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봐야 할까?
무엇을 봐야 할까?(6월 사랑방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나누어 봅니다.)
6월 사랑방에서 나눌 이야기의 주제는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을 얻고,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하여 늘 읽고 묵상하는 책이 무엇입니까? 성경이지요.
우리가 오늘날 읽고 있는 성경 66권이 정경으로 결정되기까지에는 여러가지 우여 곡절도 있었고, 또 많은 성경학자들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는 오역도 많고 그 원 뜻하는 바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있고, 또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어체로 되었기에 다시 쓰여 져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까지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성경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그 성경으로 하나님을 만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세한 내용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문체가 어떻게 변할 것인지는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마낄 문제이고, 또 그것을 받아 들이는 것은 그것을 읽으면서 영감을 느껴야 하는 우리들의 몫이기에 그 문제는 여기서 거론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마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이야기 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울로 변한 사울이라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있을 수 있도록 디딤돌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빛도 없이 바울의 그늘에 가려 우리 귀에는 좀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 바나바가 없이 과연 바울이 있을 수 있었을 까 할 때 바나바의 역할은 실로 중대하다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 성경을 이야기 할 때 바울이 중요할까요?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고, 아니 오히려 핍박하던 사람이었는 데 말이예요.
많은 성경을 써서?
그렇기도 하지요. 몇권을 썼지요?
히브리서를 누가 썼는가에 따라서 학자에 따라 혹은 13권, 혹은 14권 하고 말들을 하지만 몇권을 썼는가가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은 무엇을 어떻게 누구에게 썼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의 처음을 차지한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다분히 유대인들을 위한 유대인들의 종교로 국한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술한 내용들입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의 경우 비록 그 대상이 로마인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당시의 로마인들이란 결국 유대를 지배하던 사람들이고 또 그 유대 땅에 거주하며 유대에 많이 동화되었던 로마사람들이 되겠지요.
그리고 그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끝을 맺고 있지요.
이것은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으로 서술한 기록들이며 그 사역을 이방인들인 로마사람들에게 알려 믿게 하려는 목적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복음서 이후 사도행전을 통해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이땅에 오시고 그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행적이 기록되면서부터, 또 사울이 바울이 되면서부터 그리스도교가 유대인들의 종교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종교로 변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지는 의미가 더욱 중요한 것이고,
그래서 그 바울이 있을 수 있도록 디딤돌 역할을 한 바나바가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성경의 배열이야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필요에 따라서 나열하였겠지만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읍니다마는 사 복음 서 이후 사도행전을 통해서 로마서로 이어지고 그후 서신서로 이어지다가 나중에는 묵시적인 요한계시록으로 끝나게 만들어 지지 않았습니까?
즉 그 흐름이 유대 땅에서 시작해서 성령의 역사하심에 힘 입어 로마로 전파되면서 그 길목에 있는 소아시아, 그리스를 통해서 세계적인 종교로 클 수가 있었던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야기가 조금 곁 가지로 흘렀읍니다마는 나무의 모양이 나무답기 위해서는 줄기만 있어서는 안되겠지요?
이제 줄기로 돌아와서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디딤돌 역할을 하였는가를 살펴보며 우리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살펴 보았으면 합니다.
바나바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로 본명은 요셉이었으나 후에 사도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행 4:36)
레위 족속이지요.
예수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에 은혜를 받고 자기 소유의 밭을 팔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행4: 32-37)
여기까지의 기록을 보면 뼈대있는 가문에서 태어나서 의롭게 자라며 경제적인 능력도 상당히 가진(자기 소유의 밭이 있을 정도로) 그러나 재물에 대한 욕심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감화되어 자신의 욕심을 비우며 초대 교회의 공동생활에 동참하고, 또 그 생활을 주도하였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을 할 수가 있겠지요.
자신의 전 재산을 드려서 사도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의 사랑에 희열을 느껴 그 도를 전파하기에 힘쓰던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첫 인상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평가 할 때, 나에게 심어준 첫 인상이 꽤나 크게 작용을 하는 것을 모두가 다 느끼었을 것입니다.
첫 인상이 좋으면 웬만한 실수도 애교로 봐 주지요. 허나 첫 인상이 고약하면 하챦은 실수라도,”그럼 그렇지….그럴 것 같더라..”하며 손가락질하기를 주저하지 않지요.
20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회심한 사울이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사랑에 꺼꾸러져 이제 자기가 느낀 그 사랑을 전해야 할 테인데 도무지 사도들과 친해 지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사도들의 기억에는 여전히 핍박자 사울로 남아 있었으니까요.
이 때 그 사도들을 설득하여 사울에게 바울로서의 변화된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주자고 간곡히 설득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행:9-26-27)
바나바라고 사울을 몰랐겠습니까?
또 사울이 아무리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 본심이, 사람의 마음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을 테이니 그 본심을 알 기가 쉽지 않고, 또 언제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는데 그 사람을 놓고 보증을 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저를 보증서주십시오” 할 때 선뜻 나서서 보증서주실 분이 어디 쉽겠어요? 아마 저의 부인 빼고는 한분도 안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쩜 이젠 저의 부인마저도 보증을 안서려고 할지도 모르지요. 늙고 추해지고 능력없어 졌다고 말이예요. 허허허
그만큼 사람에 대한 보증은 예나 지금이나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그 사울을 보증을 서 주었어요.
사도들에게는 좋은 첫 인상을 남긴 바나바, 자기의 재산을 다 헌납하도록 열성있고 믿음있는 사람이 보증을 서겠다는 데 사도들이 마다할 이유를 대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사도들이 허락을 하기는 하였는데 그래도 미심쩍어서 바울의 행적을 뒷조사를 하고, 바울의 설교를 분석하면서 혹시 잘못 되지는 않았는가를 열심히 조사하던 모습도 성경에는 기록되어져 있읍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바나바가 먼저 안디옥 교회로 파송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도하다 다소에 있던 바울을 불러와 함께 사역을 하기 시작 합니다.(행11:22-26)
이때부터 바울은 마치 물만난 물고기 처럼, 유비를 만난 제갈량처럼 그 박식한 지식과 그 체험을 토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면서 그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지요.
바나바가 불러 오지 않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바울을 들어 쓰셨겠지만
이 하나의 과정이 없었더라면 바울은 거저 바울로 역사안에 뭍혀 망각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이 무척 얇아졌겠지요?
사람이란, 아니 인간의 능력의 한계란 그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기회를 만났을 때의 그 기회만큼 커질 수 있는 것이고,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준 바나바가 그래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점만을 보자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내야겠지요.
허나 성경을 열심히 읽으시는 여러분들인데 더 읽으시다가 나중에 다른 대목, 예를 들면 행;15:36-41 아니면 갈:2-13을 보시면서 이런 면도 있는 사람인데 뭐 그리 대단히 말하느냐하시면 할 말이 없어지지 않겠어요?
인간적으로 약한 면도 우선은 함께 나누어 보아야 겠읍니다.
행:11;24에 말씀처럼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던 바나바도 결국은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나 봅니다.
그렇듯 보증을 서 주던 바울과 더불어 동역을 하다 보니 의견차이가 생겨 결국은 서로 갈라지게 되지않았습니까?
갈라 서는 것도 성령의 역사라면 할 말은 없읍니다마는 저는 이건 다분히 바울과 바나바의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어쩜 사랑할 때와 미워질 때가 있고, 연합할 때와 헤어질 때가 있다는 전도서의말씀이 다시 한번 진리로 나타났는지도 모르지요.
이런 부분만을 볼 때에는 바울도 바나바도 다 속물에 지나지 않을것입니다.
저나, 여러분들과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이지요.
모든 일에는 두가지 상황이 공존하고 있읍니다. 손바닥과 손등이 동시에 따스로울 수가 없듯이, 동전에도 두 면이 있고, 등잔을 켜도 그 밑은 어두운것 처럼 모든 일들에는 밝고 좋은 면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볼까?, 무엇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를 결정해야하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단에 의해서 우리가 후세에, 아니면 우리들의 자녀들로부터 저울질 당하여 질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은 남편대로 부인의 단점을 자신의 눈에 맞게 고치려 지적하고, 부인은 부인대로 남편의 단점을 자신의 눈에 맞게 고치려 지적하다 보면 그 가정에는 바람 잘 날이 없겠지요.
허나 부인이 남편 잘못 고쳐주려 노력하지 않고, 남편이 부인 잘못 고쳐주려 노력하지 않으면 그게 어디 부부라고 하겠읍니까?
서로가 잘못은 고쳐 주어야지요. 그런데 그 잘못을 고치려는 방법에서 지혜를 찿아야 할 것입니다.
장점을 살려서 상대적으로 단점이 적어지게 하는 방법하고, 단점을 확대해서 수술하려는 방법하고 말이예요.
우리 인간들에게는 누구나 에고가 있게 마련이지요.
자신의 잣대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난 수요일 기 일혜 집사님 간증집회에서 들은 말씀 중에 귀에 닿는 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부부가 살아 갈 때 부인보고 어머니처럼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잣대를 가지고 자녀를 보면 모든 허물들이 다 감싸여 지겠지요.
자라는 딸들이 “나도 이다음에 저런 엄마가 되어야지”
자라는 아들들도 “나도 이다음에 저런 부인을 얻어야지” 하는 그런 어머니 말입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요.
아마 그런 마음이 안되어서인지
바울과 바나바도 함께 사역을 하다 보니 서로의 허물들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성격적인 차이도 많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서로가 좋와하고 싫어하는 것들이 나타나고 서로가 일을 추진하는 방법에서 다른 견해를 나타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갈라서야만 했는지도 모르겠읍니다.
이렇듯 바울에게도, 의로운 사람이라던 바나바에게도 어두운 면이 있었읍니다.
허나 우리가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서로가 갈라섰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다투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능력의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키워주기 위해서 남들 앞에서 보증을 서 줄수 있는 그 마음,
서로가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겠다는 그 하나된 목표를 위해서는 희생하고 자제할 수 있는 그 마음을 보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전체를 보고 그 전체를 본 다음에는 그 전체에 있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중에 어디에다 우리의 시각을 맞추며 생각을 해야하나 하는 결정을 우리가 내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잠시 본다는 것을 한번 더 생각해 보지요.
우리가 흔히 본다 할 때 무엇으로 보지요?
눈으로 보지요.
그런데 눈으로만 보나요?
맛을 볼 때엔?
먹어 보지요.
냄새는?
맡아 보아야 알지요.
차거나 더운 것은?
만져보지요.
소리는?
들어보지요.
사람을 볼 때에는?
겪어 보아야 안다고 하지요.
이렇듯 우리가 무슨 사물이나 대상을 볼 때에는 우리는 우리의 오관과 마음까지 합쳐서 육감을 총 동원하여 순간 순간의 본 것을 우리 뇌리에 기억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때에 따라서는 첫인상이 되기도 하고, 또 때에 따라서는 고정관념이 되기도 하고 그러는 거겠지요.
이렇게 보는데 경험이 많고 똑똑한 사람들은 사물의 이치를 꿰어 보고, 사람의 마음을 잘 뚫어 보며 그 좋은 점과 나뿐 점을 다 함께 보는 능력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좋은 점을 잘 보고, 어떤 사람은 나뿐 점을 더 잘 보기도 하고, 그래서 그 인간성이 형성되어지나 봅니다.
결국 우리가 6감을 총 동원하여 보는 것은 결국은 우리들의 마음으로 보는 것일 테인데 그 마음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는 분 계십니까?
우리들의 마음은, 양심은, 믿음은, 긍정적이고 좋은 면을 보아야 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 우리의 마음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우리이고 보면 결국은 성령님께 매달리며 간구해야 겠지요.
똑똑하여서 사물을 꿰 뚫어 보며 장점, 단점을 다 보는 것 보다는 항상 단점이 조금 더 많은 우리들이지만 좋은 면을 보고 좋게 생각하고, 격려하면서 사람을 키워주는 우리가 되게 하여 달라고 말입니다.
바나바처럼 사람을 믿고 키울 수 있게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중에서도 사울이 바울로 변하는 역사가,
의심의 구름을 벗어내고 바울을 받아들였던 사도들의 마음이 우리들 가운데서도 일어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랍니다.
그 믿음의 토양에서 오뉴월 햇볕에 무럭 무럭 자라는 들의 곡식처럼 우리들의 믿음도 무럭 무럭 자라서 함께 추수하며, 함께 잔치하며 함께 영생을 누리는 온누리 식구들, 생명사랑방 형제 자매들이 되기를 기도드림니다.
2005년 6월 18일 구역예배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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