
더군다나 또 야외입니다.
요즈음처럼 마이크 시설도 없는 데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이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 까요?
한번 여려분들이 고등학교를 다니실 때 운동장에서 행하는 아침 조회를 생각해 보세요. 중 고등학교를 합해서 그 당시에는 약 3000명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학생들은 열을 지어 나란히 서있고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단에서 이루어 집니다. 그때 전기가 나가던지 마이크가 고장이 났던지 해서 육성으로 훈시를 할 때 그 말씀을 잘 들을수가 있었는지 한번 생각 해 보세요.
그 훈시를 듣기가 거의 불가능 했던 기억들을 다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듣는 문제는 제쳐 놓고 먹는 문제들을 가지고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요즈음 진보적인 신학을 자처하는 신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하며 이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즉 그 당시에 사람들이 다 자기가 먹을 음식을 조금씩은 가지고 다니었는데 서로가 눈치를 보며 먹지 못하고 있다가 어린 아이가 내어놓는 것을 보고 서로 너도나도 내 놓으니까 모두 배불리 먹고 그 남은 것이 12바구니가 되었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상식과 지식으로는 그럴 듯 도 한 이야기입니다. 아니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내어놓은 해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해석을 믿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모여서 소위 요즈음 말하는 진보적인 신학이 된 것이겠지요.
설명대로 자기가 먹을 것을 비록 가지고 왔더라도 남의 눈치 때문에 먼저 먹지를 못하였다면 아마도 그 양은 결코 많지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고사에 십시일반이라고 열 사람이 한 숫갈씩 줄여 먹으며 한사람을 먹인다는 말처럼 먹을 것을 줄여서 나누어 먹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은 양을 또 서로 나누어 먹었는데 어떻게 12바구니나 더 걷을 수가 있었을 까요?
이것보다는 조금은 더 복음주의에 가까운 해석으로 이렇게 설명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모두 배불리 먹었다는 것은 육체적인 배 불림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영적인 배불림이었을 꺼다." 라고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믿음이 있는 분들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이렇게 믿기를 즐겨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경 말씀이니 믿기는 믿어야겠는데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으나 이런 설명은 조금 설득력이 있는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그 때의 배부름이 과연 육체적인 배부름이 아니라 영적인 배부름 뿐이었을까요?
물론 영적인 배부름도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허나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분명하게 육체적인 배부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배 불리 먹고도 12바구니에 차게 걷우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기적은 우리의 지식이나 상식이나 경험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그래서 성경말씀이 거짓말 같다는 의심을 주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가 기적을 어떻게 정의를 하였지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기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 일은 문자 그대로 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믿기 힘든 이런 기적을 행하셨을까요?
저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의 소유자임을 우리 인간들에게 믿게 하려고 행하신 것이 아니가 생각 키웁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마가복음 2 10절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같은 능력의 소유자이심을 우리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첫째로는 말로 설명하는 방법이었읍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설명하시었읍니다.
하늘나라를 잘 아시는 예수님이 그 하늘나라를 모르는 우리 인간에게 설명을 하시자니 가장 적절한 방법이 비유가 되겠지요.
그 외에는 어떻게 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설명을 할 수가 있을까요?
마치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설명하면서 그 이론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든 비유가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1분하고 뜨거운 난로위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1분하고 그 1분은 같은 1분이지만 그 1분을 느끼는 여러분의 감정은 전혀 다른 1분입니다.”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저도 상대성 원리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 비유로 보면 과연 그 1분은 같은 1분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많이 틀리는 1분이 되겠구나고 생각키워지니까요.
여기에 비유의 힘이 있는 것 같읍니다.
두 번째로 그 능력을 이렇게 기적으로 나타내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행동으로 보여 주시었건만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그 많은 기적을 보고, 체험하였던 제자들마저도 이 기적을 완전하게 믿지를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광풍과 싸우던 중에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고, 또 얼마 후에 무리가 모였을 때 먹을 것을 걱정하니 7병 이어의 기적을 다시 나타내시며 예수님께서 한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인간의 한계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기적은 누가 행사하시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우리의 이 얄팍한 지식과 능력으로 이해가 안 된다고 하나님의 권능을 부정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믿겠습니까?
믿어야지요. 그게 믿음이니까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지 않았읍니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기가 참 힘들어요. 인간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말이예요.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생활하며 그 많은 기적을 눈 앞에 보면서도 그걸 믿지 못하던 제자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알고 있는데, 2000년이 지난 오늘, 그 기적을 말씀으로 알고만 있는 우리더러 믿으라니 좀 무리가 아니겠어요?
당연히 무리지요.
그런데 언제부터 제자들이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으며 그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까?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의 역사를 받은 그 다음부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지식과 경험과 능력으로 믿을 수 없던 일들이 성령을 체험한 후부터 확신의 믿음으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번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과, 하늘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우리로 하여금 믿고 또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걸어가야 할 길, 즉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고  그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며 따르는 길이 구원에로 이르는 길임을 우리들로 하여금 확실히 믿게 하시기 위하여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후 우리에게 성령으로 다시 오시어서 그 사역을 완수하신것이 아닌가 생각 키웁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속의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식과 능력만을 믿을 것이 아니라 그 것을 믿고 따르게 하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성령을 간구하고 어떻게 해야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는 저의 영역이 아니기에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허나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움이 있을 때 이 기적들을 의심없이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믿고 안 믿는 것, 옆의 사람에게, 부인에게, 남편에게 물어보며 확인 할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또 누가 물어 본다고 대답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기적을 믿는다고 대답한다고 옆의 사람이 그럼 나도 믿지 하고 따라 믿을까요?  아닐것입니다.  믿음은 각 개인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다고 말하지요?  그래서 구원 또한 각 개인의 것입니다.
내가 믿고 내가 구원을 받는 다고 내 옆의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안 믿는 다고 내 옆의 사람이 구원을 못 받는 것이 아니듯이  구원은 오로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니까요. 마치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두 강도 중에서도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사람은 구원을 못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이것도 우리 마음 속의 믿음이지 누가 입증해 보았나요? 그 입증을 직접 보신 적이 있나요?    그러나 또 한가지, 사람은 주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내가 믿으려 해도 옆 사람 때문에 안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내가 안 믿으려 해도 옆 사람 때문에 믿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읍니다.근묵자 흑 혹은 맹모삼천 이라는 고사처럼  말입니다. 어떤 이웃을, 어떤 친구를, 어떤 가족을, 어떤 교회를 가지는가가 그래서 중요한 모양입니다.)

기적, 다른 말로 하면 신비, 즉 신의 비밀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기적이기에 믿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이 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적이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이 되어지면 그건 벌써 기적이 아닐 테이니까요.
공부하시는 많은 분들이 가정을 세우고, 가설을 설정하며 학문적으로 그걸 우리에게 설명하며 우리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노력을 합니다. 그러면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소위 신학의 파를 만들어 냄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신학이 많이 생겨 났지요.
또 그 신학이 교회를 좌지우지하게도 되었읍니다.
허나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우리를 구원하여 준다고 생각하니까요.
그 신앙을 위해서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을 가르치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교회에서 교회생활을 하여야 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집단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참 사랑을 우리가 느끼고 배워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인도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변화되어지지 못한 나를 사회에 내 보내 참여시키는 교회보다는 성경으로 돌아와 말씀에 의지하며 교회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하며 나를 변화시키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부터 변화가 되면  나가 모여 이루는 가정이, 가정이 모여 이루는 교회가, 사회가 자연스레  변화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나를 돌아보고 그 기적을,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스스로 확인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뜨거운 여름에 시원한 온누리 교회에서 말입니다.

머리는 차겁게, 가슴은 뜨겝게……(빌려 온 말입니다.)

05.07.13 

 

2005 7월 구역예배에서
(광야의 만나에 7월 예배 안내가 안나왔기에 마침 7월 광야의 만나 표지가 52어이기에  이 본문을 택하여 보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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