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리 11 경주 국립 박물관
4,35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배달 자손의 생활 터전 이었던 한반도.
그런데 의외로 우리 나라에는 옛날의 유물들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우리의 건축양식이 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물들이었기에 크게 짓기도, 그리고 오래 유지 하기도 힘들었겠지만 수도 없이 당한 외침에 부서지고, 빼앗기고, 그나마 남은 것 마저 가꾸기에는 너무나도 먹고 살기가 힘든 가난한 세월 탓이는지도 모르겠다.(나중에 나오겠지만 중국과 일본을 다녀 와서는 목조이기 때문에 크게 못 짓고, 오래 유지 못한다는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다.)
아니면 우선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나만의 소장을 추구하다 보니 도굴로 인하여 유물들이 남아 나지를 못하였을까? 그도 아님 우리는 진정 역사에서 배우기를 거부하는 민족일까? 돌로 만들어 진 석굴암과 첨성대가 아직도 제 자리에서 지난 역사를 대변하는 것이 고작이니 말이다.
허긴 돌덩어리들이 배부르게 해 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요즈음에는 그 돌들로 인하여 배부른 삶을 살고 있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라 1000년 고도라는 경주만 해도 1926년에야 겨우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이라는 이름으로 조그마한 박물관이 만들어 져 광복 전까지 유지되었다가 광복 직후인 1945년 국립 박물관 경주 분관으로 시작 되었다.
1975년에야 에밀레 종이라는 성덕 대왕 신종을 옮겨 오면서 국립 경주 박물관은 박물관으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게 되었다.
허긴 이 때 즈음에야 6.25 전쟁 후 절대 빈곤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기에 역사를 되 돌아 불 여유가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후 40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 한 경주 박물관을 둘러 보았다.
2016년 9월 12일. 한국에서 지진 관측을 기록 한 이후 최대 지진이 강타한 경주라며 많은 지진 피해를 Toronto에서 한국의 TV 뉴스에서 보았는데….
늦은 오후 해가 따사로운 빛으로 비춰 주는 10월 6일의 경주는 평온하기만 하였다.
벌써 다 복구가 된 것인가?
아니면 매스컴에서 호들갑을 지나치게 떤 것인가?
허긴 며칠을 계속해서 쏟아 내는 뉴스에 사용되는 사진들을 보면 이미 본 사진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하였었기에 TV News를 잘 믿지 못하는 내가 되기도 하였지만 우리가 가는 길이 그 재난 지역을 다 피해 가기 때문인지 내 눈에 비친 도로변은 깨끗하였고 정상이었다.
가끔 지나는 논의 풍경은 쓰러진 벼들로 어지러웠고, 하천위의 다리를 지나면서 보이는 하천 주변의 경관에서는 홍수 후의 잔해를 볼 수가 있었을 뿐, 길가에서 지진의 잔해는 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경주 국립박물관에 들어 가 보니
“언제 지진이 났는가? 언제 홍수가 지나 갔는가?” 싶을 정도로
정원은 깨끗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모든 전시물들이 다 정상적으로 진열 되어 있었다.
나중에 집에 와서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서야 안 일이지만 큰 지진 전인 7월 5일에 울산 앞 바다에서 난 규모 5.0의 지진이 있었을 때 혹시나 더 큰 지진이 올 까봐 박물관의 전 직원이 미리 지진 대비 작업을 하였었 단다.
모든 전시물들을 낚시 줄로 묶어 놓기도 하고 토기들 안에는 무거운 모래를 담기도 하고
혹은 실리콘으로 토기 하부를 바닥에 붙여 놓기도 하였었 단다.
유비무환의 덕을 본 박물관 직원들의 노고에 뒤 늦은 박수를 보낸다.
늦게 도착한 우리에게 허용된 관람시간은 많지 않았기에 박물관의 관람이 마치 무슨 홍보전시관을 둘러 보듯이 잰 걸음이었지만 잘 정리가 된 전시이기에, 그리고 박물관의 크기 자체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수박 겉 핥기 식이었지만 그런대로 한 바퀴 휘 돌아 볼 수가 있었다.
한반도의 삼국시대보다도 더 전 가야시대부터 천년 역사의 신라 유물들을 보기에는 많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다보탑과 석가탑 모형으로 조성 된 박물관 정원이 저녁 햇볕을 쬐고 있다.
국보 제29호. “성덕대왕 신종”이 본 이름이지만 “봉덕사의 종” 혹은 “에밀레 종”이라고도 한다.
771년에 주조되어 봉덕사(奉德寺)에 달았으나 수해로 폐사된 뒤 영묘사(靈廟寺)에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에 종각을 짓고 보호하였다. 1915년 8월에 종각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겼고,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신축 이전됨에 따라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많이 이사를 다니면서도 깨지지 않은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에밀레 전설 외에 어떤 다른 전설이….?
혹시 인도에서 허황옥이 타고 온 배가 아닐까? 좀 너무 작지?
물 항아리였는지, 혹은 신라법주 항아리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따르기가 무척 버거웠겠다.
그 당시 벌써 유행한 지붕 마감재의 문양. 요즈음 보다 훠얼씬 멋지다.우리 선조들도 이렇듯 예술감각이 뛰어 났었었는데….
안압지의 모형
초기의 금관
여인들의 마음을 서로 잡을 호사로운 삶을 위하여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권력을 잡으려는 모양이다. 욕심의 노예가 되면 비리쯤이야...
계속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안 걸리면 되니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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