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임진왜란의 뒤안길 – 풍신수길 사당에서
오사카성으로 들어 가기 전에 해자 옆으로 풍신수길의 사당이 지어져 있고 그 마당에 풍신수길의 동상이 서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못 생기고 미천한 병졸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원숭이"라고 놀려댔고 그의 부인마저도 그를 "대머리 쥐"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천하통일 3인방,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 두번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임자인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하자 그 와중에 패권을 장악하며 일본 천하통일을 이루어서인지 석대 위에 서 있는 풍신수길의 자태는 위엄마져 있어 보였다.
해자를 건너 복원된 천수각의 3층에 있는 “황금 다실”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사진은 없지만, 황금으로 치장되어 사치스런 이 방에서 임진왜란의 씨앗이 잉태 되고 있었다.
일본 열도의 통일이 틀이 잡히여 가던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가을, 히데요시의 책사이자 외교문서 담당관인 사이쇼 죠타이(西笑承兌)가 빠른 손놀림으로 외교문서를 받아 적었단다.
그 당시 스페인령 필리핀 제도장관(諸島長官, 마닐라 총독)에게 보내는 국서(1591년 9월 15일자)였다.
히데요시는 진심으로 대륙 정복의 꿈을 가지고 있었고, 스페인도 여기에 협조하라는 협박성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히데요시의 국서를 받은 필리핀령 루손 섬의 스페인 총독 고메스 페레스는 답신을 보냈다.
“스페인은 세계의 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한 나라’가 됐다. 그러나 스페인령 필리핀과 일본은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스페인 총독은 일본의 위협에 대비하는 한편으로 일본과 거래를 트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전쟁은 곧 큰돈을 버는 기회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조선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부터 필리핀 루손 섬은 전쟁 물자를 대느라 바빴다.
오사카=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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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3/all/20170722/85472524/1#csidx4f0a1ed9978b58fadcc88802a05cd87
임진왜란의 참상이야 재론할 필요도 없게 잘 아는 역사이지만 그 뒤안길의 노예장사 이야기를 조금 더 드려다 보기로 하자.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국민들이 노예로 끌려 가는 일은 역사이래 계속 되어 온 일이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 당시 일본에 와 있던 포르트갈 상인들과 예수회선교사들을 통해 많은 조선인들이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당시 전 세계 노예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포르투갈 노예상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사냥으로 악명이 높았다. 포르투갈 노예상들의 사주를 받은 일본인들은 조선인 납치가 일확천금의 기회였을 뿐이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에게 철포(조총)나 비단을 받고 팔아넘겼다. (‘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당시 넘쳐나는 조선인 노예들로 인해 전 세계 노예시장의 가격이 하락할 정도였단다.
그 와중에 예수회 선교사인 카를레티는 12스쿠도(scudo·포르투갈 옛 화폐단위·일본 화폐로는 약 30엔)를 지불하고 조선인 5명을 사들였다. 카를레티는 이들을 나가사키의 예수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한 뒤 인도로 데려가 4명을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은 이탈리아 플로렌스(피렌체)까지 데려가 자유인으로 방면했다. 카를레티는 그 한 명이 로마에 있을 것이며, 이름이 ‘안토니오’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이후 안토니오는 로마에 정주하면서 교회 일에 종사하다가 화가 루벤스의 눈에 띄어 ‘한복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의 그림 모델이 됐다고 한다.
사가현(일본)=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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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3/all/20170909/86241853/1#csidx73ebc7c986724d3ac42b575767b5161
여기에는 물론 다른 설도 있다. 설이니까. 그러나 그 당시에도 미모와 재능이 출중하거나 신분이 높은 여성의 경우, 일본 내에서도 지배층의 부인(夫人)이나 첩(妾)이 되기도 하였다.(‘임진왜란에 납치된 조선인의 일본 생활’)
그와 비슷하게 많은 조선사람들이 유럽의 곳곳에 팔려 가서 살았었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요즈음에야 한국을 korea라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Core 라고 불렸으며 이태리에는 Core 란 단어가 들어 간 이름을 가진 집성촌이 아직도 있을 정도라니까….
플랑드르의 화가 Peter Paul Rubens(1577∼1640)가 그린
한복을 입은 남자의 인물화.
오사카 성 옆에 지어 놓은 풍신수길 신사 마당의 풍신수길 동상.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의 원흉으로 여겨지지만 일본에서는 밑바닥에서 시작해 전국 통일을 이룩한 희대의 영웅으로 추앙 받는, 꽤나 인기가 있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화
16세기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포르투갈 상인들과 예수회 선교사, 일본인들이 교류하는 장면을 담은 ‘남만병풍(南蠻屛風). 예수회 선교사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는 사람에게만 조총을 파는 정책을 사용하여 천주교인들이 단시간에 그렇게 많이 늘어나게 되었고, 조총을 가진 그네들이 전쟁에 참여 하여 포로들을 잡아 오면서 노예장사를 하며 큰 돈을 만지게 되던 시절이었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준다고 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다 빼앗아 갔다!” 남미 원주민들이 한탄하며 한 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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