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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리 32 오사카 성(大阪城)

천천히 chunchunhi 2018. 1. 27. 00:10

대가리 32 오사카 성(大阪城)

 

뭐니 뭐니해도 오사카에서 꼭 보아야 할 곳은 중심에 천수각을 품고 있는 오사카 성이다.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豊臣秀吉)로 더 잘 알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절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지은 성이다.

히데요시는 이 성에서 임진왜란을 기획하고, 또한 정유재란을 명령했다.

히데요시 당시는 더 화려해서, 1585년 완성된 천수각은 일본 왕이 거주하던 교토(京都)의 고쇼(御所)보다 웅장하고 사치스러웠 단다.

그러나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라며 인내 속에 기회를 기다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川家)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 권력을 장악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의 세를 완전히 지우기 위하여 1615년 오사카 성을 공격하여 폐허로 만든 후 오사카성의 규모를 ¼로 축소하였지만 도쿠가와 가문의 정권 교체의 상징으로 천수각은

더욱 크고 화려하게 35m 높이의 5층 목조 건물로 지었었다. 

그러나 이 또한1665년 낙뢰도 소실 되어 방치 되었던 것을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이 도요토미의 것을 본떠 재건하였단다.

결국 일본 사람들은 도꾸가와 보다는 도요토미를 더 사랑한다는 이야기인가 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아닌데….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공격 목표가 되어 다시 소실되었다가 1958년 재건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것도 원형대로가 아니라 콘크리트 재료를 사용하여 도꾸가와가 공들여 지었던 5층짜리 천수각도 8(높이 55m)으로 증축 복원됐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노약자들은 승강기를 타고 8층까지 올라갈 수가 있어 오사카시내를 힘들이지 않고 내려다 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오사카성과 천수각은 오늘날에도 일본 간사이(關西) 지방의 최대 도시 오사카(大阪) 시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어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는 데

과연 언제 지은, 누구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 일본을 거쳐 유럽으로 가다 보면 대 항해시대에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포르투갈에서는 벌써 1514년 마카오를 발견하고, 1541년 일본을 발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발견 후 선교사를 파송 하여 임진왜란 당시에는 10만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었는데….

한국에서는 당파싸움으로 서로 물고 뜯고 죽이는 집안싸움에 영일이 없었던 것 같다. 권력을 유해서라면 주상전하!”를 읊조리면서도 실상은 주상도 없고, 국민도 없고, 오직 자신의 영달을 위해 거짓말도, 조작된 모함도 불사하는 정객들이 다스려 온 조선의 정객들이 잘 못인데, 왜 이  오사카성에서는 그 못난 조선의 정객들에 대한 원망보다  조선인들이 겪은 아픈 기억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것일까?


 


해자로 둘러 싸인 오사카 성. 중국이나 동남아의 대부분의 성에는 이런 해자가 있는데 한국의 궁전에는 해자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허긴 적은 항상 내부에 있었으니까!

물이 없는 마른 해자도 있다.


 

오사카성의 중심 천수각(텐슈가쿠天守閣). 한국의 건축 양식과는 다른 모습이다. 도요토미가 지어 올린 부분과 이후 도쿠가와가 쌓아 올린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다시 지어진 덴슈가쿠, 1-4층은 도쿠가와 풍으로 백색의 회벽으로 축성되었다. 담담한 편이다. 5층은 도요토미 풍으로 검은색에 금박을 씌우고 호랑이와 두루미의 그림이 새겨 넣어 화려하게 보인다.  도요토미가 금을 무척 좋아 했단다.


 

성 안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거대한 다코이지 거석.

거석에 문어 모양의 무늬가 있어 문어 거석이란다.

다다오 이케다라는 장인이 세운 거석으로 무계는 약 130톤으로 추정이 되는데, 어떻게 운반하여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그 당시에는 일종의 방어벽이었던 셈이다.

 

 

 

천수각 8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오사카 도심.


용마루에는 황금빛으로 장식한 "샤치가와라(샤치()가와라:호랑이 얼굴에 물고기 모양의 상상의 동물)가 있어 불을 막아 준단다.

 

 

 

 

오랜 전쟁 끝에 통일 된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에 도꾸가와 이에야스 가문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 사이에 일족을 멸하는 피 터지는 싸움이 있었다. 통일 후의 권력 투쟁인 셈이다.

오사카성 천수각 6층에 전시되어 있는 '오사카성 전투(大坂の陣)' 중 여름전투 디오라마.

 

 

 

천수각 입구에는 깊이 33미터에 이르는 우물이 있다.  암살하려는 자가 독을 풀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금괴를 넣어 해독했다는 전설이 담긴 우물이다.

또 다른 설은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쳐 들어 왔을 때 히데요시의 부인이 아들을 안고 투신 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정작 우물에 붙어 있는 영문 안내판에는 이 우물은 도꾸가와 시대에 만들어 졌을 것이라고 적혀 있으니, , , 설이다.

우물의 지붕은 1626년에 만들어졌는데 천수각의 몇 번에 걸친 화재에도 살아남은 건축물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