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리 4 강화도 4 전등사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도 많이 변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고즈넉한 산사가 아닌 전등사에서 옛날에는 없던 죽림 다원에서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나누어 지는 대화 속에 되 살아나는 인생 여정!
참 멀리도 돌아 왔나 보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고려 충열왕 때 정화공주가 옥등을 시주한데서 전등사로 이름을 고쳤기에, 현존하는 사찰 중 창건연대가 가장 오래 된 절인 셈이다. 이 땅에 불교가 전래 된 것이 고구려 소수림왕 대인 서기 372년이라고 하니까.
그러나 현재 그 옥등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누군가가 비장하고 있으려는지….
1,7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있었겠는가?
1605년(선조 38)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 버렸고, 1613년(광해군 5)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해서 1625년(인조 3)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1678년 숙종 때에는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기도 하였었다.
현재 대웅보전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외에도 보물 179호인 약사전과 393호인 전등사 철종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5호인 전등사 법화경판등 17점의 지정 문화재가 있는 고찰이다.
사찰 경내에는 70여 년 이래로 은행이 한 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한민족 문화 대백과사전에서)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裸女像)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와 눈이 맞아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단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추녀(醜女)의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하였단다. 그 곳에서 매일 불경 소리를 들으며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했다고 전해진다.
추녀는 순 한글로 기둥 위에 끝이 위로 들린 크고 긴 서까래를 일컫는다. 그런데 못생긴 여자와 발음이 똑같다. 왜 일까?
아마도 여기 전등사에서 추녀(醜女)가 받치고 있어서 인가 보다?! ㅎㅎㅎ
전등사 대웅보전 네 귀퉁이의 연꽃좌대에 쪼그리고 앉아 무거운 기와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조각상
전등사
- 고 은
강화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옛날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온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 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시인 고은 선생은 효봉스님의 제자로 출가를 하여 속리산 법주사를 거쳐 전등사 주지를 역임하셨다 한다. 1957년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시와 수필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전설따라 삼천리?)
50년이 넘어 그 때 그 계단 앞에 함께 앉아 본 친구들.
대웅보전은 그대로인데 사진만 낡았나 보다. 허허허
철종. 강화도령이었던 조선 25대 왕의 이름이 아니라 보물 393호인 전등사에 있는 철로 만든 종이다.
더 이상 은행이 안 열리는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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