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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로마의 개선문3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천천히 chunchunhi 2019. 6. 28.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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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로마의 개선문3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윗부분에 새겨진 문구를 우리 말로 번역을 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 신의 영감과 숭고한 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정의의 무기로 폭군과 그의 일파들에게 복수하였으므로 이에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은 승리의 증표로 이 개선문을 헌정했다.” 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신의 영감으로(INSTINCTV DIVINITATIS)’란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서기 235년부터 284년까지 50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가 26명에 이를 정도로 로마에서는 왕위 찬탈이 끊이지 않았었다. 소위 군인 황제 시대였던 것이다.  284년 제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혼란스러운 제국에 다소간의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 황제의 수를 늘려, 황제 두 명에 부황제 두 명을 더해 로마는 모두 네 명의 황제가 나누어 통치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자리가 늘어나니 옥좌를 놓고 벌이는 이전투구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그게 어디 오래 가겠는가?  황제라는하늘 아래 유일한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4명의 황제들 사이에 다시 패권 다툼이 시작 되었다.  

 

307년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사두체제와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면서 봉기하여 로마를 장악하자 동로마의 정제인 갈레리우스가 막센티우스를 단죄하기 위해 군사행동에 들어갔지만 실패하였다. 이에 퇴임 정제들과 회의하여 리키니우스(Gaius Valerius Licinianus Licinius, 263 - 325)를 서방의 정제에 임명하기로 했다.  311년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가 죽자 리키니우스가 동방의 정제로 취임하여 동•서방의 정제가 되었다. 이 당시 중요한 라인 강 방위선의 강력한 부대를 지휘하던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독자적인 황제의 권리를 주장하는 막센티우스를 처단하기 위해 로마로 출정하게 되었다.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 병력의 1/4 밖에 되지 않는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부 이탈리아의 베로나를 공략한 다음 막센티우스와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 위해 로마로 내려오고 있을 때였단다.  대낮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상과 함께이 증표로 이기리라(In hoc signo vinces)”라는 문구를 보았고 그날 밤 꿈에서도 같은 광경을 보고는, 잠에서 깨자마자 꿈에서 본 것을 그렸고, 기독교 지도자들을 불러서 하나님과 자신이 본 십자가 모양에 대해 물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얻은 그는 꿈에서 본 십자가를 제국의 깃발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상징은 그리스 알파벳 중카이(Ⅹ)’(Ρ)’를 합친 것이며, 그리스 알파벳으로그리스도란 단어를 쓸 때 앞의 두 글자이다.



이 심벌은 후에 카톨릭교회의 상징으로 그대로 사용되었다.

 

31210 27, 막센티우스의 군대와 로마 북부 밀비우스 다리에서 벌린  전투에서 막센티우스가 테베레 강에 떨어져 전사함으로 콘스탄티누스는 승리하였다.

이 전투로 인해 제국 서방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유일한 강자로서 군림하게 되었지만 서 로마의 정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리키니우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다음해인 313년에 밀라노에서 그와 회동하여 로마제국을 동서방으로 공동 통치하기로 협정을 맺고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며 몰수되었던 기독교 재산을 모두 교회에 돌려주었다

수많은 내전을 거쳐 권력을 잡게 된 콘스탄티누스에게 권좌는 아마도 항상 불안하였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로마 황제는 교회의 권위 내지는 하느님의 권위에 의해 임명된다는 원칙을 세우고 따라서 그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며 그의 권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기독교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며 초기 기독교의 정착을 주도하였던 것이리라.

박해받던 기독교가 드디어 로마제국에서 합법적인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325년에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의 교리적 기틀을 다져 놓기도 하여 동방정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며, 어머니 헬레나와 함께 5 21일을 축일로 지정하였다.

교회사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와 열심은 있었지만 337년 죽기 바로 직전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단다.

세례 받은 후 짓는 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죽기 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꺼번에 모든 죄를 씻고자 한 것이라니, 아마도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은 두 강도 중 구원 받은 강도가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사도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하는 교황제도를 시작하며 정치와 종교가 야합하다 보니 어느 새 교황이 각국의 왕위를 좌지우지하는 절대권력자로 부상하며 유럽 역사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는가 보다

 

324년 로마 동부를 차지하고 있던 황제 리키니우스마저 쳐부수면서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326년부터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으니 즉위 10년을 기념하여 원로원이 로마에 가장 크게 콜로세움 가까이에 세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던지 다른 개선문들에서 떼어 온 석재와 부조물들을 여럿 사용하였던 것 같다고 주장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예술적인 관점에서는 그리 큰 점수를 얻지 못하고 있단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철책으로 둘러 싸이어서인지 사람들은 거저 먼발치에서 지나 가면서 보고 마는 모양이다. 

이 개선문을 본 떠서 더 크게 지어진 파리의 승리의 개선문은 아직도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콜로세움의 바로 옆에 웅장하게 서 있지만 콜로세움의 크기 때문에 초라하게 보이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다.


개선문에 묘사된 밀비우스 다리 전투 장면


라파엘의 방- 바티칸 박물관 안의 콘스탄티누스의 방(Stanza di Constantino)에 있는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Pons Milvius) :

라파엘은 죽기 전인 1520년에 콘스탄티누스의 방 구성을 끝냈고, 그의 제자들이 1525년에 완성하였다.




밀비우스 다리. 여러번의 개.보수 후에 이른 오늘날의 모습이다.


https://m.youtube.com/watch?v=Bwcqdkn237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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