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의 덫 1 교만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바람소리 좋다하나 그칠적이 하노매라…….
오우가의 초절이다.
내가 좋와하는 벗들을 나열하기 위해서 내가 싫어하는 것, 안 좋와하는 것을 나열할 수 있는 풍류, 얼마나 멋진가!
나에게는 얼마만큼의 벗이 있고 얼마만큼의 싫은 것이 있을까?
벗은, 좋와하는 것을 생각하다보니 수석과 송죽처럼 고상한 벗은 하나도 없고 얼른 생각나는 것이 오관을 즐겁게 해주는 말초적인 즐거움만을 연상시키니
나라는 존재는 아직도 멀었나보다. 그것도 한참 멀었나보다.
머리에는 매화꽃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창문은 닫혀지기 시작하며 방앗간의 맷돌도 그 맷질을 천천히 쉬기 시작하는데 아직 멀었으니 어쩐다?
그러면서도 내가 싫어하는 것은 서로 머리를 내밀며 나 여기 있노라하니……
그래 오늘은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한번 나열해 보기로 하자.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말을 막 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의 심정은 아랑곳 없이(?) 뒤끝이 없노라며 있는 대로 직선적으로 말을 하면서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그런 사람 말이다.
말이란 한번 하면 주워 담을 수도 없기에 조심을 하여야 겠건마는 그래도 돌비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기에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고 잃어버릴 수 도 있다지만 어떤 경우에는 심비에 새겨진 말 한마디가 평생을 두고 무거운 짐이 되어진다는 것을 아마도 모르기에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말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고 거저 농처럼 한다고 하여도 그게 듣는사람에 따라서는 그 농 한마디가 치명적인 비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제일 싫어 해야 할 사람이 바로 지척에 있는 아내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한 평생을 같이 살아 온 것을 보면 내가 용기가 없어서인가?
결단심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그 책임감, (결혼식에서 한 서약 말이다.)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그래도 그 말로서 오는 상처보다는 알뜰히 꾸려주는 살림살이가 조금은 더 필요해서였을까?
그 아내가 뱉어 놓은 말들을 수습하기 위해서 뒤에서 아내 몰래 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남편의 처량한 모습(?)이 싫어서 한번은 조용히 타이른다고, 주의를 준다고 이야기를 하다가 대판 싸움으로 번진적도 있었지.허허허
그러다 보니 더는 싸움하기도 싫어 ‘에이 어디 네 멋대로 해 보아라. 네 무덤 네가 파지…이젠 아뭇 소리 안한다.’ 얼음 띄운 냉수 떠 놓고 맹세도 하여 보았지만 아직도 때때로 아내의 말꼬리를 잡고 “그런 소리는 하지마!” 하는 것을 보면 나의 결심의 강도란 별 것 아니었나보다.
그 다음,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생긴 부부싸움 끝에 부인이 하는 말,
“그 때 자기에게 한 말이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아느냐”고 다시 대어 들 때 무언으로 대꾸하며 속으로는 “그래도 아직 할 말은 더 남았느데…뭐 그깟 소리 가지고 그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결국 제일 싫어하는 짓을 스스로가 한 꼴이 되고, 그 싫어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벌써 교만의 덫에 걸린 꼴이리라.
그 다음으로 싫어하는 것이 공치사하는 사람, 자기 자랑을 자기 입으로 하는 사람이다.
내가 무엇 무엇을 하였노라고, 내가 무엇 무엇을 가지고 있노라고, 내가 하니까 되어지더라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며 좌중에서 혼자 떠드는 사람을 못보아 준다.(지는 대화도 잘 못하면서말이다.)
워낙 사교성이 부족하다보니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도 만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중에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몇 있었다.
어느정도 교분이 생겨가면서 느끼게 된 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자기 자랑하는 것만 조금 조절하면 무척 크게 대성할 사람 같이 보여서 언제인가 기회가 오면 귀뜸을 해 주어야지 하고 생각하던 차에 그 사람으로부터 어떤 일에 자문을 구하여 온 적이 있었다.
나의 의견을 물어 왔기에 진솔히 나의 생각을 이야기 해 주고 난 후에 “K형! 형이 말을 할 때 ‘내가…’라는 말을 조금만 적게 하면 형의 말에 더 무게가 실리고 형이 더 크게 될 것 같은데…” 라며 조심 스럽게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 일 이후에 어찌된 영문인지 조금씩 거리가 생기더니 이제는 거저 길에서 만나 인사나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 배웠지. 아무리 좋은 충고라도 듣는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안하느니만 못하다고….
그럼 친구란 과연 무엇인가?
안 좋은 점,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는 단점을 옆에서 보완해 주지도 못하는 그게 친구란 말인가?
나는 가끔 주위의 친구들에게 나의 단점을 물어본다.
모두들 남에게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자제하도록 현명하기에 그렇겠지만 그게 대체로 칭찬으로 돌아와서 그게 좋와 자꾸 더 물어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중에서도 뼈있는 소리를 추려서 들으며 고치려 노력을 한다. 소위 행간의 뜻을 읽으려 노력한다.
이 버릇은 아마도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 된 것 같다.
고등학교 때 공부는 안하고 소위 설문이랍시고 남에게 비쳐진 나의 모습이 어떤지, 내가 무엇을 고쳐야 할찌, 앞으로 무엇을 하는 게 좋을지… 이런 하챦은 질문들(지금 되 돌이켜 생각하면 하챦은 것들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을 등사해서 이름없이 반송해 달라고 학우들에게 나누어주곤 하였었으니까.
그 때 학우들에게 보여 졌던 나의 모습, 30년 만에 고국방문해서 만난 그 급우들로부터 되새김을 하여지는 것을 보면 그냥 허망한, 입에 발린 소리들만 해 주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요즈음도 그 때처럼 설문을 돌리지는 않지만 내 딴에는 내가 하는 행동과 그 뒤가 어떻게 되었는지 스스로가 되 돌아보며 점검을 한다. 그리고는 될 수 있는 대로 냉정히 분석해서 잘 못된 점은 앞으로 고치려고 노력을 하지만 그래도 그 잣대는 나의 잣대이기에 에누리가 많이 있겠지.
나의 잣대로 잰 나는 나의 기준으로 어떻다고 생각을 하는 데, 그리고 주위로부터 되 돌아오는 결과와 소리로 볼 때, 내 딴에는 어느정도 합당하기도 한데, 물어보지도 않은 아내한테서는 자꾸 잔소리 밖에는 들리는 것이 없으니 그 잔소리가 진실이라면 내가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양면성을 가진 것이 되던지, 아니면 어느 한쪽이 과장된 표현을 하였던지도 모르겠다.
아내야 내가 있으므로 내 아내이기에 나를 나 답게 있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주의 주고, 나로하여금 교만에 빠지지 말라고 자꾸 나에게 잔소리를 하겠지만 그런데도 아내의 그 소리는 잔소리로만 들리니 이게 또 교만의 덫에 걸린 꼴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요즈음이 자가발전시대라고 하여도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서인지 그게 잘 안된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 자랑을 창피한지 모르고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매스컴을 타고, 사회 명사가 되고 하는 것을 보면 분명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마는 그 나의 생각이 나를 지배하니 어쩌겠는가.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잘난체 하기 위해서 주위에게 물어본다느니, 스스로 분석을 한다느니 하며 별란 짓을 다 하고 있으니 이 또한 교만의 덫에 걸린 소이가 아니겠는가.
칭찬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용기를 가지고, 힘을 가지고 자신감 속에 더 큰 성취를 이루게 하여주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칭친을 들어서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
그 칭찬에 현혹되어 교만해지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턴 칭찬은 사람을 즐겁게 하여 주고 친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칭찬에 참 인색한 편이다.
요즈음은 의도적으로 칭찬을 하려고 노력을 하지만 그게 참 잘 안된다.
왜일까고 곰곰히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 원인과 결과는 결국 다 나로 인하여 기인한 것이기에 씁쓸히 웃고 말았다,.
이 또한 교만의 덫에 걸린 소이일 것이다.
잘 한 일을 보고 잘 했다고 칭찬을 할 때에는 그게 마음에서 우러나온 칭찬이어야 듣는 사람이 좋와하게 된다.
그런데 그 잘 했다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녀들이 학교에서 그림을 그려 왔을 때 그게 비록 형편없는 그림이라고 할 지라도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한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니까.
그 수준에서 그만큼 그렸으면 잘 한 것이니까.
그리고 그 칭찬이 격려가 되느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사회에 나와서 어떤 모임에서나 어떤 단체에서나 어느 누가 어떤 일을 하였을 때 그 결과가 나의 기준으로 볼 때 별로 탐탁치가 않기에 칭찬에 인색해 지는 모양이다.
여기서 그 기준을 그 사람에게로 낮추어 주면 무슨 내가 뭐나 되는 것 처럼 거만해 질까봐 걱정하고, 그래서 내 기준으로 바라보니 조금 아쉬운 점이 있어 마음에서 칭찬하기가 좀 뭐하고… 하니 입발린 칭찬보다는 거저 “잘 했어” 하고 마니 그 말에 누가 신명이 나 하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자기의 한 일을 잘 안알아 주는 사람을 누가 좋와하겠는가?
골프장에서 티 샷을 잘 했을 때 주위에서 “나이스 샷” 하며 칭찬을 하여 주면 그 친 사람도 ,그 말한 사람도 기분이 좋와질 것이다.
그런데 그 샷이란 것이 내가 방금 친 것 보다 조금 못한데 내가 내입으로 나이스 샷하면 그것을 듣는 사람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까?
“씨 자기는 나보다 더 잘 쳐 놓고…그게 뭐 나이스 샷이야?” 할 까
아니면 “내 주제이 이만하면 잘 쳤지. Thank you.” 하며 고마워 할까?
이런 고민을 하는 그 자체 또한 교만일 것이다.
이젠 매사를 그 사람의 기준으로 보며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겠다면서도 그 기준으로 보겠다는 마음을 가졌으니 이또한 교만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또 늙으막에 남에게서 인심이나 얻으려는 얄팍한 인기전술이 아닐까?
교만의 덫 그 1은 결국 입에서 나오는 말이되는 모양이다.
그 말이 있기 까지에는 생각이 물론 있었겠지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런데 왜 요즈음은 이렇게 생각이 힘들고 꼬이기만 할까?
존재하기가 이처럼 힘 들다는 이야기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 또한 교만의 덫에 걸려 허우적대는 모습인 것 같다.
Who knows not and knows not he knows not, he is fool.
Avoid him.
Who knows not and knows he knows not, he is simple.
Teach him
Who knows and knows he knows, he is wise man.
Follow him.
직역을 하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모른다는 것 차체를 모르는 사람은 바보이니 사귀지 말어라.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 모른다는 것 자체는 아는 사람은 단순한 사람이니 가르쳐 주어라.
자기가 알고 있으면 서 그 알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니 그를 따르라.
에드가 알렌 포우가 한 말이라고 들었는 데 어느 싯귀에 나오는지는 모르겠다.그런데 꽤나 맞는 말이고 꽤나 좋와하는 글귀지만 또한 교만의 덫에 걸리게 하는 꽤나 위험한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안다는 것이 알면 얼마나 알아서…
한다는 것이 하면 얼마나 잘 해서…..
아웅 다웅 해 보았자 그 아웅이 다웅이고 다웅이 아웅일 것을….
“헛되고 헛되니 헛되도다.
해아래 하는 모든 수고가 다 헛되도다”고 하였으니 결국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또 “하나님…”을 알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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