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교회, 그리고 나

2006-10-26 숨은 봉사

천천히 chunchunhi 2012. 5. 31. 06:47

 

숨은 봉사

누가복음 83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누가복음 1038-42(111)

 

교회를 배에다 비교를 한다면

목사님은 선장이 되고, 당회는 해도를 보며 갈 길을 제시하는 항해사,

제직회는 배를 움직이는 기관사로 비유를 할 수가 있겠읍니다.

교회의 각 기관 기관들이 배의 중요한 부분에다 비유가 될 수 있겠읍니다마는

여선교회는 과연 어디에다 비유를 할수 있을까요?

어디, 누구 한번 말씀해 주실까요?.

저는 여선교회는 배의 어느 부분이 아니라 그 배를 바쳐주며,

배로하여금 움직일 수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바다에다 비유를 하겠읍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가 배의 구실을 할 수 있지

갯벌에 주저 앉은 배는 비록 유능한 선장이 있고,

항해사가 있으며 기관사가 있다하더라도

배로서의 구실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바다가 때에 따라서는 풍랑을 만들어

배로 하여금 앞으로 못나가게 하는가 하면

때에 따라서는 암초에 부딪치게 하기도 하며

또 때에 따라서는 배를 파선시키기도 합니다.

허지만 이 바다가 잔잔할 때,

배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단 것처럼 목적지를 향해서

순조로이 항해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바다가 없는 배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여선교회, 여성이 없는 교회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역사요

또 교회의 역사였던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제일 먼저, 제일 큰 공을 세운 여성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누구 한번 말씀해 주실래요?

여러 사람들이 여러모로 공을 세웠읍니다마는 그중에 으뜸은 이브입니다.

이브가 없었던들 아담은 아직도 고독을 씹으며

에덴 동산을 배회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면 저나 여러분이 지금 이 온누리 교회에 앉아서 찬양하며 기도할 수가 있겠읍니까?

 

저는 체계적으로 성경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신학을 연구한 사람도 아님니다.

그러니 제가 오늘 드리는 말씀은 지금 막 드린 말씀,

즉 이브가 기독교에 최대의 공을 최초로 세웠다는 맥락에서

이해해 주셨으면 하고 바라면서 숨은 봉사라는 주제로 오늘의 말씀을 전개해 나가겠읍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몇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읍니다.

그 의문이라는 것이 영적이며 대단한 가치가 있는 의문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아마도 여러분들이 들으신 후엔 픽하고 웃어버리고 말

그런 시시하면서도 지극히 일상적인 의문인 것입니다.

                                

의문이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이 3년이란 세월을 12제자를 데리고 사역을 하실 때

어떻게 의식주를 해결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단호히 말씀하지 않으셨읍니까?

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입니다.

가정과, 재산과 심지어 부모마저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종용하셨던 것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읍니다.

12명의 제자에 예수님을 합하여 13명의 결코 적지 않은 수가 함께 다녔으니

이들의 식생활, 주거 생활, 의복문제,

이 모두가 다 간단한 일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가정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니

이들이 필요에 따라서 집에서 음식을 갖여 오거나

필요한 돈을 갖여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유대지방은 춥지가 않은데다가

그들의 의복이라는 것이 아이들이 연극할 때 입는 의상처럼

이불 호충을 어깨에서부터 늘어뜨린 후

허리에 띠만 매면 해결이 되는 간단한 것이고 보면

주거와 의복문제는 그런대로 해결이 된다고 할 수도 있겠읍니다마는

하루 세끼 먹어야하는 음식 문제만큼은 결코 간단히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키웠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르키신 예수님께서 매 식사마다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하여턴 이건 꽤나 궁금한 의문이었읍니다.

 

밀밭 사이로 가시다가 밀을 까불어 먹은 제자들의 이야기나,

열매를 얻으려다 얻지 못하여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기록을 보면

분명 매 끼마다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가나의 잔치에 참여하신 모습, 세리 마태와 함께 식사하신 모습이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모습,

마르다의 집에서,   또 유월절 만찬때처럼 여기 저기서 식사를 하셨지만

그 나머지 그 많은 기록되지 않은 식사말입니다.

 

그 당시엔 요즈음 처럼 말씀 후에 헌금도 없었고,

또 예수님이 병을 고쳐준 대부분의 환자들이 다 가난한 사람들이었기에

무슨 큰 감사헌금을 기대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탱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읽은 말씀처럼

숨어서 봉사하고 희생하는 여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첫 이적을 행하시도록 종용한 것도 여인이었으며,

최초로 예수님을 증거하며 외친 사람도 우물가의 여인이었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후

모든 제자들이 다 각기 자기들이 속했던 곳으로 돌아 갔건만

유독 이 여인들만이 끝까지 예수님을 위해 향유를 갖이고 무덤을 찿고,

그래서 부활의 영광의 첫 증인이 되었으며

또 이 부활의 기쁨을 처음으로 전파한 것도 바로 여성들이었읍니다.

이렇듯 기독교의 발생과 전파와 발전에서 여성들이

실로 지대한 공로를 세웠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여성들의 숨은봉사가 예수님 때에도 컸고,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여성들의 봉사가 실로 큽니다.

한마디로 여선교회가 없으면 교회가 운영이 되지를 않읍니다.

교회가 부흥은 커녕 굴러 갈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고,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의 봉사에 목사님들이 가끔 찬물을 끼얹으신단 말이예요.

 

오늘 읽은 마르다의 이야기를 인용하시면서,

항상 마리아만 칭찬하시고, 마르다처럼은 되지 말라고 말씀들을 하십니다.

교회는 항상 말씀이 중심이요, 말씀이 먼저이기 때문에 아무 일도 안해도 좋으니

말씀을 들으라고 역설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예배 후 친교시간이나, 교회의 무슨 행사가 있을 때엔

식사가 준비되어 있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좀 모순이예요.

 

성경을 자세히 읽고,

또 주석을 들여다 보면 목사님들의 말씀이 맞읍니다.

틀림이 없어요.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며

평신도로 교회에 나와 예배 드리며 봉사하는 입장에서 보면

모순이 느껴지는 것을 또한 어떻게 할 수가 없읍니다.

 

저는 성경을 원문으로 읽으면서

그 본래의 뜻을 찿을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기에 우리 한글 성경과 영어성경,

그리고 성경에 붙어 있는 주석들을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 보면서

목사님들의 말씀이 맞기는 맞는 구나 하고 생각을 했읍니다.

왜냐하면  많은 주석들이 이런 맥락에서 쓰여 진 것을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허나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도 해석 할수 있지 않을까고 자문하여 보았읍니다.

 

보세요,

마르다의 집에 예수님이 손님으로 오셨읍니다.

(이 때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인지,

아니면 그 전인지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 잘 모르겠읍니다마는,

나사로를 살리신 일과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참으로 사랑하셨다는 기록은

요한복음에만 나와 있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더 칭찬하시고 마르다는 훈계하셨다고 하시며

인용되는 구절은 누가복음에만 있읍니다.)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죽었던 동생 나사로를 살려주신 은인임과 동시에

자신을 참으로 사랑해주는 분이었읍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이해해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인지 상정이지요.

그런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좀 더 잘 대접하려고 애를 쓰지 않읍니까?

마찬가지로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여 주시는 예수님이 오셨으니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 올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성을 다 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정성스레 많은 반찬을 준비하노라니

마음이 분주해지고 정신이 분망한데 

그 동생인 마리아는 얄밉게도 예수님 발 아래 무릎 꿇고

말씀을 경청하느라 도울 생각을 안하는 것이예요.

얼마나 얄밉습니까?

아마 시누이 올캐지간이라면 충분히 싸움할 이유가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보고 나와서 좀 도으라고 했던 것인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읍니까?

"마르다야! 사람이 떡만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니

너도 음식 준비하는 것 그만두고 들어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렴."

하신 것이 아니고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하시지 않았읍니까?

즉 이것은 준비 하기는 하되

너무 많이 찬을 차라느라고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지요?

여기에서  한가지 사실을 발견 할 수가 있읍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

일로 봉사하는 사람은 계속 일로 봉사하되

너무 무리해서 준비를 많이 하느라

말씀을 듣는 사람마저 못듣게 하지는 말라는 말씀이었던 것 같읍니다.

 

이는 후에 바울 사도를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었읍니다.

로마서 126절에서 8절까지 한번 찿아 봅시다.

(25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 함으로,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마르다보고 섬기며 긍휼을 베프는 일은 즐거움으로하지

많은 것을 미쳐 장만 못한다고 짜증내며,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

즉 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까지 불러내지는 말라는 말씀이었던 것 같읍니다.

 

그런데도 목사님들은

마르다보다는 마리아를 더 예수님께서 칭찬하셨으니

모든 교회일들은 목사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할 수 있으면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아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말씀만 듣고 일은 안하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읍니가?

상상은 여러분에게 마끼겠읍니다.

 

목사님들이 그렇게 설교를 하시는 데에는 또 그대로의 이유가 있는 것 같읍니다.

교회는 예배드리며 말씀을 듣는 곳이지, 봉사하는 곳이 아니라고 말씀들을 하시지요.

예배에는 말씀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물론 다 맞는 말입니다.

이 외에 다른 의도는 뭐가 없을가요?

 

제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읍니다.

그런데 이 집회가 끝나고 있을,

정말로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읍니다마는 있다고 가정을 하고,

많은 분들이 그 다과회를 위해서 자리를 뜬다고 하면 저의 기분이 어떻겠읍니까?

모처럼 주어진 기회에

제딴에는 열심히 준비해서 부족한대로 열과 성을 다해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듣는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가

앞에 보이는 자리가 기계충 많은 머리처럼 듬성 듬성 빈다면

막말로 김이 새지요.

목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성경을 주석하고,

그 말씀을 풀이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목사님이나 교수,

즉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 있는 분들이지,

다른 봉사로 긍휼을 베푸는 분들이 아니기에

마리아를 더 칭찬하는 것이 아닌가고 생각키웁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예배 후 음식 준비로 머리가 곽 차 있는데

목사님의 말씀대로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고 해서

그 말씀이 어디 머리에 들어 옵니까?

물론 목사님으로 볼 때엔 다 앉아서 경청하는 것 같지만

마음은 벌써 뽕밭에 가 있는 빈 껍질만 있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젯밥에만 신경을 쓴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말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봉사를 할 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는 지혜필요하고,

또 그 일들을 해야 하는 때를 분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어디에 있읍니가?

건물을 중심으로 교회를 보면 그건 구약의 회당이 되는 것이지

예수님이 계신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 마음 속에 있고,

또 교회의 주인이신 에수님도 우리 마음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눈에 보이는 성전으로서의  교회는

작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신 교회 즉 교인들이

함께 뫃여 찬양하고 기도하며 상부상조하는 집합체,

다시 말해서  이중표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생주막이지

성전,그곳에만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임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인생주막에서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하는 축도,

즉 이 축도를 받아야 축복을 받을 터인데 이 축복마저 희생하면서

다른 교우들을, 즉 작은 예수님을 모셨으니 결국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을 즐겁게 대접하겠다고 부엌으로 먼저 내려가는 마르다를

마리아보다 못낫다고 질책하시는 목사님들의 설교에

조금은 이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봉사할 때는 열심히, 성심껏, 자기를 희생하는 봉사를 소신을 갖고 하십시요.

그렇다고 봉사를 핑계로 예배에 게으르지는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육체적인 봉사 때문에 기도하는 일과,

주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게으르게 하지는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와 예배와 더불어 균형잡힌 봉사를 할 수가 있을까요?

지난 봄, 김인철 목사님을 모신 제직 수련회에서

올바른 봉사자의 상에 대하여  좋은 말씀을 많이 들은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좋은 말씀에 제가 사족을 다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마는

목회자가 아닌 평교인의 입장에서,

또 봉사하는 봉사자의 입장에서 느낀 몇가지 점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여선교회원들은 봉사해야하는 팔자를 타고 나셨나 봅니다.

특히 지난 몇년동안 저희 교회는 더욱 그러했읍니다.

꿈에도 그리던 자체 성전을 갖게 되니 거기에 따른 일이 무척 많아졌지요.

교회당을 보수하는 일에 동참하시어

팔을 걷어 부치고 페인트 칠하랴

쓸고 닦으며 뒷 정리 하랴,일꾼들 밥해 먹이랴, 바자 준비하랴,화단을 가꾸랴,

왜 또 잔치 할 일은 그렇게도 많은지....

정말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고 힘든 세월이었읍니다.

이런 바뿐 중에 또 금요 기도회까지 시작하셨읍니다.

이 모든 일들이 여기 앉아계신 우리 여성들로부터 시작이 되었읍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신 분 모두가

남편들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안히 살면서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유한 마담들이 아니라

남편과 함께 직업전선에서 뛰시는 맞벌이 부인네들이며

돌보아야 할 자녀들이 있고,

챙겨야 할 남편이 있는 가정에 매인 여성들이었읍니다.

집에서도 여성들이 하여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읍니까?

밥하고 빨래하고,소제하고,

거기다가 일 나가기 위해 얼굴 치장마저 남자들보다 더 정성드려 오래 해야하니

집에 돌아와 밥상에 앉아 신문이나 뒤적거리는 남자들에 비해

정말로 바쁜 여성들임을 잘 알고 있읍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저는 여성으로 안 태어 난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으니까요.

이렇게 바쁜 중에도 내 교회, 우리교회, 내 믿음, 우리 믿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해온 시간들이었읍니다.

이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읍니다.

이 모든 일들이 여선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 모든 진행을 여선교회 회장이 책임을 지다보니

일을 하시는 분은 하시는 분대로 burn out,완전히 탈진 상태가 됩니다.

 

물론 수고했다고 위로하며 격려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마르다보다는 마리아가 더 칭찬을 받지를 않나,

또 신기한 일은 일을 하면 할 수록 좋아지는 사람과 싫어지는 사람이

뚜렷히 갈라지는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안 할 때엔 이 사람, 저 사람 다 괞챤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인간관계도 괞챦았었는데,

일을 하다보니 의견에 충돌이 생기기도 하고

사물을 보는 방법이 달라지면서 뒷공론이 수근 거려 지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있는 소리 없는 소리들이 나와

서로가 좌절하는 시험에 들게 되기도 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교회에 너무 시가늘 보낸다고 불평이지요....

 이를 옆에서 본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모두가 책임 있는 일들을 안 맡으려고 해요.

발뺌을 하는 풍조가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곤디오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나는 이사람의 피에 아무 죄가 없으니 너희들이 책임 지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책임있는 자리에서 책임있는 결정을 회피한 빌라도가

결국엔 어떻게 되었읍니까?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지 않읍니까?

매 주일마다 하는 신앙고백에서

곤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밖혀 죽으시고...

어렵다고, 힘들다고 책임을 회피하지는 마십시요.

이 모든 어려움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감당할 만한 시련임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 들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합시다.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할 때엔 피곤을 모르는 법이니까요.

 

일을 맞기는 입장에 있는 분들은 일을 할 사람을 봅을 때

그 사람의 능력을 보고 뽑아야 합니다.

나와 가까우니까, 나와 친하니까 뽑고,

나와 멀리 있고, 내가 보기 싫어서 뽑지않게되면

결국은 간장 종재기에 국을 담는, 그래서 모두가 어려워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국은 국그릇에, 간장은 간장종지에 담아야하지 않겠읍니까?

한번 사용한 국 그릇이라고 다시는 사용하지 않은 채

선반에 올려 놔두기만 한다면

그건 그릇으로의 가치를 잃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반의 자리까지 축내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너무 심각해 지지 마세요.

이건 우리 교회 이야기가 아니라 토론토에 있는 어느 다른 교회 이야기 였읍니다.

 

일을 하다보면 여러 사람과 상의를 하게 되지요.

요번 창립 기념주일에는 어떤 음식을 할까 하고 상의를 했다고 가정 합시다.

누구는 샌드위치를 하자고 하고,

누구는 국밥을 하자고 하고,

또 누구는 비빔밥을 하자고합니다.

세가지를 다 하면 좋겠는데 그럴 수는 없으니 한가지를 선택하게 되지요.

비빔밥으로 결정을 하면

샌드윗치를 하자던 사람과 국밥을 하자던 사람이 삐쭉거립니다.

? 자기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회장하고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피곤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건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읍니다마는 이런 과정에서 전체를 보며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을 보고

좋게 말하는 사람은 초지 일관의 의지라고 칭찬하고

밉게 보는 사람은 고집 불통이라고 합니다.

결과야 어찌 되었건 적당히 비위를 마추어 가며 소리 없이 지내는 사람을

좋게 말하면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또 나쁘게 말할 때에는 사꾸라라고 하지요.

똑같은 사람이 의지의 인물이 되기도 하는가 하면 고집불통의 몹쓸 사람이 되고

똑같은 사람이 융통성이 있는 인물이 되기도 하는가 하면

사꾸라가 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세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도 사실은 지독한 고집 불통이었읍니다.

네가 화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 마디만 하면 살려 주겠다는데

끝내 묵무대답이었으니까요.

아니,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마디 한다고

그래 하나님의 아들이 안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더라구요.

에서의 경우를 보세요.

배가 고파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을 주어야 죽을 주겠답니다.

에서의 생각에는

그래, 너 장자해. 그런다고 실지로 장자인 내가 너처럼 차남이 되겠어?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한 마디 한것이 씨가 되어 크게 당하지 않읍니까?

말이 씨가 됩니다.

그러니 힘들어 죽겠다는 말, 다시는 안하겠다는 말,

미워 죽겠다는 말 등등 부정적인 말들은 서로가 삼가야 겠읍니다.

하나님의 세상은,

하나님의 일은 우리들의 세상 일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무슨 일이건 주어진 일을 할 때엔

인간의 일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그 목적과 결과를 하늘나라의 소명에다 두어야 할 것입니다.

칭찬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욕이 무서운 것이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자신의 속에 있는 예수님에게 물었을 때

부끄러움이 없이 성실히 최선을 다 하였다고 대답할 수  있는가 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칭찬만을 쫒다보면 가정에 소홀해 지기 쉽고,

기도와 예배가 외식하는 사람의 모양을 따르게 되며,

자그마한 시련에 좌절하게 되는 것을 우린 경험으로 많이 보아오지 않았읍니까?

 

예수님께서도 땅에서 칭찬을 받으면 그는 벌써 그 상급을 받은 것이니

하늘나라에선 받을 것이 없노라고 하지 않으셨읍니까?

 

믿음의 여성들이요, 기도의 용사들이며

가정을 가슴에 안고.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신 여선교회 여러분은

주어진 은사에 따라 그 힘든 잔을 피하려 하기 보다는.

그 소망을 조금 더 높은 곳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나오미의 첫째 며느리,오르바처럼

열심히 충성하다가 중간에서 그만두시지를 마시고

두째 며느리 룻처럼 끝까지 열심히 섬김으로써

축복속에 예수님의 반열에 들어서시는 여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확신의 믿음속에 어려움을 극복하시어

더 큰 축복속에 영광을 얻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바다에 떠있는 배를 볼 때

바다가 너무 크기 때문에 바다는 보이지 않고 배만 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선교회에서 하시는 일도 너무 큼으로

때로는 잘 보이지 않읍니다.

그래서 숨은 봉사가 되는 것이지요.

 

비록 남에게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처럼

아낌없는 헌신속에 복음의 씨앗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리아가 끝날까지 주님을 따르고 위함으로써 부활의 첫 증인이 된것처럼

우리 모두가 다 옥합을 깨트리는 아름다운 믿음의 여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드리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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