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모세의 여정이 멈춘 곳 – 느보산
12 모세의 여정이 멈춘 곳 – 느보산
해발 835m의 느보산은 40년 동안 광야에서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가나안 땅을 조망하고 숨을 거두게 된 산입니다. (신 34:1)
느보산의 정상에 올라 모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라봤었다고 추정되는 지점에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 올라 모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아물아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때문에 내 눈에는 몽환적으로만 보이는 지경이었지만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던(신 34:7) 모세의 눈에는 크고 웅장하게 지어진 여리고 성도, 풍요로운 헤브론 산지도 또렷이 보였을 터인데 막상 자신은 그리로 갈 수 없다고 하시니 얼마나 하나님이 야속하였을까요?
아니 원통하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오래전 소돔과 고모라 성을 구하기 위한 아브라함의 간청은 여러 번에 걸쳐 들어주시며 그 결정을 번복하시었던 하나님께서 40여 년의 힘든 광야생활을 하며 여기에까지 왔는데 왜 모세의 마지막 바램은 끝내 거절하시었을까요?
어떤 주석은 지팡이를 두 번 두드렸기 때문이라고. 또는 물을 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니 드러내고 자기가 한 것처럼 말 했다고도 합니다.
다들 성경에 있는 대답이니 그 어느 하나 틀린 것은 없겠지요.
그런데 저는 어째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가나안 정탐꾼 12명을 각 지파에서 뽑아 40일 동안 정탐하게 한 후 돌아와 보고하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 13: 30) 하였으나 남은 10명의 보고에 온 회중이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니 (민 14: 1)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하나님께서 20절로부터 23절에 이르도록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네 말대로 사하기는 하지만, 내가 그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라고….(민 14:20)
그러나 모세는 자기는 건널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었나 봅니다.
시간이 지나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모압 평지의 비스가산(느보산의 다른 이름)에서 요단 건너편을 바라 본 후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신 3:25) 하나님께서는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시며 딱 잘라 거절하십니다.
하나님과 독대까지 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소불위의 능력을 부여받은 모세가, 소위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그 다수결의 결정에 따라서 뒤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내렸음은 그 또한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울부짖는 회중들이 더 두려워서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또한 건너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도 다수 백성의 요구를 들은 바로 그 순간의 선택 때문에 말이지요.
그래서 시작된 광야의 40년 생활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또 한 번의 선민 과정이었던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신들의 성정들이 DNA로 몸속에 녹아 있는 인간들을 인도하는 일은 이렇게도 힘드는 일인가 봅니다. 옳은 길이기에 강요하면 “독재자!”라고 매도하며 타도하려고 하고, 필요한 것들은 주어도 주어도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니 말입니다.
“밧세바”의 나신에 현혹되어 우직스러운 충신이요 또한 용장이었던 “우리아”를 죽게 만든 암만에서 멀지 않은 느보산에서 이어지는 상념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어떤 남자를 사랑하던, 어떤 여자를 사랑하던 그건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에 속하는 일이지요.(가끔 부모가 반대를 해서 엉뚱한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래서 젊은 나이 때, 사랑의 결실로 결혼을 하며 서로가 죽기까지 정절을 지키며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하지요. 그런데 그 “사랑을 하는 것은 자유 의지”라면서 결혼을 한 남자와 결혼을 한 여자가 서로 결혼 밖에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요즈음 한국의 연속극들의 주제로 안방극장을 석권하고, 거기서 대리만족을 얻는 많은 사람들을 양산하다 보니 스스로가 주인공인양 착각 속에 그것을 모방하게 까지 발전하여, 요즈음 한국의 성 풍속도는 세계에서 제일 문란하다고 까지 말하게 되었고, 가정이 깨지는 수가 상상을 초월하며, 그 과정에서 정서적으로 잘 성장하지 못한 자녀들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악순환의 연속이 되었나 봅니다.
그 자유의사가 약속을 어겼을 때 일어나는 일들의 결과로 말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하여 우리아를 암만에서 죽게 만든 일들을 보며 자란 아들이 아버지를 반역하여 죽이려는 일들이 성경 속에서 일어나기도 하였지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약속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약속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네가 믿어야 된다는 법이 없고, 네가 믿는다고 내가 믿어야 된다는 법 또한 없습니다. 종교의 자유라는 게 있다니까 말이지요.
허나 일단 한번 약속을 하였으면 그 약속 속에 거하여야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은 남녀의 사랑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종교의 자유라며 바알도 믿어보고, 아세라도 믿어 보고, 부처도 믿어보고, 마호멧도 믿어보고, 성황당의 돌부리도 믿어 보고 하는 것이 정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특히 질투하는 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엇을 믿던 그건 그 믿는 사람의 자유지만
일단 믿기 시작하면 그 약속된 신을 믿어야 하는 게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때에도 이런 말을 하며 군중들을 부추기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나 보지요?
“믿는 것은 자유”라고.
하나님만이 구원을 주시는 분은 아니다”라고.
“진리에 이르는 길은 여럿”이라고.
그래서 그 믿음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이 민주주의라는 다수의 횡포에 따라서 개인의 약속이 변질될 수 있는 일일까요?
그래서 민주주의는 중우의 정치라고까지 말하여졌나 봅니다.
허나 그래도 아직 까진 그 보편 타당성을 대체할 어떤 수단이 없기에 지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지랑이로 뽀얗게 멀리 보이는 가나안처럼 정립이 안 되는 마음으로 정상에 있는 “모세 기념교회”로 가려 몸을 돌리니 뱀이 감싸고 있는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