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카타콤베(Catacombe) - 로마 13
기원 전.후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에도 가난했던 사람들은 있었고, 그들 또한 죽었지만, 망자를 위한 무덤을 땅 위에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다 “카타콤” 혹은 “카타콤베”라고도 하는 말은 옛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섞여진 '카타쿰바스'(구덩이 또는 동굴의 옆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단다. 그러니 카타콤베는 지하공동묘지인 것이다.
네로 시대의 박해를 전후하여 초기의 선교활동은 로마 근교에 살던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계층 사람들에게 많이 행해졌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은 주로 테베레강 어귀와 아피아 가도 주변이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모진 박해 속에서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이 안전히 모여 구원자 이신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는 곳은 남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이곳, 지하 무덤 밖엔 없었다.
그 중에서도 아피아 가도 주변에 많이 있던 지하 무덤 안이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자들의 무덤도 그 안에 마련되면서 지하 무덤, 즉 카타콤베의 면적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하였었던 것이다.
로마의 황제들 중에서도 신자들에게 가장 심한 박해를 가했던 황제는 카라칼라와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이었다.
그 중에서 발레리아누스는 기독교인들의 지하 공동 묘지를 색출하여, 묘지 출입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의 박해 시기는 로마의 역사가들이 '피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한 시기였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이 313년에 선포되면서, 장구한 세월 동안 박해받던 교회는 이제 땅 밑에서 땅 위로 올라오게 되었던 것이다.
교황 성 다마수스(366-384)가 아피아 가도 주변에 있던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무덤을 포함해서 그 일대의 지하 공동묘지를 재정비하여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지하 공동묘지”라고 명명하면서 처음으로 '카타쿰바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후 카타콤베에서는 사망자, 특히 순교자를 기념하는 미사가 집행되며 순교자에 대한 숭배와 존경심이 높아짐에 따라 그 묘에다 기념비적 묘지명을 붙이거나 지하도를 넓히는 등 카타콤베 개수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이곳은 또한 로마에 침입한 이교도들의 중요한 약탈 대상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어느 지하 무덤에 가 보더라도 관 뚜껑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파괴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단다.
이렇듯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8세기 부터는 그때까지 카타콤베에 남아 있던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유골을 로마의 성 안쪽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순교자들의 유골이 성 안의 기념 성당으로 모두 이전되자 순교자들의 발길은 카타콤베에서 성당으로 바뀌어 지면서 카타콤베는 역사 속에서 차츰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십자군전쟁 이 후, 로마가 성지순례자들의 순례지로 부각되자 16세기에 와서 카타콤베 발굴과 연구가 시작되어, 아피아 가도에서만 카타콤베가 60여 곳 발견되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게 붙잡혀 ‘아피아 가도(Via Appia Antica)’를 따라 로마로 압송됐다는 이유와 이 지역의 지질이 적합하였던 점이 일치하였었나 보다..
가장 오래된 카타콤베는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중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관리하는 ‘칼리스토 카타콤베( Catacombe di San Callisto)가 2세기에서 4세기까지 재위한 몇몇 교황의 유해가 묻혀 있기 때문에 교황 납골당( Capella dei Papi)이라고도 부르며 오늘날까지 수많은 순례자의 성지로 자리 잡고 있다.
2006년 5월 11일 오후 석양 무렵에 찾아 간 칼리스토 카타콤베에는 순례객도, 관광객도 별로 없었다.
작은 입구를 통하여 어두운 지하로 내려가니 지하의 공기가 서늘하였지만 묘지라는 선입관을 자극할 만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구비구비 돌아 가며 벽면 양 편으로 파인 묘실들을 보며 옛날에 믿음을 찾아 지하로 피신하도록 순결한 믿음의 자취를 보는 감회가 전율로 다가올 때 즈음에 이젠 나가야 한단다. 아마도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오늘의 마지막 순례객이었던 것이다.
그래, 진정한 종교란, 진정한 믿음이란, 어려움 속에, 거센 핍박 속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신실한 믿음으로 뭉치며 이루어 지다가, 그 세력이, 교세가 커져서 권력의 비호를 받고, 아니 스스로가 권력이 되어 충분한 재정이 스스로를 위하여 쓰여지며 사치하기 시작 할 때, 화려한 치장으로 하늘 높이 지은 성전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적인 권력 투쟁과 교만으로 하나님이 슬며시 사라지는, 그런 순환이 지난 4천년동안의 역사 속에 남긴 우리 인간들의 믿음 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날까지 믿음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옛날 지하 공동묘지안에서 울리던 간절한 기도와 간구의 메아리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아직도 길게 뻗어 있는 아피아 가도(街道)
카타콤베 입구와 복장주의 표시.
그리스도인임을 알아내기 위한 묘안으로 만들어낸 것이 물고기를 그리는 것이었다. 물고기라는 헬라어 "잌뒤스(ΙΧΘΥΣ)"를 풀어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뜻이다.
음악가의 수호 성인으로 잘 알려진 체칠리아의 가묘.
무덤위에 있는 조각상은 복제품이고 카를로 마데르노의 진품은 현재 트라스테베레 산타 체칠리아 교회에 보관되어 있고 그 아래 그녀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다.
성녀는 뜨거운 열탕에서 증기로 질식시켜 죽이는 방법으로 처형당했으나 전혀 요동치 않고 찬양을 드렸는데 몸에 해를 입지 않고 살아나오게 되었단다. 그러자 이번엔 참수형으로 그녀를 처형했는데 그녀의 목은 절단되지 않은 채 3일간 더 생존했다고 한다. 독특하게 그녀는 오른쪽 손가락을 셋과 왼쪽 손가락 인지 하나를 편 채 죽었는데 이는 그녀가 성부, 성자, 성령이 일체임을 증거한 것이라 설명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그녀 사후 생긴 것인데….
아니면 먼저 이를 예언한 것인지 혹은 다른 뜻이 있는지….
사자는 말이 없다.
살아 있는 가이드는 말을 하고….
성직자들의 묘소는 조금 더 화려하였다.
한참을 걸어 꼬불꼬불 돌다 보면 다른 문으로 나오게 된다.
“지하묘지를 보며 돌아 나온 길”은
“앞으로 걸어 갈 나의 길에서 어떤 여운으로 작용을 할까?”
마지막 일정으로 카타콤베를 나오니 하루의 일과를 마친 태양도 슬며시 서쪽으로 내려가며 긴 그림자를
무거운 발걸음에 붙여 주고 있었다.
음악
[김성종] [6:07 PM] https://m.youtube.com/watch?feature=youtu.be&v=L9UP-tu_d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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