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 2003-12-02
마 5:1-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성경을 읽다 보면 의문 나는 구절들이 어찌 한 두 군데 뿐 이겠습니까 마는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산상수훈중의 팔 복이라고 하는 오늘 읽은 본문말씀도 참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구절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분명히 9가지의 복 있는 사람이 나오는데 왜 이걸 8복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는 것이 그 첫째요,
둘째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신 이 여러 가지 복의 조건들이
우리들이 흔히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복하고는 아주 동떨어진,
복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복의 조건들이기에 말입니다.
가난한 게 어떻게 복이 되고, 애통하는 것이 어떻게 복이 되며
핍박을 받는 것이 어떻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복이 되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들하고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런 조건들을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며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도 드는 것 같습니다.
금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 또한 “주님 안에서 행복합니다“라고 정하였는데
그럼 그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과연 복이 있는 사람일까요?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 사람은 참 축복을 많이 받았다!” 라고 말을 할 때의
그 축복이라는 정의의 기준이,
또 그 축복으로 인하여 행복할 것이다라고 하는 그 행복의 조건으로
제일 먼저 꼽는 것이 재물의 복이겠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잘 살아 보려고 노력하고 추구하는 것이 돈입니다.
돈이 많아 큰집에서 살며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때에 따라서는 여행도 즐기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우선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들을 하지요.
이렇게 돈의 충족이 있은 다음에는
건강한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들 하지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건강이 없으면 그 돈을 쓰러 다닐 수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돈이 있고 건강이 있은 다음에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명예 아니에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지위를 누리는 사람을 우린 행복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부러워하곤 합니다.
그런데 돈 있고, 건강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따라 다니는 게 한가지가 있습니다.
여자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여복 또한 복의 조건에 넣는 것 같습니다.
그 여자 때문에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듯이(?)
그 스캔들 때문에 한 평생을 쌓아 온 부귀와 명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기도 하지만 말 이예요.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식들이 잘 성장하여 사회적으로 앞에 말한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삶을 사는 사람을 보고 또 자식 복이 있다고도 말을 합니다.
이렇듯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복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생활을 하는 데 편리한, 편안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
남보다 조금 더 많이 충족되었을 때를 행복이라고 하고,
그런 사람들을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들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비단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2000년 전의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고 또 그 훨씬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시었지요.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기도 하시고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기도 하시었습니다.
이 이적들을 보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지요.
오는 본문에서 한 구절 더 앞으로 보면 마태복음 4장 23절로부터 말씀하시기를
“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쫒으니라“ .고 하였읍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는 유대나라가 로마의 압제 하에서 착취를 당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림에 고통 당하고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때라 많은 병자들이 삶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런 때에 아무 노력을 안 해도 예수님만 따라 다니면 배부를 수가 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병도 낳고 하니 이 분이야 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요, 진정 왕으로 모시면 로마의 압제에서도 벗어 날 수가 있고,
또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믿고 따라 나섰던 것 같습니다.
따라 다니는 무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의 주변에서 함께 생활하던 제자들마저도 그들이 추구하는 것의 목적이 이 땅에서의 우리 삶에 있는 편안과 행복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오늘 본문의 한참 뒤에 이제 주님께서 잡히시어 죽임을 당하기 바로 전날까지도 제자들이 서로 누가 더 큰 자 인가고 자리다툼을 하고(눅 22장 24절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
또 주님에게 물어 보는 것이 이 해방의 때가,
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때가 언제인가를 물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 그 때가 언제이니까? 때는 아버지께 속한 것)
이렇듯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따라 다니었지만
그네들이 추구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주시려는 것하고는 거리가 먼,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눈앞의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듯 우리가 추구하는 눈앞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며
그런 생활을 하는 삶들이 진정한 복 있는 자일가요?
돈,
사람에 따라 순서가 좀 달라지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저 없이 제일 처음으로 꼽는 돈, 그 돈이 정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고 있을까요?
그 돈이 정말로 신명기에서 말씀하시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축복의 전부일까요?
돈이 있으면 행복하고 돈이 없으면 정말로 불행할까요?
돈이 있으면 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를 편하게 하여 줄 뿐이지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행복을,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더 많은 유혹을 불러들이는, 그래서 우리를 실족하게 하는 매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힘들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집에 가시어서 바늘을 꺼내어 그 바늘귀를 눈앞에 가까이 놓고 그 바늘구멍을 통해서 한번 내다보세요. 그 바늘구멍을 통해서 낙타보다 훨씬 큰 CN Tower까지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쉬운 방법입니까?
예수님께서도 또 우리들에게 부지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쉬운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자 청년이 와서 어떻게 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느냐고 물으니까
“네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쉬운 방법이에요. 욕심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욕심이 있기에, 마음을 비우지 않았기에 힘든 것이지요.
죽을 때엔 동전 한 잎 가져 갈 수가 없는 인생이면서 말입니다.
그 다음에 꼽는 건강.
건강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여 줍니까?
육체의 힘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여 줍니까?
우리 육신의 힘과 건강 또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인도 할 수도 있고
불행한 삶으로 인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삼손과 델리라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삼손, 얼마나 건강하고 힘이 장사였습니까?
그런데 그가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명예나 지식 또한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삶을 산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도 주저 없이 솔로몬을 꼽을 것입니다.
전도서2장 25절에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라며
솔로몬 자신이 스스로 말하였듯이
솔로몬이야말로 돈과 건강과 명예를 다 한 손아귀에 쥐고 한 평생을 살다간
인간적으로 볼 때 가장 행복했던 사람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속에 왕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휘두를 수가 있었지요,
지혜로운 판정으로 명예를 얻었지요,
하나님이 주신 건강으로 몇 백 명이 넘는 부인들을 두고 살았으며
저 솔로몬의 옷 하면 화려하기가 그 극에 달한 호사로움을 누리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추구 할 수 있는 모든 행복의 조건들을 다 골고루 갖춘 정말로 행복한 삶 중에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가 정말로 행복하였을까요?
그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모아 놓은 잠언과 전도서를 보면 그 어디에도 이런 모든 경제적인 부유함이나 건강한 육체나, 많은 지식. 그 어느 것도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였기에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네 번씩이나 반복하며 헛된 것을 추구한 삶을 탄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아마 여러분들도 다 답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 잘 믿고 구원받는 것이라고 대답은 쉽게 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모두들의 기도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앞서 이야기 한
재물과 건강과 지식과 명예의 갈구가 아닌가 합니다.
기도를 하였더니 응답을 받았다는 말들을 가끔 듣지요?
그런데 예수를 잘 믿고 기도를 많이 하면 모두가 부자가 됩니까?
우리 교회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세상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부자입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다 가난합니까?
아니지요.
예수를 진실하게 잘 믿는 사람들 중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부자도 있습니다.
좋은 사업을 하려 해도 필요한 것이 돈이며,
가난한 사람 구제하려 해도 필요한 것이 돈이요,
선교사업을 크게 하려해도 필요한 것이 돈이 아닙니까?
그러니 부자가 나뿐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단지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느냐, 그 돈을 보는 각도가 어떤가가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 온누리 교인 모두가 다 지혜로운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크게 선교하고, 더 크게 봉사하고, 터 크게 주님의 사업을 하는 교회가 되고, 교우들이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건강,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다 건강하게 장수를 누리고 있습니까?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다 병들고 연약합니까?
아니지요.
예수를 진실히 믿는 사람들 중에도 남들이 상상조차 못할 육체의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를 안 믿고도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려 주신 나사로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살려 주신 야이로의 딸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우리 인간의 육신이란 병이 들었거나 건강하거나 한정된 시간 속에 살다가는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죽게 마련이지요.
아무리 고대광실에 살더라도 죽은 다음에는 2자 6자면 족한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고 명예롭게 사는 사람들이 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입니까?
예수를 안 믿는다고 명예를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 않아요?
그럼 이건 무엇입니까?
우리가 좀 더 잘 살아보고, 좀더 많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십일조도 열심히 내며 때에 따라서는 감사헌금, 선교헌금 이렇게 내가 힘써 모은 돈을 교회에 바치고,
토요일 새벽에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 기도회 등등 교회에서 하는 모든 예배와 기도에 열심히 참석을 하는데
교회에 안나오면서도 부자가 되고,
교회에 안나오면서도 건강하고,
교회에 안나오면서도 명예 또한 얻을 수 있다면
이 저녁 우리가 힘든 일을 끝내고 피곤한 몸으로 이곳에 와 앉아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과연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신
“복 있는 사람은” 하며 제시한 8가지, 아니 9가지 복의 조건들을 다시 한번 음미하며 재조명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 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하다는 것은 어떨 때 쓰는 단어입니까?
가진 것이 없는 상태이지요?
좀 오래 되긴 하였습니다마는 한국에서 3김씨가 대통령 경선을 하면서 “마음을 비웠다”는 말들을 많이 하였지요.(사실은 비우지도 않았다는 것이 들통이 낫지만 말이에요.)
이 말은 또한 겸손해 지겠다는 말과도 상통이 되겠지요.
마음이 빈 사람이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조그마한 것에도 감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육이오를 지난 우리들의 세대는 다 경험을 하였겠지만 크리스마스나 설날에 새 양말 한 켤레를 얻어 신어도 얼마나 신나고 고마웠습니까?
그런데 요즈음 모든 게 풍족한 우리 아이들, 양말 한 켤레에 감사합니까?
컴퓨터를 사주던지 자동차를 사주던지 해야 진정으로 감사해 하는 모습을, 그것도 잠깐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양말 한 켤레, 쌀알 한 알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리는지 모르는 데 말입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
겸손히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마음에 평안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욕심을 부리는, 우리 속담대로 99냥을 가진 부자가 100냥을 채우기 위해 1냥 가진 가난한 사람의 그 1냥을 빼앗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사람의 마음이 평안하겠습니까?
아까 함께 부른 찬송가처럼 (495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마음에 평안을 가진 사람에게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평안 속에 하늘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느끼며 사는 사람,
그러니 천국이 저의 것일 수 밖예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 자신의 지은 죄를 회개하는 마음이라고 의역도 합니다마는
슬픔이 극에 달한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전도서에서 말하였듯이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는 법인데
울다가 웃는 것이 낳습니까 아니면 웃다가 우는 것이 더 좋습니까?
더 이상 슬퍼 질 수가 없고, 또 웃을 수 있는 때를 기다리며 위로 받을 수 있으니 지금 웃으며 언제 울게 될지 모르는 사람보다는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였는데 요 대목은 좀 힘이 드네요.
시 37:11에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하고 맞는 말이지요.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모세를 꼽지요.
민 12:3에서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하였으니까요. 이처럼 온유한 모세가 결국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는데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끝까지 온유하지를 못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이 대목은 다음에 목사님에게 여쭈어 보아야 할 제목인 것 같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옳은 일을 하기 힘쓰며 의로운 길을 찾아 구도 하는 사람들,
주린 사람들은 더 이상 주릴 데가 없으니 이 또한 앞으로는 채워지는 일밖에 더 있겠습니까? 제일 처음에 가난하다는 것과 상통이 될 수가 있겠지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씀,
더 사족이 필요하지 않은 말씀이리라 사료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또한 더 설명을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팔복 중에 제일 마지막, 즉 10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시며 11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하시며 앞의 팔복에 하나를 더 더하여 9복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라,
모함을 받고 악한 저주를 받는 것이 복이라.
보통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말씀이지요?
모르기는 하겠지만 여기에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의 마지막, 고난 주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받는 고난, 또 많은 사도들이 받은 고난.
이 고난의 결과가 오늘날 우리 모두를 구속해주는 은혜로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또 핍박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 답은
요 15:19 에 있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렇듯 주님께서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이 세상에서의 편함을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마음에 평안을,
그리고 육신의 뒤에 오는 영생의 평안을 주시기 위한 것인데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결국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의 편안이니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또 우리들에게 그 복의 근원을 다시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가르치심의 제일 처음으로 진정한 복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고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는 있지만 평안을 줄 수는 없으되 주님께서 제시한 9가지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평안을 얻을 수가 있고 또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 키웁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하신 말씀처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즉 영원히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는,
그래서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을 누릴 수가 있는 사람으로 변할 수가 있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편안과 평안.
비슷한 단어이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단어입니다.
편안 속에는 평안이 없지만 평안 속에는 편안이 있는 것임을 믿고 체험할 수 있는 우리 모두들이 되어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그래서 하루 하루의 삶이 천국의 삶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 드리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나의 이야기 > 교회, 그리고 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5-06-18 무엇을 봐야 할까? (0) | 2012.06.01 |
---|---|
2005-05-26 행복의 조건 (0) | 2012.06.01 |
2004-05-23 가정의 달에 가정을 생각하며 (0) | 2012.06.01 |
2005-05-04 꿈 (0) | 2012.06.01 |
2009-02-28 모순 (0) | 2012.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