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서유럽 대가리

39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천천히 chunchunhi 2019. 7. 5.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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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로마제국의 발상지인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톨리오 언덕 사이에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발전하며 로마제국의 수도 기능을 하기 위하여 세워진 많은 공공건물들과 신전, 원로원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고 회의할 수 있는 광장이 있었으니 요즈음엔 이를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라고 부른다. 로마가 계속 세계 속으로 팽창하며 수많은 정복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황제들의 개선문들이 세워지면서 광장은 점점 좁아졌으나 이 마저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6년부터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시작하며 로마가 동서 로마로 서서히 고착되어가는 동안 빛을 잃어 가다가, 이전이 끝났을 때에는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는 졸지에 제국의 수도에서 서 로마의 변두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서 로마 분열 이후 서 로마 제국의 수도는 메디올라눔(현재의 밀라노)였지만 서 로마의 황제 호노리우스가 402년 수도를 라벤나로 옮기면서 제국은 외세의 침입에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바다 건너 브리튼 섬은 앵글로 색슨 족에게, 갈리아는 프랑크 족에게 넘겨주었고, 에스파냐 역시 서고트족의 위협에 위태롭다 보니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자연스럽게 반도 안으로 축소된 셈이었다.

451년에는 중앙아시아 출신의 훈 족의 침입을 막아내며 한숨을 돌리는 듯했지만 4년 후 게르만 족의 일파인 반달 족이 로마를 침략해 서로마는 게르만 족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동안 유럽 대륙의 인종은 서서히 혼혈이 되어 가며 동시에 유럽의 정치 지도가 바뀌어 가던 격변의 시기였다. 

476, 황제의 친위대장이었던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를 폐위시키며 서 로마제국은 공식적인 멸망에 처하게 되었다.

 

로마를 정복한 이민족들에게 로마의 유산은 약탈의 대상이었고, 이제는 국교가 된 교회의 성장으로 많은 교회들이 지어 질 때 필요한 석재들을 뜯어 가고, 또 지진으로 파괴되었어도 복원을 생각하지 않은 채 거의 모든 건물들이 부서진 그대로 방치하는 동안 토사 아래에 묻혀 버리며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은 로마는 서서히 땅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이전의 이 지역은 땅 속에 절반 이상 묻힌 개선문과, 폐허가 된 일부 건축물들이 땅 위로 삐죽 드러나 있는 황무지였었단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무솔리니 시절에 복원이 시작되었지만 그 복원 또한 무솔리니의 취향이 개입되면서 많은 유적들이 부서져 없어지기도 하였지만 아직도 땅 속에 많이 있다는 말들이 있다. (그 말을 확인할 수가 없으니 믿거나 말거나….)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은 비잔틴 제국으로서 1453년까지 존속하기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로마제국의 멸망을 언제로 보아야 할 것인가?” 에 대한 주장은 좀 엇갈려 있기도 하지만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도시 국가에서 출발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것이 로마사의 1단계라면, 그 후 지중해 연안 전체를 정복하며 북으로는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을, 동으로는 중동지역 대부분을 정복하며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슬로건 하에 대 제국을 이룬 시기를 2단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세계로 뻗은 길을 통하여 문물이 교역되고, 문화와 종교가 전파되던 화려한 대제국은 3기로 들어서며 사치와 쾌락의 샴페인을 너무 많이 터뜨린 모양이다. 수 많은 석학들이 로마제국의 흥망에 관해 논쟁을 하며 몰락의 원인이 내부적 원인이냐?” “외부적 원인이냐?”를 규명하려 노력을 해 왔지만 이 또한 과학처럼 증명할 길이 없으니 우리 말처럼 달도 차면 기우나니….”가 아닐까?  그래도 그네들의 문화와 역사의 결과는 요즈음 우리들의 생활에도 깊이 스며 들어 있고, 그 유물들 또한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며 후손들을 먹여 살리니 오늘의 이탈리언들이 조상은 참 잘 두었나 보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린 무엇을 하였던가?

포로 로마노의 전경. 로마인의 광장이라는 뜻으로 그리스의 아고라 같은 역할을 한 공공집회 장소요, 정치적, 종교적인 건물들이 모인 곳이었다.


원로원이지만 여러 차례 개축, 보수되며 여러 용도로 이용되어 온 건물이다.

원로원 앞의 광장에는 시민들이 연설을 하던 장소가 있었단다.

 시저가 암살당하면서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기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라고들 설명을 하지만 이것은 세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의 희곡적인 설정에서 온 이야기일 뿐인갑다.

2012 10 10일 스페인 국립연구위원회(CSIS)가 줄리어스 시저가 2천여 년 전 브루투스 일당에게 피살당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이 원로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로마 시내에 있는 유적지 토레 알젠티나(Torre Argentina) 에서 발견됐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고대 사료들을 통해 시저가 폼페이 대극장에서 피살된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물증을 찾지 못했었다"면서 이번 발견으로 시저의 피살 장소가 입증됐다고 주장했다.

 시저는 기원전 44 3 15일 원로원 모임 참석을 위해 토레 알젠티나에 있는 폼페이 대극장으로 가던 중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의 칼을 맞고 숨을 거뒀다.”고 한다. (Filippo Coarelli (10 May 2014). Rome and Environs) 그러나 CSIS 연구진은 "(칼에 맞은) 시저의 시신이 '로마 포럼(Roman Forum)'으로 옮겨져 몇 가지 의식을 치른 뒤 화장됐다" "시저가 이곳에서 즉사했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막센티우스 바실리카(Basilica di Massenzio)

306년에 지어진 것으로, 3개의 거대한 아치형 천장만이 남아 있지만, 당시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베스타 신전(Tempio di Vesta)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이 신전은 불의 여신 베스타를 위한 신전이다. 둥근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스무 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어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전이었다고 한다. 이 신전에서 6명의 처녀 사제인 베스탈들이 성화가 꺼지지 않도록 지켰단다.


로물루스 신전(Tempio del Romolo)

막센티우스 황제의 아들 로물루스를 위해 4세기경 세워진 신전이란다. 하지만 정확하게 누구에게 바쳐진 신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로물루스는 로마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쌍둥이 형제 중의 하나이기도 하니까


아직도 발굴은 계속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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