쯩(證)의 연가(戀歌)
요즈음은 자격증의 시대인가 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격증을 따기 위해 노력하는가 하면, 이런 저런 모임의 회원이 되어 명함을 만들고는 그 이름 뒤에 직함을 붙이게 되지요. 이것만큼 편하고 쉽게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저 또한 이 곳에 와서 오랜 노력 끝에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따고 보니, 다니던 회사에서도 분명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에는 별 차이가 없는데도 대우가 달라지더군요. 그리고 회사 일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명함을 서로 건네 본 후에 저에게 오는 대우가 달라지는 것을 몸으로 느꼈으니까요.
벌써 6개월이 넘게 부동산캐나다에 사진 이야기를 연재하다 보니 이름 뒤에 오는 직함은 사진작가도 아니요, 무슨 사진사협회 회원도 아닌 그저 토론토 사진모임 카페 운영자 중의 한 사람으로만 나오니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의 사진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저의 아버님으로부터 사진을 배울 수 있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0년대에 동경에 유학하시면서 본과는 일본 문학이셨으나 취미로 사진에 심취하신 저희 부친께서는 그 당시 전 일본에 몇 대 안되던 라이카라는 카메라를 가질 수 있는 행운아이셨습니다. 저의 아버님의 아버님, 즉 저의 할아버님께서는 그 당시 만주 용정에서 광산업과 목축업을 하시던, 꽤나 재력가이셨거든요.
이 때 익힌 기술이 결국 6.25동란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부산으로 피난와야만 하였던 저희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근간이 되었었지요. 전쟁 중에 많은 피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증명서였습니다. 그 증명서마다 들어가는 증명사진을 즉석에서 찍어 인화해 주는 일이었지요.
처음에는 사진관도 없고 암실도 없이 야외 나무 밑에서 모든 작업이 이루어 졌었습니다. 사진에 필수적인 암실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나무로 만든 사과궤짝(박스) 이었습니다. 사과 박스를 검은 헝겊으로 둘러싸고, 앞에 조그마한 창에 빨간 유리판을 대고, 위로는 눈을 가져다 댈 수 있는 구멍과 양 팔이 들어 갈 수 있는 두개의 구멍이 뚫린 위에 팔이 들어 갈 수 있도록 검은 헝겊으로 튜브를 만들어서 붙인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목에 걸린 35mm카메라 한 대.
전기도 요즈음처럼 곳곳마다 항시 들어오는 것이 아니던 시절, 대부분의 가정이 촛불과 호롱불 등잔에 의지하던 그 시절, 사진에 필요한 유일한 광원은 태양이었습니다. 그러니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었지요.
사진을 찍은 후 간이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하고, 현상된 필름을 인화지에 밀착시킨 후 태양의 위치와 밝기를 가늠하면서 앞의 빨간 유리를 막았던 막을 열었다 닫으면서 노출을 조정한 후 인화지를 현상하면 젖은 증명사진이 나옵니다. 이 젖은 사진을 유리판에 붙여 놓고 햇빛을 쏘이면 얼마 후에 바짝 마른 증명사진이 나오는 것이지요. 아주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저희 부친의 아이디어로 그 당시에는 거의 없던 즉석사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경기가 꽤나 짭짤하였기에 얼마 안가서 사진관을 차릴 수가 있었지요.
서울로 환도하신 후에는 당시 큰 무역회사의 총무부장으로 일하시기에 사진하고는 거리를 두시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시어 직장 생활을 하기가 어려우실 때 충무로 3가, 소위 한국의 할리우드라고 불리던 곳에 있던 집 앞의 자그마한 공간에 사진관을 여셨습니다. 이 때 어깨 너머로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가 있었기에 중학교 시절부터 소풍을 가던지 할 때마다 친구들은 제게 카메라를 주며 사진을 부탁하곤 하였었습니다. 그 당시의 제게는 카메라가 없었거든요. 그만큼 가세도 기울었었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1967년에 전 가족이 캐나다로 이주를 왔습니다. 그 후의 이민살이야 우리 모두에게는 한결같이 하나의 소설이 될 터이니 각설하기로 하고….
요즈음 들어서는 대학에도 영상학과라는 것이 많이 생겨서 사진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는 동안 동아리를 만들고, 또 선배를 찾아다니면서 멘토를 만들고 방과 후에는 개인적인 가르침을 받으면서 사진의 풍을 배워 나가노라면 자연히 여기 저기 출품도 하게 되면서 전문가적인 길을 걷게 되겠지요. 그리곤 이름 뒤에 사진작가라는 명칭이 붙게 되겠지요.
사진을 찍기 위한 기계적인 방법은 카메라와 함께 따라오는 매뉴얼을 보면 누구나가 다 습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계적인 기술에서 벗어나서 느낌을 담으려면 꽤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미술관에 가 보면 유명한 그림 앞에서 모사하는 미술생도들을 보실 수가 있듯이 사진 또한 마찬가지로 모방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풍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이나 여기나 다 마찬가지로 사진에 먼저 입문한 사람들끼리, 또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단체를 만들고, 그 단체가 주관하는 사진 응모전을 통해 신인을 발굴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제자들이, 그룹 멤버들이 많이 뽑히게 되겠지요.
젊어서 이역으로 이민을 와서 생존경쟁에 허덕이며 보낸 한 평생. 이제 환갑을 훨씬 넘겨 고희의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 요즈음까지 이런 단체에 가입하지도 못하였다가 이제 은퇴할 즈음에 소일거리로 다시 만지작거리는 카메라요 사진이고 보니 뭐 내세울 게 하나도 없더라는 말입니다.
지금 대학에 다시 가서 몇 년을 공부한다는 사치를 누릴 형편이 아직은 아니기에 “쯩의 연가”를 읊조리며 카메라의 화인더를 드려다 보는 요즈음인가 봅니다. ㅎㅎㅎ
골프장에 나가보면 처음부터 코치에게 레슨을 받은 사람은 사관학교 출신이라 부르고 이런 사람들이 결국은 골프를 잘 치게 되는 것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저 처럼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을 간부후보생이라고 부르더군요. 제가 골프를 시작하던 1980년도 초에는 레슨을 해 줄 수 있는 한국 분들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리고 그 때의 형편으로는 경비 또한 만만치가 않았으니까요. 요즈음에야 많은 티칭 프로가 있지만…. 그리고 또 그 때만 하여도 골프는 그렇게 배워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결국은 “보기 맨”에서 벗어 날 수 없는 현실을 느끼게 되더군요.
저처럼 비록 부친으로부터 배웠다고는 하나 그 체계가 학교에서 배운 것만은 할 수가 없기에, 결국은 혼자 독학을 하며 응용을 하다 보니 사진 세상에서도 결국은 간부 후보생의 딱지를 떼기가 무척 힘들게 된 모양입니다. ㅎㅎㅎㅎㅎ 간부 후보생이 별을 달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울 텐데…. 그러니 “쯩의 연가”나 불러야지요.
아들 녀석(벌써 40이 된 장년입니다마는 제게는 아직 녀석이지요.)도 요즈음 고등학교에서 본직은 컴퓨터를 가르치지만 그 외에 가끔씩 사진도 가르친다고 하니 어쩜 “쯩”없이 배우고 가르치는 것 또한 부전자전인가 봅니다. 부전자전이란 말이 나왔기에 재미 삼아 저희 5대에 걸친 장손들의 모습을 올려 봅니다.
5대에 걸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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